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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식 설교를 위한 네 가지 형식

by 파피루스 2019. 8.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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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식 설교를 이끌어 가는 네 가지 형식

 

정인교

 

 

1. 스토리 진행(running the story)

성경사건의 진행을 그대로 옮겨 설교하기

2. 스토리 보류(Delaying the story)

설교본문을 뒤로 미룬 채 현재의 관심사로부터 설교시작하고 그 다음 본문을 대입

본문이 익히 알려져 있어 놀라움 전달에 어려움 있을 경우

3. 스토리 유예(suspending the story)

성경본문으로 설교 시작하여 다른 무엇이 스토리 진행과정에서 돌출하는 것 즉 스토리 흐 름 선상에 있는 해당 본문을 떠나는 것으로 이 경우는 다시 본문으로 돌아옴

그러나 만일 두 본문을 갖고 시작하여 어느 하나를 다루다가 다른 본문으로 가서 다시 돌 아옴 없이 끝맺으면 스토리 보류에 해당함

4. 스토리 전환(alternating the story)

기본적인 줄거리에 다양한 성경 기사를 그때 그때 동원하는 기법

 

* 이야기식 설교의 작성단계

 

1. 평형(disequilibrium)을 뒤집어라

 

이 이 단계는 청중들을 설교의 주제에 참여시킴으로 그들의 평형감각(늘 갖고 있는 생각)을 뒤집어 놓는 단계이다. 회중의 경청태도는 매우 다양하고 준비상태 역시 천차만별이다. 존 듀이는 “사고(thinking)는 심각한 문제점을 만난 그 순간부터 시작된다”고 언명. 예를 들어 “오늘 사랑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합니다”한다면 그 다음 회중들이 경청하게 하기 위해서는 긴장감(문제)이 전달되도록 하여야 한다: “우리의 문제는 너무도 자주 사랑의 손길을 펼쳐 보지만 되돌려 받는 것이라고는 멍들고 상처 입은 손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거부당할 각오를 하는 것입니다”

갈등이나 문제점은 이야기가 만들어지는 재료이다. 이 말은 설교제목에도 적용된다. 설교제목은 결론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모호함과 문제를 드러내야 한다.

 

연극이나 영화의 서두가 각양의 모호함과 문제를 제시하며 시작하는 것에 주목하라.

모든 설교에는 언제나 이슈가 되는 중요한 모순 꼼짝할 수 없는 상황 혹은 문제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만 서론에서 이런 모호함이 다루려는 주제에 대한 직접적인 모호함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서론은 보다 핵심적인 주제를 향한 핵심적인 모호함을 위한 무대장치 정도로 구상될 수도 있다.(하지만 이 방법이 설교자의 의도와 상관없이 회중이 따라오지 못한다면 그것은 문제일 수 있다.(이것은 서론의 예화 사용의 경우에도 해당된다)

설교를 열어가는 단계의 목적은 청중의 마음에 모호함의 방아쇠를 당기는 것

지금까지 우리 설교는 설교에서 줄거리는 제쳐두고 설교하도록 배워왔고 심지어 서론 부분에서 한 문장으로 된 핵심 개요를 말하도록 배워왔다. 이것은 드라마가 시작되기도 전에 중앙무대로 나가서 드라마에서 하게될 모든 중요 포인트를 발표해 버리는 멍청한 극작가와 다름 없는 것이다.

 

바람직한 예:

a. 월러스 해밀턴의 “기독교도 기회가 있는가”라는 설교: “기독교를 향해 돌진하는 강력한 힘들이 존재하는 세계에서 과연 기독교는 살아남을 수 있을까요?

b. 어네스트 프레몽티틀의 “어린아이로”라는 설교: 예수님의 이 이야기에는 확실히 매력적인 것이 있습니다. 그리고 이상하게 우리를 불편하게 만드는 무엇이 있습니다.

c. 레즐리 웨더헤드의 예수는 거룩함과 세속을 구별하셨는가? 라는 설교에서: “저는 가는 곳 마다 현대 종교의 가장 흔한 비판이 바로 종교가 실제적인 삶과 무관하다는 점임을 발견 하고는 무척 고민을 합니다”

d. 데이빗 뤼드의 우리 기도의 응답은 무엇인가 라는 설교에서 : “여러분이 기도할 때 누군 가가 듣고 있는 사람이 있습니까?”

 

이 예들은 공통적으로 설교의 서두에 ‘걸려있는 무엇’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끝맺음과 해명이 필요한 무엇이 있다는 이야기이다. 불완전하기에 회중이 계속 듣게 하는 것

 

문제는 이 도입 뒤에 바로 해결책을 주면 안된다는 것. 제럴드 케네디의 설교가 보기: “오늘밤 저는 여러분에게 좋은 소식인 복음을 전하려고 합니다. 이것을 세 가지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는 바로 이것입니다. 복음은 인격의 좋은 소식입니다. 우주의 핵심과 그 중심에는 한 인격체가 자리잡고 있는데 바로 하나님이 한 인격이라는 사실 이것이 좋은 소식입니다”.

 

이 설교에서 금새 긴장이 사라지게 됨/ 만일 복음은 인격의 좋은 소식이라는 문장다음에 이런 문장을 집어넣는다면 어떨까: 아니 그게 어떻게 좋은 소식입니까? 아마 그런 질문을 던지는 분도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잘 생각해 보세요. 사실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소식들은 대부분이 좋지 않은 소식들입니다. 특별히 오늘날 이곳 저곳에서 너무도 비인격적이고 비인간적인 경험들을 하며 사는 것은 좋지 않은 소식중 대표적인 것입니다. 그러니 이 비인격적인 세상속에 우주의 핵심과 그 중심에 하나님이라는 한 인격이 자리잡고 있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소식입니까.

 

이 단계에서는 해답을 주지 않는 게 중요하다. 회중들로 질문과 문제의식을 갖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2. 모순을 분석하라

 

이 단계는 분석과 진단의 단계이다. 이 단계는 길이로 보면 가장 긴 단계로 나머지 것들을 묶어 놓은 것 보다 길 수도 있다.

 

이 단계의 핵심어는 “왜 그런가?” 이다. 이런 것을 갖고 모순의 핵심으로 뛰어들게 해야 한다. 이 단계는 진단의 단계인바 진단은 우리 설교 임무에 핵심적인 것이다. 이것은 마치 심각한 질병으로 문제점을 느끼고 의사를 찾는 것과 같다. 의사의 진단이 얼마나 중요한가? 왜 그런가를 물어보는 진단은 설교 내용뿐 아니라 설교구성을 유지해 나가는 중요한 도구가 된다. 적절한 분석은 깊이를 요구하며 깊이 있는 분석을 위해서는 단순성을 넘어 인과관계의 복잡성까지 나아가야 한다. 예를 들어 탕자가 왜 집을 나갔는가? 를 놓고 인과관계의 복잡성의 차원에서 풀어보는 것이 바람직하다.

 

EX) 왜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한가? 전형적 대답: 그들은 게으르기 때문이다. 그럼 왜 게으른가? 왜냐하면 동기부여가 없기 때문이다 왜 동기부여가 없나? 왜냐하면 그들은 전혀 신경 쓰지 않기 때문이다. 자아존중 개념이 없기 때문이다 = 일하는데서 실패한 문제가 일하지 않는 문제의 배후에 있음을 알게 됨

 

만일 이런 분석이 피상적일 때 거침없이 술술 나오는 대답으로 일관하게 되고 그것은 회중의 신뢰를 떨어뜨림

 

사람들은 이미 완성된 가구에는 약간의 관심을 보이나 가구 만두는 과정에는 상당한 관심을 보임을 알아야 한다. 설교자는 회중과 함께 분석의 과정을 경험해야 한다.

 

요약하면 이 단계에서는

1) 피상적인 분석에서 깊이 있는 진단으로 옮겨가기

2) 해결의 준비가 되도록 청중을 세워가기

3) 말씀이 선포될 수 있는 장을 마련하기

 

ex) 헬무트 틸리케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이 비유는 너무도 단순하고 아름다울 만큼 자명한 특성을 지니고 있는 것처럼 보이며 또 어릴 적부터 친숙한 것을 포함하고 있어서 우리는 여기에 한마디라도 덧붙이기를 주저합니다. 왜 우리 어른들은 어린아이들이 이해하는 것을 해부하고 분석하며 머리를 짜내면서 이리저리 궁리해야만 합니까?

 

이 언급 뒤 틸리케는 곧 바로 “우리는 자주 우리가 가장 친숙한 바로 그것들의 내적인 신비를 놓치고 있습니다”라고 말한다. 이것은 이 비유가 너무나도 자명해서 철저하리 만치 진부한 요점을 내포함을 설교자가 알고 있음에서 나온 말이다. 즉 현대의 독자는 바리새인에게는 냉담하고 세리에게는 동정적이 되기 때문이다. 틸리케는 이런 기존의 이미지에 바리새인이 자신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의로운 인물이며 세리는 좋지않은 인물임을 내세우는 새로운 이미지 작업을 시도하면서 관심을 고조시킨다. 이리되면 회중은 그러면 왜 바리새인은 의롭게 되지 못하고 세리만 의롭게 되는가에 대해 혼동을 일으키게 된다. 여기서 회중의 ‘왜 그런가?’라는 질문은 절정에 이르게 된다.

 

이때 틸리케는 “여기가 바로 우리가 두드러진 핵심을 만나는 자리입니다”라는 멘트를 덧붙인다. 이를 통해 그는 모호함이 주는 절박한 긴장감을 증대시키면서 모순을 분석하는 자리로 옮겨간다. 그리고 그 해결점의 실마리를 드러내는 단계로 나아가는 것이다.

 

이 단계의 궁극적인 목적은 왜 그런가에 대한 설명에 도달하는 것이다.

 

3. 해결의 실마리를 드러내라

이 단계는 문제화된 이슈를 해결해 주는 어떤 설명을 찾는 단계이다. 지금 문제가 되는 논점을 납득할 만한 것으로 만드는 것으로 이것은 기대하지 않은 곳으로 부터(상식적인 기대) 오며 그것이 모든 것을 뒤집어 놓는다. 소위 역전의 발생이다.

 

다음의 조크에도 분명한 역전이 보인다:

올리버 경은 영국의 유명한 사냥클럽의 꽤 나이든 회원이다. 그 회원들은 모여서 차를 마시며 언제나 그 클럽 시니어 멤버에게 사냥의 독특한 개인 경험을 이야기하도록 한다. 올리버 경 차레가 되었다. ‘음’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어느날 우리가 아프리카의 코끼리를 사냥하고 있었지요. 거대한 수컷 코끼리를 쫓으면서 하루 온종일을 보내고 거의 잡는 희망을 포기하려던 순간이었습니다. 언덕 꼭대기에 올라 갔는데 갑자기 저기 아래에 내가 이제껏 본 것중 가장 큰 숫코끼리가 황야에 서 있는 것이었어요. 여러분 제가 나의 총을 들고 내 눈에 들어온 코끼리를 향해 막 방아쇠를 당기려는 순간 내 오른 편 풀숲에서 부스럭 하는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바라보니 불과 몇 피트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 벵갈산 호랑이가 있는 것이었어요. 그리고 그 호랑이가 으르렁 으르렁 울부짖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이 말 하기가 참 부끄럽습니다. 여러분 저의 바지가 다 젖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말을 듣던 한 젊은 멤버가 말했습니다. “올리버 경님, 너무 부끄러워 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그런 순간에는 누구나 그럴 수 있거든요.” “그런데 그 때가 문제가 아니요” 라고 올리버 경은 대답하면서 “그 때가 아니라 지금... 제가 으르렁 으르렁 하는 그 순간에 바지를 적셔 버린 거에요”

 

이 유머는 전혀 기대치않은 역전을 통해 전달된다.

 

이 부분이 밋밋해 지는 이유가운데 하나는 역전의 논리가 아닌 성경을 근거한 ‘어떻게로’ 급히 나아갈 때 그러하다.

 

프스터-헤리스는 “해결의 방법은 언제나 문제가 된 그림을 뒤바꾸고 역전시키고 급회전시켜서 새로운 그림이 급작스럽게 떠오르게 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의 대표적 실레를 틸리케는 많이 제공한다: 그는 탕자를 고향에 돌아오게 한 것은 먼 타국이 그를 고향에 돌아가고 싶도록 만들었기 때문이 아니다. 오히려 고향 생각이 먼 타국을 진저리치게끔 싫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만일 탕자의 비유를 가지고 설교할 때 이 본문은 잔치에참여한 의롭지 못한 아들과 문밖에 있는 충성된 아들로 대별될 수 있으며 이것은 인간을 다루시는 하나님의 방법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이 본문이 설득력을 가질려면 본문에 대한 역전의 원리를 적용해야 한다. 즉 여기서 둘째 아들을 역설적으로 성실한 자로 그려지도록 해야 한다: “충성되고 충직하게 일한 결과가 결국은 다른 사람들을 위한 잔치가 되도록 한 경험을 하지않은 자가 있습니까? 열심히 일한 대가가 더 많은 일을 하게 하는 반면 무 책임 하게 산 사람이 오히려 잔치의 주역으로 등장한 다는 것은 우리의 속을 꽤 불편하게 합니다. 상이나 명예가 언제나 묵묵히 있어야 할 자리에서 성실하게 일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흐려 우연히 그 자리에 있게 된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을 알지 못하는 사람이 어디있습니까? 분명히 아십시오 잔치는 분명 불공정한 것입니다!”

 

이런 진행은 분명 역설적인 것이다. 그리고 이 역설에 회중들은 공감하기 마련이다. 바로 여기서 설교자는 역전을 마련해야 한다. 즉 큰 아들이 잔치의 바깥에 방치되었는데 어떻게 예수 이야기에서 그가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하는가? 큰 아들이 성실하기에 당연한 결과인가 아니면 그의 성실을 다시 보아야 하는가?

 

큰 아들은 들에서 돌아오면서 집에서 잔치가 벌어지는 것을 보고 의아심과 기대반으로 돌아와서는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를 알기 위해 아버지가 아닌 종을 찾는다. 에수는 이 장면을 의도적으로 집어넣으신 것이다. 즉 아버지를 신뢰하지않는(지금까지의 아들과는 정 반대의) 큰 아들의 그림이다. 이미 작은 아들이 돌아왔다는 이야기를 듣기전에 이미 큰 아들의 반응은 드러나 있다.

Ex) 모리아 산에서 이삭을 바치는 아브라함 기사 - 내적인 모순은 모든 아버지가 할 수 있는 근원적 제사를 바치도록 요청받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약속의 유일한 도구인 이삭을 바치라는 것이다. 언약의 이름으로 약속 성취의 유일한 도구를 파기하라고 아브라함에게 요청하는 것은 논리적으로 앞뒤가 맞지 않는다.

 

역전의 원리는 다음과 같은 네가지 형태로 가능하다:

원인-결과의 역전

변화된 원인의 역전

변화된 가정의 역전

변화된 논리의 역전

일단 해결의 실마리가 분명하게 되면 청중은 말씀을 들을 준비가 된 것이다.

 

4. 복음을 경험하라

 

이 단계는 복음을 경험하는 단계이다. 일단 해결의 실마리가 드러나면 청중은 말씀을 받을 준비가 된 것이다. 이때 조심할 것은 복음의 누전(the homiletical short circuit)이다. 즉 회중은 해답을 빨리 듣고 싶어하고 설교자 역시 그런 기대에 부응하려 한다는 것이다.

좋은 소식을 선포하는 실제적인 내용은 선포보다 앞서는 실제적인 내용과 일치해야 한다. 이 내용을 설교 서두에 전하는 것은 치명적이 될 수 있다.

 

5. 결과를 기대하라

 

지금까지 설교의 구성은 논점과 더불어 간단한 해결의 언급도 밝히면서 설교를 시작하여 설교의 본론은 주로 성경구절과 현대의 상황을 한데 얽어 놓는 일을 포함한 해결책을 상술하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 모든 과정들은 결론 부분을 구성하는 설교의 ‘물음’의 최고점으로 인도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리고 모든 것을 ‘헌신으로의 초청(call to commitiment)으로 끌고 가도록 해야 했었다. 이 마지막 요구나 초청이 최고의 절정이었다.

 

이야기식 설교는 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고조되는 긴장감이 설교의 70% 진행정도에서 깨지기 시작한다. 해결은 복음이 새롭게 나타난 상황과 교차할 때 발생하고 ‘물음’이란 - 결과를 기대하는- 복음에 응답함으로 가능케된 차이점을 한층 더 보여주는 것이다.

 

즉 클라이맥스가 설교의 종결부에 나타나는 전통적 인 방식과 달리 여기서는 해결의 순간에 위치한다. 그리고 나서 그 해결의 결과로 인해 문제를 다시 정돈하는 것이 설교의 ‘물음’과 동등한 것이다. 즉 절정은 복음의 제시에 주어져야 하는 것이다.

 

* 다양성의 문제

크래독(Fred B. Craddock, As One Without Authority(Enid, Oklahoma: The University Press 1974): “세가지 요점의 설교는 한 공동체의 사건이라기 보다는 이성적인 담화로 간주된다(153)

 

그러나 한가지 방법만으로 일관하는 것 역시 “대부분 사람에게서와 마찬가지로 설교에서도 전체적인 골격이 드러나 보이는 것은 기형이거나 영양실조의 징조이다(145)

 

중요한 것은 어떤 설교든 모호함을 갖는 것이다.

 

성경의 이야기 순서를 따라 진행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크래독은 설교자가 너무 종결적인 부분을 언급하지 않도록 하여야 할 것을 주장한다: “회중은 목회자와 악수라고 나서도 이미 끝나 버린 설교를 다 떨쳐 내버릴 수 없다. 설교는 축도 이후에도 아직 끝나지 않고 우리가 도달해야 하는 결론 부분과 우리가 내려야 하는 결단관 취해야할 행동과 제단에 예물이 놓여져 있는 동안 우리가 찾는 형제들과 우리 주변을 맴돌고 있다”(158).

즉 설교의 결론이 너무 상세하거나 자세하기 보다는 무엇인가 힌트만 주고 스스로 결론을 내리도록 끝내는 여운이 필요하다. 또 장례설교의 경우 평형을 뒤집는 작업은 필요치 않다, 왜냐하면 죽음이 이미 그 기능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의 인물은 비록 형식적으로는 제 3인칭으로 사용될 수 있다 하더라도 실제적으로 제 1인칭으로 그려지고 쓰여져야 한다”(18) 그러나 이야기 안에서 다른 인물들은 제 3인칭으로 끌어 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간음한 여인의 본문인 경우 만일 당신이 그 여인을 둘러싼 사람중의 하나라면 - 에수나 그 여인의 관점이 아니라- 어떻게 느낄 것인가라고 물어볼 때 새로운 통찰력이 생길 것이다.

 

* 성경적 설교를 위한 조언

 

116/

1. 모든 중요하지 않은 것에 주목하라 - 필요한 것은 신선한 관점이다. 독특한 관점은 모든 사람들이 놓치고 있는 것을 낚아 챔으로 가능하다

118/

2. 만나는 모든 것을 파악하라 - 성서주석가에게 빨리 달려가는 것은 형편없는 설교의 지름길이다 반대로 찾지않는 사람은 책임없는 전달자가 된다.

3. 행간을 읽어라

4. 당신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자료들을 도입하라 -이야기에 당신 자신의 경험을 투여함으로 공정한 평가 및 공감대 형성할 수 있다

5. 감각을 총동원하라

6. 1인칭이나 2인칭 단수형태를 사용하라

 

 

웨인 브래들리 로빈슨(Wayne Bradley Robinson, 이야기식 설교 모형으로서 사마리아인 비유

132/ 이야기식 설교 유형

1. 쟁점을 발견하라

무엇이 쟁점인가 무엇인가가 하늘 높이 떠있어야 한다.

2. 쟁점능 탐구하라

쟁점을 돋보이게 하고 극적으로 제시하기 위한 단계로 세부 사항들이 기술된다.

3. 쟁점을 재구성하라

사마리아인 기사에서 ‘이웃’이라는 쟁점의 재 구성은 다음과 같은 두가지 방향에서 가능:

1) 내적으로 상처입은 사마리아인의 경험을 바라보면서 그 사마리아인처럼 상처입은 경험이 이웃됨의 단서가 된다

2) 그 길위에 놓인 사람을 바라보면서 이웃이라는 쟁점의 단서는 학대당하고 발가벗겨진 상태에서 평상시에는 전혀 교제도 하지않고 지낼 그런 사람으로부터 도움을 받은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기꺼이 바라보고자 하는 태도

어떤 길을 택하든 그 쟁점은 재구성되기 시작한다 재구성은 “너희 생각으로는 이 세사람중에 누가 강도만난 사람의 이웃이 되겠느냐는 에수의 질문 및 그에 대한 사람들의 대답으로부터 완성된다/ 곧 진정한 쟁점은 어떻게 하면 나는 진정한 이웃이 될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이웃 사랑의 실천은 개인의 양심으로 부터가 아닌 개인의 상처받은 자아로부터 솟아난다는 것이다(사마리아 인의 상처가 집중적으로 다루어져야 함)

4. 쟁점을 해결하라

이것은 이야기가 함축하고 있는 의미와 관련되어 있다.

가서 그와 같이 행하라!

 

강의식 대지설교와 이야기식 설교의 차이점

140/ 1. 존재 - 존재의 형성

전자의 강조점은 주로 교리와 관념 정의에 주어져 있는 반면 후자는 과정에 주어져 있다. 그 과정에서 제기되는 주된 질문은 어떤 것이 어떻게 삶의 정황속에서 실행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141/ 2. 연역적 - 귀납적

전자는 진리를 처음부터 진술한다 후자는 진리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설교의 결론 부분에 발견된다

 

3. 원죄 - 본질적 선

전자는 단정적인 현 상태에 주력하는 반면 후자는 현재를 탈출한 미래를 제시함

 

4. 논리- 상상력

전자는 극단적인 좌뇌의 사고, 이성중심으로 정보에 대한 강조와 논제의 진술에 대한 의존 논제에 대한 뒷받침을 강조하는 흐름이 이어진다. 이 방법론에 암시되어 있는 전제는 곧 만일 사람이 좋은 정보를 제공받게 되면 보다 바른 행동을 하게 된다는 것이다. 후자는 주로 우뇌의 사고에 강조점이 주어지는데 예를 들어 내가 성경을 믿는다고 할 때 그 말은 성경이 나의 마음에 다가왔다는 뜻이다. 그렇다고 반지성적이라는 말은 아니며 인간을 보다 복합적으로 보며 변화를 보다 복합적으로 이해한다는 의미이다.

 

142/ 5. 권위주의적 - 초청적

전자는 설교 초기부터 수동적인 청중들에게 동의를 기대할 수 있는 권리를 갖고 있다고 가정된다. should ought must를 사용하며 설교자는 개구쟁이 아이들을 혼내는 무서운 부모를 닮음 후자는 청중을 설교자와 함께하는 여행으로 초대한다 그것은 한 친구가 다른 친구에게 이야기를 건네는 것과 같다.

 

6. 자기 감춤- 자기 노출

143/ 어떤 형태의 의사소통을 위해서도 자신의 생각을 노출시키는 것은 정직한 행위이다. 자신의 경험을 건전하ㅣ게 사용할 수 있는 방법중 하나는 자신의 개인적 경험을 다른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다. 다른 방법은 어떤 쟁점과 싸우는 자신의 모습 혹은 자신이 영웅이 되는 대신 반영웅(antiheroes)이 되는 이야기를 하는 것. 자신을 감추는 자보다는 드러내는 자를 믿는 경향이 있음

 

7. 추상적 일반적 - 구체적 특수적

전자는 광범위한 개념을 다룸 이것은 개념과 일반화에 매몰시키는 경향이 있음; 그러나 모든 사람(everybody)은 아무사람도 아니다(nobody) 하지만 어떤 사람(somebody)은 모든 사람(everybody)일 수 있다.

 

 

 

Richard L. Eslinger, A New Hearing, Abingdon Press Nashville 1987.

 

Charles Rice: Preaching as a Story(17-27)

저자는 드류 대학의 설교학 교수

17/ 저자는 설교의 갱신의 방향을 스토리텔링의 재발견에서 발견되어질 것이라고 주장.

듀크 대학의 교수인 W. D. Davies: 설교를 교회의 벨 그 자체라고 주장하면서 그것의 친밀함으로 인해 위로하는 소리로 쉽게 인지되어지며 이른 아침의 잠이나 기타 다른 중요한 행동을 방해하지 않을 정도로 그렇게 오랜 동안 관용되어져 왔다. 그 이미지는 아둔하고 생기없는 것

설교는 그 문화적인 표현에 있어 천편일률적이며 전형적인 이분법을 반증함/ 삶의 정황을 반영하며 일반적인 공중 도덕을 강조하는 설교가 있는가 하면 정해진 범위안에서 이슈가 되는 사안의 불안을 맡는 역할을 나타내는 설교도 있음/ 이런 경우 설교자는 공동체적 가치의 도덕적 중재자(성실한 사회적 괴뢰) 혹은 공동체의 alter ego중의 하나 어떤 경우든 강단은 죽어가는 지식주의(deadening intellectualism)의 포로에 불과. 설교는 비인격적인 사안(impersonal affair) - 두서없고 산만한 스타일과 언어를 사용하는)

18/ 이 경우 설교자의 이미지는 학문적인 이상의 이미지이고 설교의 언어는 신학교 강의실과 신학수업홀의 그것이다.

이분법의 또 다른 형태를 라이스는 너무 감상적이고 감정적인 것이 인격적인 것의 내용을 찾디하는 것에서 봄 . 두서없는 스타일이 인간경험을 물들이고 관념적인 감정주의가 인간 상황을 서투르게 흉내낸다. 설교의 시연은 너무 상투적이다. 설교자는 미리 준비한 예화에 의지하며 인간 삶의 단편들은 성육신의 궤적 대신 퍼포먼스의 선처럼 보인다.

기존설교의 기장 주된 기조는 합리적 강화(rationalistic discourse)로 이것은 인간의 인격의 산맥내에서 지극히 협소한 한 단편만에 호소하게 됨

자유주의나 근본주의 공히 보다 효과적인 반응을 기대하려 할 때 전형적으로 감정주의에 호소함으로 인해 그 결과가 삶으로부터 유리되는 경우가 많다. 이 양자는 설교학적인 도케티즘을 만든다. 말씀은 여기서 육신이 되지 않는다.

19/ 강단의 황폐화 원인은 단지 합리주의와 감정주의와만 연관된 것은 아니다. 스타일과 내용이 공히 문제가 된다. 설교자들이 사용한은 방식은 전통적인 것이 대부분이고 또한 그로 인해 회중들이 길들어 있는 것이 대부분

설교에서 말씀이 육신이 되는 사건이 일어나려면 성경에 대한 새로운 접근이 필요함 설교는 보다 성경적이어야 하는데 그렇다고 성구인용을 많이 한다거나 구절 인용을 심화시킨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님. 지금까지 성경은 인간삶으로부터 소원하였으며 보고서의 각주 다루듯 사용됨. 이 형식은 성경을 마치 예증을 위한 원천 종교적 사고의 모음집정도로 취급 이 결과 성경은 일종의 교과서 혹은 서신모음집으로 설교자가 교육적인 설교를 만드는데 사용되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짐

20/ 라이스: 진정 진실한 설교는 성경을 통해 참된 인격이 표출됨을 통해 가능해짐 성경은 지구위에서 함께 살아가기를 바라는 인간들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참된 인간들을 다루는 것이다. 이런 새로운 성경에 대한 접근은 우리로 성경에 나오는 인물들에 대한 설명속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한다. 하나님의 자기 현현의 이야기는 특정한 인간의 경험에 관한 특정한 이야기속에 나타나 있다. 성서는 이야기를(The Story) 표현하는 이야기들에(stories) 대한 증언이기에 성경 해석상의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은 결정적이라 할 수 있다. 라이스는 이야기를 “복음을 위한 자연스런 연설 형태”(a natural speech-form for the gospel)로 인식 신구약을 통틀어 계시는 이야기라는 문학적인 숟간을 통해 전달되었다. 이야기는 기독교 전통을 그것이 성경적 계시의 표준이 되리만치 결정적으로 표현한다 라이스는: 스토리텔링은 기독교 계시의 내용과 형식 양자와 매우 밀접한 관계가 있다. 고로 이것이야 말로 성서를 해석하는 해석학적인 열쇠이다.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그리고 이야기안으로 들어가고 그것을 따를 수 있는 개방성과 능력이야 말로 성서를 이해하는데 있어 필수적이다. 기독교인과 기독교 공동체의 정체성은 전통에 근거하고 있는데 그 전통은 이야기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면 이 이야기가 역으로 우리와 우리 이야기를 해석한다. 출애급 성육신 등이 구원이야기의 중심인데 바로 이것들로부터 우리의 자기 이해와 정체성이 나오게 된다. 그것들은 우리의 이야기이다. “우리는 우리가 어느 다른 사람을 전통과의 만남속으로 인도해 들일 수 있다고 희망하기 전에 우리가 성서속으로 들어가야 한다”(RPC, p.25)

라이스에게 있어 이야기의 해석학적 중요성은 단지 성서에 대한 이해에 국한되지 않는다. 이야기는 우리 자신의 경험을 주석하는데 필수적이다 우리의 삶은 내러티브로서 가장 잘 이해될 수 있으며 이야기는 우리 경험을 이해하는데 접근하는 좋은 수단이 된다. “우리가 우리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에 대한 성서의 드러난 이야기속으로 들어가고 따르는 것 만큼이나 우리 자신의 경험을 말하고 또 듣는 법을 배울 필요가 있다 -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이야기뿐 아니라 인간들이나 주어진 공동체에서 나누었던 이야기들(JCB, p. 25).

신뢰할 수 있는 설교는 이야기로 가득찬 전통(story-laden tradition)과 우리 공통의 삶의 이야기 간의 만남으로 부터 재발견되어질 수 있다. 신실한 인간은 스토리텔링이 성서와 우리 자신의 체험을 해석할 때 가능하다.

라이스는 성서적 설교의 경우 설교의 스타일이 매우 중요하다고 주장한다. 설교 스타일이야 말로 그 어느 것 보다 설교자의 설교 상태를 나타내는 최고의 표식이다.

21/ 구태의연한 설교(unrenewed preaching)는 “projective-discursive style"(주관이 투사되고 추론적인 스타일) 을 보여줄 것이다. 이런 설교에서 설교자는 전통 그리고 현재의 삶의 실제 세계로부터 유리되어진다. 이 경우 강단으로부터 projection of personality은 있지만 설교자는 비인격적으로 남는다. 라이스는 ”인간성 없는 이런 인격“(personality without personhood)을 공격한다 전통과 공동체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있는 설교자가 진보해 나갈 수 있는 오직 유일한 스타일이 바로 스토리텔러로서의 설교자이다. 이러한 비인격주의(impersonalism) 스타일은 또한 설교자가 자기 자신으로부터 유리되어있음을 밝혀준다. 성경적 설교의 말씀 사건(Word -event)이 배제되어지는 것은 설교자의 스타일이 삶 그리고 그 스토리로부터 유리될 때이다. ”설교는 점점 비형식적이 되면서 순간과 찰라에 더 개방적이 된다“(JCB, p. 24) 이러한 스타일상의 진보는 구문이나 문법이상의 사안인데 왜냐하면 설교와 같은 표현행위를 위해서는 스타일이 내용보다 더 결정적인 의미를 갖기 때문이다.

스타일에 관한 이러한 질문은 단지 설교에만 국한되는 것은 아니다.

라이스는 설교의 표현 스타일과 관련되어있는 몇가지 성경적인 해석의 구분되는 특징들을 제시한다:

1. 주석(exegesis)은 주로 성경텍스트를 상상적인 방법으로 듣는 그런 방식의 하나이다(an imaginative kind of listening to the biblical text) 설교에서는 매우 재빨리 주석으로 돌게되고 설교는 다양한 의견들과 “요점들”(points)그리고 설교제목을 위해 봉사한다. 설교자는 22/ 그들 자신들이 듣기전에 말하고자 한다. 이리되면 “우리는 경험되어진 것으로부터 시작되는 형식을 가능케 하는 그런 경청을 하지 못하게 된다”(PB, p. 103)

설교에 있어 표현적인 스타일로 이끄는 경청이란 성경구절에 대해 개방된 자세와 기대하는 묵상을 포괄한다. 라이시는 이 때 본문의 형식을 깨닫는 것이야말로 필수적인 성과이어야 한다고 주장 그 형식은 이전의 주제적 설교들이 보여주던 다양한 개념적 형태득 보다 훨씬 삶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성서에 대한 이러한 주석적인 경청은 보다 상상력이 풍부한 설교형식을 가능케 한다.

2. 주석은 또한 일종의 본문을 보는 방식으로 이를 통해 설교자는 상상적으로 그 세계에 들어가게 된다. 보이는 것은 상징 이미지 이야기들로 현재의 본문에서 보게 된다. 라이스왈: “만일 우리가 본문을 경험하면 그래서 우리 자신이 그것의 이미지속으로 깊이 들어가도록 우리자신을 허용한다면 -우리의 심안으로 그 백성들과 장소들 그리고 사물들을 보도록 - 그래서 그 언어를 새롭게 경험한다면, 그로부터 나오는 설교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 상상력을 일깨울 것이고 그것에 의지할 것이다”(PB, p. 104) .설교자는 성경본문의 이야기 세계와 이미지속에서 살 필요가 있다. 성경적 상징에 대한 상상력가득한 참여는 상상력 가득한 경청과 마찬가지로 매우 결정적인 것이라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성서의 세게와 우리 세계의 연합/하나됨에 기인하기 때문이다. “이미지는 이미지를 부르고 스토리는 스토리를 부르며 삶은 삶에게 말한다”(PB, p. 104) 성서의 상징을 파악하는 능력은 설교를 위해 필수적이다.

3. 듣고 보는 것을 넘어서서 성공적인 주석을 위해서는 성경적 세게와 설교자의 현세계 사이를 오가는 움직임이 필요하다. 라이스는 이 두세계사이의 단절이 얼마나 심각한 재앙인가를 상기시킨다. “ 이 양자사이의 움직임에 대해 배우지 못한 학생은 현대적인 범주와 이유들을 성경본문에 떠맡기는 설교, 또는 주석적인 정보를 복음설교와 혼돈하는 설교를 만들어낸다.”(PB, p.105)

23/ 주석적으로 필요한 것은 나룻배가 앞뒤로 움직이는 것처럼 전통과 경험사이를 움직이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학생 혹은 설교자가 성경 연구에 익숙하다면 자기 자신과 문화의 해석에 대한 필요성이 증대될 것이다. 반대로 현재적인 문제에 깊은 관심을 가진 경우라면 성경적 해석과 연관된 것을 개발시킬 필요가 있다. 라이스에 따르면 목표는 “그때-지금”의 이분법이 아니라 이러한 상상적인 봄과 경청에 의해서만 가능한 성경적 세게와 오늘의 세계를 해석하는 것이다.

전통과 경험사이를 움직이는 설교자가 횢둥앞에 설 때 그가 말씀을 전하는 것은 스토리텔러로서이다. 성경적 그리고 현대 세계는 모두 그들의 기원과 확실성을 스토리에 갖고 있기 때문에 설교의 말씀 사건에서의 이 둘의 하나됨은 이야기를 말하는 것을 포함하게 된다.

라이스는 이것을 위해 지금까지 형식과 비인격주의(formalism and impersonalism)가 주제적 설교의 설교자를 정의하는 기준이었던 것에서 이것들을 전부 포기할 것을 주장한다. 정말 필요한 것은 단순한 스토리텔링이며 자연스러운 인간화의 구현이다. 스토리는 주석적인 진행과 표현적인 인간으로서의 설교자의 중요한 구성과 관련하여 최우선적인 설교학적인 모델이다. 스토리텔링은 전통을 해석함에 있어 필수적인 무기이다 동시에 이것은 설교자의 인간화를 위한 수단이기도 하다.

24/ 결론적으로 라이스는 : “ 내 경험으로 미루어 스토리텔링이라는 단순한 방식이상으로 인격과 설교중에 있는 회중(Person and and the sermon -in-community) 사이를 연결하는데 있어 효과적인 것은 없다”(PS, p. 194)

스토리텔링은 설교자의 역할뿐 아니라 기독교 공동체의 본질과 관련해서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설교의 목적은 신앙의 공동체와 함께 함께 나눈 이야기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함께 나눈 이야기 없이 기독교적 삶의 토대는 붕괴된다. 전통으로 부터의 유리는 같은 병리현상이다. 즉 공동체의 필수요건인 이야기 또 상호간 신뢰의 관계를 형성하는 이야기가 상실된 결과를 말하는 것이다. 반대로 성경적 전통을 회복하는데 필수적인 것은 공동체와 그들의 경험이다. 라이스: “스토리텔러로서의 설교자는 한 인격으로 그의 말음 곧 공동체로부터 나온 선물이다”(ps. p. 195). 공동체의 경험은 필수적인 것이다. 공동체의 살아있는 체험이야말로 힘이 있어서 참된 이미지 은유 그리고 이야기를 부추킨다. 통상적인 설교에서 예화는 단지 장식에 불과한 이야기이다. 우리는 공동체의 이야기에 의해 사용되어지는데 반해 이런 경우는 우리가 그것을 조장하는 것이다. 이런 오용을 고치는 것은 설교자가 그의 회중의 경험속에 함께 들어가는 것이다.

25/ 라이스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이것이다: 설교를 규정짓는 형식은 주관적-피상적 스타일로 묶인( tied to a projective/discursive style) 구획된 조직( outlined organzation)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다. 스토리텔링이라는 맥락에서 필수적인 봅 들음 그리고 움직임이라는 세 요소는 보다 상상적이면서 자유로운 형식으로 설교하는 가운데 나오는 것이다.(PS, p. 195) 이러한 설교의 형태는 이전의 어떠한 합리적 순서(rationalistic ordering, points and outlines)로부터 자유로운 반면, 그 결과는 애매한 무형식이 결코 아니다. 많은 경우 설교의 형식은 즉각적으로 성경의 형식으로부터 나온다. 예를 들어 성경이 이야기를 담고 있으면 설교자는 그 성경이야기가 취하고 있는 형식을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반대로 어려움이 주어지는 것은 회중의 경험에서 발견되어지는 이미지와 이야기들이다.

26/ 라이스는 스토리텔링기법의 설교에서 취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음과 같이 세가지로 제시하고 있다:

1. 메타포는 설명없이 메타포를 해석한다.

이 경우 현재적인 스토리-메타포는 설교로 제공되며 특별히 봉독한 성경본문의 교훈과 연결되지는 않는다. 현재적인 자료를 사용하고 그것을 중심으로 설교하되 그 의미는 성경의 의미와 일치하는 것이어야 한다.

2. 교훈과 메타포 사이의 상호작용을 따르라 이 방법에서 현재적인 상황은 성경적 증언과 연결되어지는 이슈나 이미지를 제공한다. 이 경우 성경과 현재의 이미지는 다음과 같은 방식 즉 메타포와 교훈이 서로 혼합되고 이슈는 신학적 숙고와 실제적 적용으로 혼합되게 되는 방식으로 되어짐(PB, p. 107).

27/ 3. 성경자체로부터 우선적인 메타포를 도출해 내라

흑인 교회에서 주로 볼 수 있는 방식으로 여ㅕ기서 성경은 “상상의 책”으로 허용되며 그것의 언어와 이야기는 능력과 느낌속에서 경험되어지는 것으로 받아들여짐

 

“설교의 형태는 교훈과 지시하는 메타포 그리고 필요성에 따라 변화할 것이다 왜냐하면 진정 요구되는 것은 특별한 언어 구체적인 이미지를 듣고 보는 것이다”(PB p. 108), 라이스에게 있어 목표는 통전적 설교(holistic preaching)로 이것은 설교자와 회중 그리고 기독교 공동체라는 맥락안에서 행해지는 메시지를 규합시킨다.(PTS, p. 15)

 

* 평가 *

주제설교가 윤기없는 경작지라면 스토리텔러의 출현은 비내리는 숲으로 갑자기 이동한 것 같은 것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사물은 윤기를 되찾고 성장한다.

29/ 1. 스토리텔링의 한계는 모든 본문이 스토리가 아니라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또한 스토리가 성경적 설교를 위한 유일한 매체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해야 한다.

2. 라이스가 최근 메타포 이미지 상징을 이야깅하 함께 혼합적으로 씀으로 인해 그 명확성이 사라지고 오히려 모호해지고 말았다.

3. 최근 많은 설교자들이 전통적 방식에서 스토리텔링으로 넘어오고 있는데 여기서 나오는 문제점은 두가지이다.

31/ 첫째 주제적 설교시스템안에서 이야기를 다루려는 경향성이 점증한다는 사실이다

즉 증가된 확장된 예화 혹은 도입부로 이야기를 씀 이것은 라이스에게는 경악일 것이나 지금 이야기를 예화로 쓰는 경향은 심화되고 있음

둘째 본격적인 스토리텔링을 구사하는 설교자들은 점차로 그 방식에 대한 보다 정확한 방법론에 목말라 하고 있다.

 

 

Henry Mitchell, Narrative in the Black Tradition

39/ 현재 미국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설교는 멍청하고 생기없고 엄청나게 지루함 그 자체이다. 이 설교들은 회중들의 삶으로부터 유리되어 있으며 주로 논쟁과 개념만을 다룬다. 그 기저에는 삼단논법식(syllogistic) 으사 소통모델이 자리잡고 있다. “오늘날 설교의 무기력함은 설교를 예술보다는 논쟁으로 상징보다는 삼단논법으로 여기고 있는데 연유한다”(Preaching on the Patriachs, in Biblical Preaching: An Expositor's Treasury, ed. James W. Cox(Philadelphia: WEsterminster Press, 1983), p. 37

아이디어는 설교자에 의해 일정한 순서로 정리되고 그런다음 강단으로부터 설교회중에게 전달된다. 이러한 합리적 이성적 형식은 가장 주도적인 것으로 미첼은 이것을 “백인의 설교”(White Preaching)이라고 명명한다.

이것은 주로 백인 교회에서 행해지는 방식이자 그들의 신학교에서 가르치는 방식이다. 하지만 흑인교회에서도 마찬가지로 발생한다. 이것은 소수의 엘리트가 주도하여 다수의 미국 교회에게 학적으로 각인시킴

이 방식의 문제점은 성경적 신앙과 아울러 인간 본성의 진행에 관해 전혀 오해하고 있다는 점이다.

40/ 설교자들은 오랜 기간 동안 설교를 사람들과의 이성적인 사안(a matter of Reasoning with people)/ 이성적 의식(rational consciousness)은 그러나 인간성 가운데 철저한 신앙을 위한 가장 최소한의 측면에 불과할 뿐이다. 그러한 이성적인 호소를 통해 정보는 제공되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신앙은 인식과는 다른 것이다. 신앙은 전 인간과 그의 모든 것 일체를 다 포괄한다. 인간의 인간성이란 이성적인 의식 이상의 것이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감정의 존재이다 따라서 어느 주어진 순간에 직관적인 능력은 훨씬 멀리 나아간다. 이 직관적이고 감정적인 측면은 덜이성적이지만 그러나 이성적인 것과 동등한 가치를 가진다. 만일 설교가 전인간에 대한 호소라면 설교는 의식과 동시에 무의식에 호소해야 하며 이성뿐 아니라 감정과 직관에 호소해야 한다. 미첼: 이성은 전달과 이해에 있어 매우 중요한 기능을 한다. 첫째 이것은 문지기(gatekeeper)의 기능을 한다 우리의 경험을 통해 받는 불합리한 것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둘째 이성은 신앙의 언어 조직신학의 언어 그리고 교회의 신조를 준비한다. 셋째 신앙의 체험과 관련해 이성은 조합하는 기능을 감당한다

합리성이 할 수 없는 것을 신앙이 일깨우고 준비한다. 신앙은 직관적인 영역에서 발생한다. 그리고 신앙이 가장 효과적일 때에는 그것이 직관적인 것과 연관 된 때이다. 신앙의 이러한 직관적인 궤적이 주어지게 되면 합리성은 그 자체로는 사람들을 신앙으로 움직이게 할 수 없다. 감정은 모든 결심의 차원에 포함되어 있다. 특히 종교적인 결정의 순간에 내포되어 있다. 그래서 설교는 인간의 이 모든 차원들을 내포할 수밖에 없다. 설교는 내용뿐 아니라 경험 그리고 인간들의 간절한 요구와 바램과 연관되어야 한다.

41/ 하지만 인간의 경험세계는 소위 무의식의 차원이 있다. 이 의식의 전달은 일차적으로 말로하는 전달(oral communication)을 통해 가능하며 문화의 종교적 상징과 가치가 통용되는 그 안에서 하나의 매개를 구성한다. 이러한 스타일의 설교 즉 인간의 모든 측면을 포괄하며 초의식적 종교적 심벌의 힘을 사용하는 이 설교는 흑인 내러티브 설교에서 가장 극명하게 표현되어진다.

이러한 말로하는 전통의 원전은 신구약 성경이다. 이 경전은 처음 말로 이어져 왔으며 따라서 설교의 과제는 성경들로 그들의 스토리로서의 본래 성격을 복원시켜주는 것이다. 흑인 교회에 있어 성경은 이야기이다. 이때 인간의 경험의 깊이는 이것을 다시 이야기함에 있어 최고의 수단이다. 신앙은 내러티브 설교에 의해 심원한 성경의 차원을 가장 잘 일깨울 수 있다.

42/ 미첼은 내러티브 설교의 능력을 이야기하기 위해 구약 족장 이야기를 제시한다: 왜 하나님이 성경전승의 중심에 사가와 민간설화(folk tale)를 사용하셨는가? 그 대답은: 설화가 얼마나 의식에 영향을 미치는가에 놓여 있다. 설화들은 이성적인 의식에 직접적 혹은 우선적인 어필을 하지 않는다. 사가는 괴변적인 논쟁으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을 성취한다. 이것은 전 인격에 인상을 지우며 신앙이 깃드는 의식의 직관적인 영역에 특히 인상지운다. 고로 족장 이야기의 신비한 능력은 하나의 설화로서 진리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제공한다. 미첼은 사가의 심리적인 힘이 회중들을 진리의 깊은 다양한 경험의 세계로 초청한다고 주장.

성경 이야기가 설교에서 다시 이야기되어질 때, 심원한 다양한 경험을 내포하고 있는 이것은 회중들에게 유용하게 된다. 그리고 그 체험은 그들의 개인적 그리고 집단적인 실존의 차원에 인상을 지운다.

43/ 성경이야기는 인격에 대한 세심한 묘사 주관적인 응답의 묘사 그리고 무엇보다 의미있는 대화를 통해 그 능력을 얻게 된다. 내러티브 설교는 성경 이야기의 이런 요소들을 “목격자적 증언”을 제공하는데 사용된다. 흑인의 성경은 이야기이다. 인간 실존과 연관된 가장 중요한 진리는 객관적이고 합리적 전제에 의해 묘사되지 않았다. 오히려 그것들은 전 인간에게 말하는 능력을 갖고 있으며 이해의 직관적인 차원과 행동화의 접근을 제공하는 내러티브에 실려있다. 그러나 이러한 성경 이야기는 오직 그것이 이야기로서 다시 이야기되고 목격자의 전망에서 효과적으로 다시 이야기될 때 전달될 수 있다.

44/ 흑인 설교자에게 닥친 가장 큰 과제는 성경 이야기를 의미깊게 이야기하는 기술을 익히는 것이다.

설교는 예술(art)이다. 그런 한에서 내러티브 예술가의 기술에 종속되어 있다. 고로 효과적인 설교를 위한 전제는 설교자가 먼저 성경이야기를 다양하게 경험해야 한다. 이런 점에서 인간의 경험이 중요하게 부각된다.

45/ 설교자는 먼저 자신ㄷ과 공동체의 이야기를 알아야 하며 어떻게 하면 이것을 성경 이야기와 연결시킬 것인가를 생각해야한다.

46/ 상세함 묘사만이 회중들을 민담의 이야기흐름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다. 만일 상황설정이나 인물 묘사의 상세함없이는 목격자가 될 수 없다. 설교안에서의 그러한 상세한 묘사야 말로 옛세계와 오늘의 세계의 공통점을 제공해 주게 되고 그것에 의해 회중들은 성경세계속으로 건너가게 되는 것이다. 성경이야기는 오늘 여기서 그것이 다양하게 경험되기 위해서는 창조적인 정성을 필요로 한다 직접적일 것 그리고 생생할 것이야말로 생생한 목격적 증언을 위해 필요한 것이다. 설교자는 이야기가 오늘 전달될 수 있도록 이야기를 재구성하거나 정성들여 이야기해야 하는 책무가 주어져 있다.

미첼은 생생한 묘사와 함께 적절한 타이밍을 주장한다. 성경의 사가에는 긴장이 있고 놀라움이 있는데 이것들이 반드시 조심스럽게 그리고 인내로서 재건되어야 한다. 이 타이밍이야말로 좋은 스토리텔링을 위해 필수적인 것이다. 이것은 성경 메시지를 경험시키는데 있어(요점전달이 아닌) 중요한 것이다. Gardner C. Taylor의 감정은 시간이 걸린다(Emotions take time)처럼 미첼은 설교는 단지 들려지는게 아니라 풀어주고 편안하게 하는 것(to be relieved, not merely heard). 고로 타이밍과 클라이맥스가 분명해야 함 너무 조급한 절정이라든지 너무 미적대는 것 역시 부적절 설교는 회중을 수많은 계곡과 골짜기를 따라 움직여가야 하는 반면 마침내 여행이 끝날 것이라는 기대는 언제나 현재적인 것이 되도록 해야 함 여기서 생동감있는 상세한 묘사는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

50/ 이하에 나오는 것은 수사학적 스타일로 흑인 설교의 한 원인을 제공하는 것들임

1. Intonation- 그들은 chant-like musical tone을 사용(영창조의 억양)

2. Black-english- 일반 영어보다 느리고 단순한 문장구조 모음을 늘여서 말하는 것ㄱ등과 연관되어 있음

3. Repetition and Rhythm- 반복은 흑인 교회에서 대화와 그 상황을 푸근하게 하는 기능 또 그리한 것들은 설교후에도 회중들에게 잔영으로 남게 됨

4. Rhetorical language -

52/ 학식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참된 의사소통을 목표로 한다면 하나의 좋은 아이디어야 말로 만족스런 성취가 될 것이다(RP, p.43) 그러나만일 당신이 가진 아이디어가 이야기나 그림으로 옮길 수 없는 것이라면 그것을 사용하지 말아라(p. 45)

평가:

 

 

Eugene Lowry, Narrative and the Sermonic Plot

64/ 로우리가 파악하는 설교의 문제점: 설교가 자기 이해에 있어 너무 공간적인 패러다임(spatial paradigm)에 둘러붙어 있다는 사실 이런 구조속에서 아이디어나 명제적인 진리가 설교전체의 내용이 된다. 전통적으로 설교는 3대지와 하나의 시(three points and a poem)로 가리킴으로 관념화된 성분들의 논리적인 토대위에 설교를 구조화하기를 강조함(The Homiletical Plot: The Sermon as Narrative Art Form(Atlanta: John Knox Press, 1980), p. 12. 설교를 하나의 “일(Thing)"로 이해하는 한에서 설교자의 전통적인 임무는 설교의 개념적인 공간을 구성하는 것이 되었다.

이러한 구조는 건축의 이미지를 다루는 것과 같다 로우리는 자신이 지금껏 설교건축의 기게학(Engineering science of sermon construction)을 가르쳤다고 진술(13)/ 지금까지 나온 설교학의 영향력있는 책들은 이런 류의 것들이 대부분: E. Sangster, The Craft of Sermon Construction; J. Randall Nichol, Building the Word/ 이러한 기존의 설교이해는 설교자들로 설교를 “설교구성”(Sermon-building)으로 생각게 하고 이것은 아이디어의 분류들을 하나로 맞추는 것으로 이해

spatial model로서의 설교 특징: static rationalistic, discursive/이것들의 중심문제는 전체의 구성이 조립으로서 하나의 설교만듬의 이미지로 태어난다는 것이며 이 조립은 으미깊게 연관된 조각들로서의 실재에 대한 우리의 무의식적인 이해에 바탕하고 있는 것이다.(10)

65/ 설교학의 코페르니쿠스적인 혁명은 이러한 모델을 포기하고 성경적 증언에 충실한 것으로 대치하는 것이다. 이 새로운 접근은 그 방법이 하나님이 자기 언약백성을 다루시는 이야기로부터 힘과 방법을 취득하게 된다(5). 이 방법은 공간보다는 시간과 연관맺고 있다. 로우리는 설교가 event in time으로 규정한다. 내러티브 양식은 그 형태상 책보다는 극이나 소설에 더 가깝다. (6) 이말은 설교가 움직임과 방향 즉 회중과의 여행을 포함한다는 말이며 이 여행은 성경적인 이야기로부터 취해오는 것이다. 공간이라는 전통적모델로부터 시간이라는 모델로의 ‘회심’은 몇가지 비교를 통한 세심한 조사를 필요로 한다.

 

로우리는 최근의 저서에서 이것을 제시함:(Doing Time in the Pulpit: The Relationship Between Narrative and Preaching(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pp. 14-26.

1. The Task : To Organaze or to shape

전통적 설교의 정적이고 공간적인 이미지는 아이디어의 정체를 밝히고 그것을 조직화하는 설교준비를 요청한다. 그러나 이 두 작업 사이에는 긴장이 있는데 그것은 불연속적인(discrete) 일련의 명제들은 서로 하나가 되거나 응집될 수 없기 때문이다. 개념적인 설교가 지닌 문제점을 로우리는 두가지로 들고 있는데 첫째, 명제적으로 언급된 아이디어의 정적인 질(Quality)은 어떠한 설교적 움직임도 달성하기 어렵게 만든다. 명제가 언급되면 이것은 끝난 것이다. 마감은 이미 발생한 것이고 그것을 다시 움직임으로 돌리려면 엄청난 어려움을 각오해야 한다(15) 이런 마감은 명제적 모델설교에 붙어 있으며 이것이 그 목표이기도 하다.그 결과 회중들은 산만하게 되고 흥미를 잃게 된다.

66/ 두 번째 문제는 설교를 준비하는데 정보를 제공하는 콘트롤의 규정에 관한 신학적인 숙고와 연관된 것이다. 아이디어를 설교로 조직하는 것은 성경자료에 대한 컨트롤을 내포한다. “ 배열된 아이디어의 이미지는 지식을 결과적으로 전달한다.(15) 반대로 이 방법은 성경이 아닌 설교자와 사람들이 생각해 내야 할 필요가 있는 것(Figuring out)과 같은 케이스라 할 수 있다. 고로 이 방법에서는 아이디어를 수집하기 보다는 성서에 귀를 기울이고 경험을 만들어가는 것이 요구됨 그러나 그러한 만듦이 가능해 지려면 설교자는 생각보다는 움직임(Movement)에 보다 유의하여야 한다.(16)

 

2. The Form : A Structure or a Process

아이디어를 조직화하는 경우 불가분 구조적인 설교 형식(structual sermonic form)으로 인도될 수밖에 없다. 반면 경험을 배열하는 사람 그래서 그 임무가 shape 하는 사람은 그들의 설교형식이 process가 될 것이다. 설교의 문법 역시 구성(structure) 혹은 진행(process)으로 구분됨 전자는 대지를 구성하게 됨(그것들의 명제적인 포맷으로 인해 정체를 만들어 내는 대지를 구성하게 됨) 후자는 설교안에 있는 보다 중요한 요점들이나 사건들이 움직임과 변화를 실어나름. 설교구성이 선언적인 언명에 의해 표기되는 반면 로우리는 주장하기를 “설교 진행이 때로 질문에 의해 펴기될 것이다”(17) 설교가 구조로 보이는 설교에서는 요점들(points) 혹은 명제들은 원리상 상호 교환해 쓸 수 있는 단어들이다. 그러나 진행으로 설교가 비치는 설교에서는 그것들의 일련을 재조정하는 것은 그것의 의미와 의도를 과격하게 고치거나 없애는 것이 될 것이다.

3. The focus : Theme or Event

67/ 아이디어를 공간적 구조로 조합하는 것은 필연적으로 한 주제로 초점을 맞추는 위험을 초래한다. 여기서 설교자는 “연결시키는 개념적인 선”(a unifying ideational thread)을 발견하라는 요구에 직면하게 된다. 반대로 과정속으로 배열된 경험은 그것의 순환가운데 있는 사건들에 그 초점을 맞춘다.

4. “The Principle: Substance or Resolution"

공간적 모델에서는 본질의 원리와 연결되어 있다 반대로 경험을 배열하는 경우는 해결(Resolution)에 가깝다.

5. The Product: An Outline or a Plot

공간적 설교는 유서깊은 아우트라인을 형식으로 갖게 됨. 이것은 설교가 나타내려는 설교이미지를 전달하는데 장점이 있다(23) 경험진술형식의 경우는 그 결과는 불만족 스럽다 여기에는 내용과 형식이 서로 잘 맞지않는다. 아우트라인이 왜 경험을 배열함에 있어 적합하지않은고 하니 내러티브안에서 사건들을 배열하는 것이 플롯의 기능이기 때문이다.

68/ 6. The Means : Logic and Clarity or Ambiguity and Suspense

outline의 목적은 놀리적인 것과 명료성이다. 이것은 아이디어를 조립하는 조직적인 수단이다. 놀리성과 명료성이 설교의 기준이라고 말하는 것은 개념적 맥락에서이다.여기에서는 중심적인 문제가 되는 것은 인식적인 일관성(Coherence)의 문제이다.

반대로 Plot은 그것의 수단으로 불명료성과 놀람이며 일관성이 문제가 아니라 상응성(correspondence)/ 공포가 설교의 플롯안에서 지속되는가에 대한 질문은 단절에 바탕을 둔 불합리성이 설교자가 복음으로 문제를 풀때까지 성공적으로 유지되고 있는가하는 테스트에 달려있다(24)

“때로 이우트라인에 좋은 것이 플롯을 위해서는 나쁠 수 있다. 그 반대도 가능하다. 예를 들어 한 아우트 라인에서 목적이 분명한 것이 중요하게 취급되며 도입부에서 어떤 형태로든 고지되어야 한다 그러나 당신이 유지하려는 것이 모호성이라면 당신은 사람들이 그것을 알아차리게 하고 싶지않을 것이다.”(24)

 

7. The Goal: Understanding or Happening

 

 

Fred Craddock, The Inductive Method in Preaching

95/ 크래독에 따르면 설교의 천벌(Nemesis of Preaching)은 이미 수세기를 거쳐 사용되어왔고 그 기원을 아리스토텔레스에게 두고 있는 연역적 방법론이다. 이 방법은 일반적인 진리로부터 출발해서 그 목표는 특수한 적용으로 나아가는 것: “간단히 말하면 연역법은 일반적 진리로부터 출발해서 특수한 상황이나 경험으로 나아가는 것이다”(As One without Authority(Nashville: Abingdon Press, 1979), p. 54)

이 방법은 설교사에서 오랜동안 설교의 구성과 그 주석적 토대에 있어 표준적인 방법으로 자리잡아 왔다. 구조적인 면에서 지속적으로 주목할만한 형태들이 발견되어왔는데 주제가 이야기되고 난 뒤 요점들로(Points) 분류되어진다. 이 소주제들은(subthesis) 확충되고 예증되고 마침내는 어느 특정한 삶의 상황으로 적용되어진다. 이러한 접근은 매우 직접적으로 친숙하고 전통적인 설교의 주류를 이룬다(54)

이 방식에서의 성서사용법은: 설교주제나 토픽이 성경으로부터 나올 수도 있고 그렇지않을 수도 있다.성경적 보증과 권위는 이 방법에 있어서는 필수적이지 않다. 성경은 통상 예증적 자료의 하나로 사용될 수 있으며 또는 주도적인 이미지나 기본 어휘로 사용될 수 있다(Preaching(Nashville: Abingdon Press, 1985), p. 1000.

96/ 하지만 이 방법은 성경 사용을 잘못하는 경우가 많다. 주된 방법은 주제의 잔여분을 드러내는데 성경이 사용된다는 것이다(Revealing a thematic residue) 또는 예증으로서 성구가 이미 드러나 있는 것에 대해 장식품으로 사용한다. 크래독은 이런 사용이 성경을 경청하게 하기 보다는 기만을 제공한다고 주장한다(100). 이밖에 두가지 문제가 더있다고 크래독은 주장: 1. 설교의 주제가 상세히 설명되고 그리고 나중에야 특수한 상황과 연결되어진다는 것이다. 이러한 접근은 가장 자연스럽지못한 의사소통 방식이며 회중을 일방적인 수동적인 경청자로 즉 연설자가 회중 자신들의 삶과 신앙에 적용하는 결론을 말할 수 있도록 하는 권위와 권리를 가지고 잇음을 그들이 받아들이는 수동적인 경청자를 전제한다.(IMP 54)

고로 이 방법은 하나님 말씀의 권위적 연설과 수동적 수용이라는 생각이 든다(54) 이런 상태에서는 진정한 대화도 민주주의도 상실되기 마련이다. 여기서는 연설자가 듣는 법이 없으며 회중이 (연설을 만들어 가는데) 공헌하는 바도 없다. 따라서 보다 덜권위적인 방법이 이를 대치하여야 한다.

2. 두 번째로 연역적 방법이 갖는 문제는 구성과 진행과 관련된 문제이다. 주제가 몇 개의 포인트로 분류되어 진행됨에 따라 설교진행과 관련되어 극복하기 힘든 문제가가 구성상에 나타난다. 전통적인 3대지 설교의 회중들은 빈빈하게 3개의 소설교를 경험하게 되는데 그것은 한 대지에서 그 다음대지로의 전환이 성공적이지 못하고 또하나의 설교를 듣는 것과 같게 되기 때문이다:

97/ “각 대지마다에는 각기 나름대로의 흐름이 있으며 또 각 대지들 사이에는 나름대로의 유사점이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설교 처음부터 끝날때까지 하나의 일관된 움직임은 없다.(IMP 56). 개념적으로 동등한 각 대지들은 설교의 흐름과 통일성을 이끌어 낼 수 없다. 그러한 의사소통을 시도하는 것이 오늘날 교회에서 자연스럽지않은 것으로 그리고 공동체라는 의미에서의 폭력으로 경험되고 있다(56)

오늘날 전통적 설교의 위기라는 것은 방법론적 경향성과 설교와 교회 그리고 문화사이의 관게가 악화됨에 기인한다. 특히 주목할 것은 언어에 있어서의 위기가 말씀의 능력 상실이라는 것으로 경험되어 왔다는 것이다. 파괴하거나 창조하거나 묶거나 풀거나 축복하거나 저주하거나 등의 효력을 미치는 말씀의 능력을 상실해 왔다.(IMP 5). 설교하고자 하는 자는 왜 이렇게 말씀의 능력이 상실되었는지를 알아야 한다. 크래독은 이와 관련해 몇가지 요인들을 제시한다: 첫째 오늘날 사람들은 미디어를 통해 하루에도 수없이 많은 언어의 공습을 받으며 살고 있다. “눈과 귀가 쉴 틈이 없다. 모든 오랜 동안 침묵하던 유령들이(haunts) 빌보드에 할키고 공공주소 시스템에 의해 침입당하고 있다”( 6-7)

침묵이 없으면 말씀의 능력은 사회와 교회적 맥락 모두에서 부패한다 성경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의 말씀은 침묵속에서 태어난다 침묵이 상실되면 인간의 말들과 하나님 말씀이 그 유효성을 상실한다.

두 번째 위기를 크래독은 교회언어의 유효성의 상실에서 찾는다. 교회의 언어는 질병에 가장 민감한 언어가 되고 있다. 교회 언어는 너무 오래되고 더 이상 작동하지 못하는 언어 즉 한 때는 유효했으나 이제 더 이상 신앙을 전달하지 못하는 언어를 벗어버리지 못하는데 있다.

98/ 우리 전체의 문화는 진리와 의미의 과학적 구조에 의해 강력하게 영향받았다. 말씀은 사인으로 확증될 수 있는 정보를 지적해 주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교회 언어는 황폐화시키는 지나친 토론주의(sterilizing reductionism)에 으해 지배당함으로 환가시키고 실행시키는 능력을 상실했다. 신화와 메타포는 회의에 빠지게 되었고 신이라는 용어 조차도 문제점 투성이인 것이 되었다.

세 번째로 말씀의 능력에 손상을 끼치는 것은 텔레비젼과 그것에 익숙해진 세계의 진보이다. 설교가 구두전달의 전통적 라닝에 서있고 그 근거를 성서에 두고 있지만 현대 문화는 들음을 넘어서서 보는 것을 선호한다. 인간의 수용성이 더 이상 청각에 의하지 않고 오히려 보는 것과 객관성에 기초한다면 설교과제의 어려움은 극명해 진다.(IMP 9). 활자 문화의 진보와 함께 구두커뮤니-는 활자세게의 보조로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활자에 의해 공간에 고정된 말씀은 이 말씀의 의미역시 고정된 것이라는 아이디어를 만들어 내게 된다. 그 결과 쓰여진 말씀은 말해진 것보다 더 권위를 갖게 된다”(10). 오늘날 활자로부터 보는 것으로의 최근의 변화는 오랄커뮤니-로 부터 두 번째의 사회적 의식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크래독은 이런 변화야 말로 하나의 희망이라고 본다. 즉 이런 변화에 기반해 설교의 갱신 역시 구두적 연설에 있어서의 언어의 능력에 대한 갱신된 접근에 으해 지원되어질 수 있다.

]99/ 언어위기의 차원이외에도 다른 문화적 요인 역시 설교의 위기 혀결에 도움이 될 수 있다. 정적 양식안에서 본질로서 실재를 보는 전통적인 구도는 존재와 시간을 강조하는 철학적인 위치를 열어놨다. 형이상학은 존재론과 역사성에 의해 대치되었다. 지금까지의 정렬되고 무변화의 질은 지나갔고 급격한 변화와 분열을 나타내는 기술에 의해(Art)대치되었다. 건축적으로도 교회는 더 이상 과거의 교회가 아니다. 예배공간으로 볼 때 3대지 설교를 담아내었던 정적이고 무변화의 진실은 지나가 버렸다. 그러한 설교의 회중은 급격하고 불일치의 변화에 사로잡혀서 그것을 삶에 있어 그릇된 조화의 부과로 받아들이고 있다.

크래독: 이런 문화의 흔들림에도 불구하고 몇몇을 제외하면 웅리 설교는 기존의 틀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13) 설교는 사람들이 살고 있는 세게와는 전혀 다른 것을 반영하고 있다. 여전히 연역적 설교의 전통은 유지되고 있다. 설교는 이전까지의 설교의 기준들 가령 대지, 아우트라인, 예화등을 따르고 있든지 아니면 주관적 생각과 느낌을 전달하는 것이 되고 있다. 많은 설교자들이 이 경우 딜렘마에 빠지기 마련이다. 즉 자신이 대화의 세게에서 Monologue를 지속해야 하는가의(16)

100/ 설교의 또다른 희망의 표지는 크래독은 이것을 언어분석에서 찾는다. 즉 언어분석은 상징 신화 은유를 사용하는 종교언어에 관한 문제와 관련하여 긍정적인 의미를 갖는다고 본다. 원시주의에 대한 관심은 진리를 구현하거나 표현하는데 있어서 언어나 말함이 갖는 우월성을 수용하는데로 인도한다(34). 그는 하이데거의 연구를 인용해: 언어는 인간 실존에 우선하며 그것을 일으키게 한다. 이 관점에서 보면 언어는 인간 실존의 구성요인이고 그것을 위해 필수적이다 인간은 대화이다(A person is a conversation).(37). 설교는 그 본질상 구연전통에서 배태되었고 말씀을 말하고 듣는 직접성으로 전환시킴에 의해 사건이 되기 때문에 설교언어의 실행하는 힘은(Performative power) 이제 다시 재확증할 수 있다. “설교는 그 본질상 그 근원을 본문(Textuality)이 아닌 구연(orality)에 갖는 청각적 사건(an acoustical event)이다(preaching 31).

101/ 쓰여진 말씀은 주어지고 고정되고 정사할 수 있다 구연된 말씀은 회중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말해진 말씀은 오직 지금 회중에게 주어질 뿐이다. 고로 소리는 항상 현재이고 항상 실존적인 경험이다(IMP 29). 설교와 같이 반복되지 않는 상황의 말해진 언어는 열려있고 다가(多價)이고, 자발성을 갖는다. 이것은 미래에 이루어진다는 의미도 갖는다. “구연된 말씀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목표를 향해 인도한다”(29). 구연말씀의 장점 가운데 하나는 하나님의 게시적 행동의 협동적 차원이 밝혀진다는 것이다. 고립속에서 일어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구연된 말씀은 사인이자 동시에 삶의 원인이다. 이것은 공동체를 만들어 내는 것이 그 말씀이라는 것을 전제한다(IMP 43).

설교갱신의 청신호 가운데 하나는 성경연구와 선포사이의 관계이다. 크래독은 이 두영역은 최근까지 유래가 없었던 이 두 영역간의 상호의존성과 상호협력의 재발견되는 것이라고 본다. 그러나 현재 설교는 성서연구에 “연구의 이유와 동기”를 제공하고 성경연구는 설교로 하여금 자의성과 낭만주의에 빠지지않도록 지켜준다. 이 둘은 불가분리의 관계이다. 설교의 임무를 분명히 하고자 한다면 당연히 성서연구를 필요로 한다. 성서학의 중요한 인식중 하나는 초대교회에서의 성경과 설교의 관계를 밝혀내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이 둘의 관계를 부정적으로 다루기도 했다.

102/ 그 결과 성서학은 설교자를 과거로 몰고가고 그 반면 설교자는 항상 실제적 현재적인 것에 관심 가지며 복음은 항상 앞을 향해 나아간다는 대립적인 결과이다.

설교를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현대의 강단과 고대의 본문사이의 간격, 즉 역사 비평적 방법에 의해 우리에게 알려진 이 간격은 그리 놀랄 일도 아니고 무시할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다.("The sermon and the Uses of Scripture", Theology Today 42, no. I (April 1985), p. 8) 부분적으로 지난 30년간 수사학적 그리고 문헌 비평적 측면에서의 다양한 연구가 이루어져 왔다(Amos Wilder, Robert Funk, Ernst Fuchs -이런 연구를 통해 복음과 전달현ㅇ식의 불가분리의 관계성에 대한 인식이 공고해 짐) 그런 연구를 통해 성서에는 내러티브 Saying, hymns, 서간등이 들어있음을 알게 되었다. 설교의 형식이 무엇이든 그 설교의 형태는 전하려는 본문의 형식과 가까운 것이어야 한다(IMP 45).

103/ 성경에 하나의 고정적인 형식이 없는 것처럼 성경적 설교 역시 하나의 고정적인 형식을 전체의 본문에 강요하는 일은 없어야 한다,. 특히 헬라의 수사학으로부터 유래한 전통적인 대지법을 강요하는 것 말이다.

또하나 설교갱신과 관련해 주목할 것은 해석학적인 접근이다. 성경은 과거만 갖고 있는게 아니라 미래도 갖고 있다. 크래독은 성경이 가진 이 미래성은 다음과 같은 성경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한다고 본다: 1. 성경이란 교회의 삶에 있어 표준이다. 고의든 실수든 설교를 그 표준으로부터 절단시키는 것은 교회를 교회의 양육과 교육을 위한 그것의 본래적인 원천으로 단절시키는 것이다. 성서에 의해 정보가 주어지지않고 영감되지 않은 설교는 부모를 떠난 고아이다. 2. 성경이란 교회의 삶과 신앙을 파수함에 있어 자기를 분석하고 자기를 지키는 휘슬과 같은 것이다. 3. 성경은 지속적으로 강단을 환원시키고 설교의 본질과 방법을 제공한다(설교 27)

104/ 만일 이런 기대가 충족되기 위해서는 연역적 방법으로는 안된다. 크래독은 설교자와 본문사이의 간격을 없앰에 있어 실존주의나 낙관주의를 배격한다: 이 본문의 메시지가 무엇인가?라는 것은 성서가 가진 다차원의 성격을 부인하는 것이다(surplus meaning). 이 본문은 저자의 의도를 넘어서는 다차원의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설교 115). 어떤 하나의 해석이 해석이나 설교를 위한 보이지 않는 의미들을 고갈시킬 수 없다. 이런 다차원의 의미를 예상하는 것은 설교자가 성경과 현대 세계사이의 간격을 해소하는 최초의 한 원리이다.

성서연구와 설교에 있어 임무는 서로 교차되어진다: 성서연구에 있어 역사적인 교훈들은 본문을 특정한 어떤 사건의 결과(result)로 보게 하며 반면 설교자는 본문을 원인자(cause) 즉 사건과 상응의 발생자로 본다(설교 113).

105/ 크래독은 본문과 설교자를 연결시킬 수 있는 다섯 가지 요인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오늘날의 회중과 성경 본문의 오리지날 회중의 차이를 연결시키는 것은 우리의 공통적인 인간성이다(our commen humanity)(설교 134).

2. 본문을 해석하는 교회와 전통의 연속성이다(135)

3. 교회 내에 학자들이 존재한다는 것으로 그들은 본문을 교회가 물려받은 그대로 보존하며 교회가 그것을 이해하는데 도움을 준다.(135) 교회는 성경이해와 살아있는 연구를 임무를 위한 학문을 필요로 한다.

4. 성령이 교회에 존재한다는 점이다(135) 성령은 교회가 진리속에 존재하도록 주어졌다.

106/ 5. 살아있는 해석을 위해 도움이 되는 또다른 요소는 성경 그 자체이다 (136). 해석자가 본문에게 단지 질문만 하는게 아니다. 성경이 해석자에게 질문을 던진다. 우리의 자기 이해는 우리가 성경의 다양한 의미와 직면할 때 변화한다.

크래독이 말하는 해석의 삼 단계:

1. 본문에 대해 홀로 민감하게 누구의 도움도받지 말고 성서의 말씀을 들으라! 이 때에는 본문과 관련된 주석도 보지말라. 본문을 읽어라 여러번에 걸쳐서 그리고 설교자는 즉각적으로 아이디어와 질문 느낌등으로 응답하라.("Occasion-Text-Sermon", Interpretation 35, no. I(January 1981), p. 63).

이런 읽기는 순박함을 기본으로 하고 응답으로 나오는 사고나 느낌은 가능한 즉각적인 것일어야 한다. 이 첫 번째 기록된 것이 설교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설교 106). 이것이야 말로 모든 다른 연구의 기초가 된다.

107/ 2. 주석이나 다른 자료를 참조하라. 너무 일찍 주석에 손대면 본문의 통일성을 깨뜨리기 쉽다. 너무 늦으면 이런 자료들은 제 기능을 못하고 별첨의 자료처럼 되어버린다. 너무 이르면 해석자의 주인이 되어버리고 너무 늦으면 받아들일 수 없는 부속적 가치로 전락한다. 적당한 시기라야 주석은 해석자의 동료가 된다. 이 단계에서는 첫 단계에서 제기된 질문에 대한 답을 시도할 수 있으며 첫 번째 회중들이 본문을 어떻게 딛고 이해했는가를 도움받을 수 있다.

108/ 3. 다시 한번 본문을 읽어라 주의깊게 있으며 첫 번 읽을 때 적었던 노트를 다시 보도록 하라. 추릴 것과 버릴 것을 확정하라

 

* 본문에 대한 분석과 관련하여 주의해 보아야 할 요소들*

1. Position in the Text

설교자는 내러티브에서 어디에 위치하는가? 그의 자리와 역할은 어디인가?

2. Discerning the Theme

109/ 주입식(해야한다)는 설교에서 탈피되어야 하며 그 대신 주제와 연결시켜야 한다. 성경의 의미를 한 문장안에 표현하는 것이야 말로 매우 중요하다. (설교 122)

3. Discerning the action

본문은 무엇을 말할 뿐 아니라 무엇을 한다 말과 더불어 행동은 인간의 의사소통을 구성하고 완성시키는 요인이다. 증명 용기북돋음 불신 올바름 등은 바로 이런 행동을 드러냄 동시에 본문의 Context에 대한 지식 역시 매우 중요

110/ 설교자는 본문을 해석할 뿐 아니라 회중을 해석해야 한다.

113/ 회중들이 성경 이야기를 신뢰하기 원하지만 인식은 충분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그 이야기가 재론되어질 때 뿐이다. 동시에 설교자가 열광과 흠이를 전달할 때이다. 이미 알고 있는 이야기라도 설교자가 확신과 열정을 가지고 그것을 친숙하게 할 때 비로소 그것은 인지되어진다.(설교 162)

115/ 귀납적 방법

크래독은 이것이 가진 장점에 대해 다음과 같은 확신피력: 주일 예배에 참석한 회중은 설교자를 강단에 올려놓은 것과 같은 그런 동일한 귀납적인 여행으로 허용되어야 하고 그 결론에 도달할 자유가 주어져야 한다(IMP 57). 그런 여행은 설교에서 가능하며 또 거기서는 굳이 결론을 필요로 하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회중이 설교자와 여행하게 되면 그로부터 나오는 결론은 그들의 결론 .동시에 그들의 상황이 분명해 지고 개인적으로 피할 수 없는 것이 됨(57)

116/ 귀납적 설교란 - 1. 귀납적 설교는 특정한 경험에 주목한다-기존의 흥미를 돋우려는 의도의 서론에 어떤 이야기 집중시키는 것이 아니라 설교 전체에 집중시킴(IMP 61). 오직 그러한 한 경험에 초지일관 관심을 집중시킴으로서만이 회중은 설교자의 메시지를 파악할 수 있으며 그 여행을 통해 목적지로 나아갈 수 있다 2. 이 설교는 회중을 존중한다. 즉 회중이 보이는 설교 움직임에 의해 존중받게 되는데 회중이 설교의 움직임에 동참하고 그들이 내리는 결론은 결국 설교자가 아닌 그들 의 결론이라는 것이다.(62). 이런 면에서 이 방법은 온 회중의 만인 제사장직을 인정하는데 그것은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말씀과 관련한 그들의 결론에 그들을 초청함으로 가능해 진다.

1. Movement - 이 방법에서는 구조가 움직임에게 종속된다. 회중이 구조를 알지 못할 정도로 말이다. 이 방법은 주장하기를 지속적으로 사여용되온 형식이나 아우트라인은 회중의 현재적 경험으로부터 설교가 회중들에게 그들의 결정과 결론으로 남겨놓는 요점으로 움직인다(IMP 146).

117/ 처음시작하는 요점은 도입부는 아니며 결론이다. 완성된 설교는 도약대로 부터(회중의 사고와 느낌을 신중하게 다루는) 결론으로의(그 회중의 상황이 예수의 빛아래에서 보여지게되는) 여행이 될 것이다. 메시지는 설교의 마지막이 될 것이며 설교자와 회중이 동시에 도달하게 된다. 회중의 기대를 지속시키는 것이 중요한데 크래독은 이와관련해 다음 세가지를 말한다: 1. 구두성격 즉 스피치의 성격이 흥미와 움직임을 좌우함 설교의 수사학은 이 점에서 매우 중요함 2. 설교자는 준비과정에서 원고를 지속적으로 읽으며 이것이 질문을 야기하고 기대를 끝까지 가지게 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3. 그러므로 이밖에도 등과 같은 변이용어들을 사용해라.

118/ 2. Unity

유니티는 움직임이 자리잡는 터전이다. 하나의 아이디어를 넘어가서는 안된다. 이 방법은 대지들을(points) 갖지 않지만 하나의 요점(a point)즉 메시지를 갖는다. 고로 설교자는 설교의 핵심아이디어를 분명히 한 문장 안에 담아내야 한다. 이런 문장이야 말로 성서와 회중이라는 이중의 해석을 위해 필요. 핵심적인 주제는 자석처럼 보조 자료들을 일관되게 정리된 일련속으로 끌어들인다. 또 이렇게 한 문장으로 표현된 주제는 하나의 안내인 구실을 하는데, 가령 시종보다는 상전노릇을 하려는 예화등을 걸러내는 역할을 한다.

3. Imagination

이미지는 예화와 다르다 예화가 장식적 역할을 한다면 이미지는 설교형식에 필수적이며 전체 설교의 내용과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다(IMP 80). 이미지는 서론에 한정되지도 않을 뿐 아니라 흥미를 돋우기 위해 중간에 끼워넣거나 개념에 의해 대치되지도 않는다.

119/ 이미지의 기능은 삶이 경험되어지는 방식을 재창조하는 것이기에 설교준비와 경청 모두에 있어 이 기능은 필수적이다.

그러면 설교자의 이미지가 어떻게 회중의 상상속에 그들의 태도 가치 삶의 방향을 바꿀만큼의 극명성과 힘으로 구형될 수 있는가(IMP 92)하는 것이다: 이미지는 실제 삶으로부터 취해져야 한다 “사실적이고 가능한 것으로 인지될 수 있는 형식들 중에서 뽑혀야 한다.(92) 그런다음 강단 언어는 가능한 직접적이고 친근한 경험을 일깨울 수 있는 확고한(Concrete) 것이 좋다. 일상적인 말들(Generalized)은 사실감을 주지 못함 고로 설교의 효과를 반감시킴 강단에서 사용되는 용어의 효력은 형용사 부사를 너무 많이 사용하면 반감된다.

120/ 크래독은 설교의 형식이 어느 특정한 한 형식이 있는 것은 아니라고 본다. 물론 형식문제는 매우 중요한 이슈이다. 형식 자체는 능동적이며 설교자가 말하고 행동코자 하는 것에 공헌하며 떄로 설득하는 효과에 있어 내용 보다 결코 못하지 않다(설교 172). 내용과 형식은 상호 관계되어 있고 상호의존적이다. 물론 크래독은 귀납적 구성을 강조함을 통해 형식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지만 말이다. 설교의 구조는 회중들에게 요구하는 참여의 정도를 결정한다(설교 174) 연역적 설교가 가진 일차적인 약점은 회중들의 참여를 유도할 수 없다는 점이다. 메시지가 첫 번에 주어지고 다양한 보조 자료들과 함께 결론이 뒤따르면 회중은 설교내낸 수동적이 되어 버린다.

최근 점증하는 대중 설교가들의 경향은 설교의 형식을 성경본문으로부터 잡아 내는 것이다. 이 방법은 설교자에게 설교 형식상의 다양성을 제공할 뿐 아니라 메시지와 설교의 디자인을 동일한 본문으로부터 끄집어 옴으로 인해 설교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다.

지금까지 설교전통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설교는 Clarity, throughness, interest,(설교 176)을 갖춘 것이다.

“관찰-설명-적용/ 문제제기-해결

 

Either/or Both/ and

 

Ambiguity-clarity

대주제-소주제-결론

 

작은 것으로부터 큰 것으로(설교 177)

“설교자와 회중 양자에게 싫증나지 않게 하는 설교만큼 좋은 설교는 없다”(설교 177)

 

 

David Buttrick, A Phenomenological Method

 

133/ 오래된 이성적 설교방식은 이미 구시대적인 것이다. 근 300년간 설교는 이성주의자들을 끈으로 묶어버렸다. 성경해석 해석학 언어등 설교학과 관련된 제 분야는 급속하게 변화하고 있음 적지 않은 설교자들이 대지 주제중심의 설교에 의문을 갖고 있다. 그렇다면 이 개념위주의 역사와 문제점은 무엇인가?

종교개혁이후 설교는 형식적이고 딱딱한 형태(rigid shema)를 띠게 됨 설교는 주로 성경본문에 대한 “주의 깊은 관찰, 해석, 적용으로 이루어짐(Interpretation and Preaching, Interpretation 25, no. I(Jan. 1981), p. 46) 계몽주의가 끝나고 이 형식에 새로운 것 즉 도입부(Introduction)라는 것이 끼어듬: 본문(Text)에 의해 도입부가 따르고 이것은 다시 주제(topic)로 범위가 좁혀지고 이것은 다시 대지들(points)로 발전되고 그리고 결론(conclusion)으로 끝이 남. 이 대지 중심의 설교가 정착하면서 설교는 버트릭이 "Pop-Schleiermacher라고 이름 붙인 변화를 경험하게 됨. 설교자는 자기의 주관에 종교적 진리를 담아내었고 본문의 도움이나 반증을 구함 없이 아이디어를 개인적/목회적 경험으로부터 추출하기 시작 전형적인 것은 설교형식은 일련의 대지를 통해 메인 아이디어를 설명하는 방식. 버트릭: ”그 결과 이제 우리는 합리적 방법과 결합된 “영감”(inspiration)의 낭만적인 개념을 갖게 되었고 그런 혼합은 오늘날 대부분의 설교에서 발견된다.

134/ 20세기 들어 포스딕(Harry Emerson Fosdick) 이 특정한 개인사로 시작한 다음 그것을 성경에서 추출해낸 일반적인 종교진리와 연결시킴을 통해 수정하려 하였는데 그러나 그 결과는 설교에서 예화만 늘어나고 만 결과를 맺었다(IP 48)

종교개혁후의 학적 설교학이든 20세기의 합리적 상황적 설교학이든 양자 모두 객관적인 진리(objective truth)에 초점을 맞추고 범주적 전개(categorical development)가 특징이었음 버트릭은 합리적 접근과 초기 과학적 방법사이의 강력한 유사성을 간파했다. 전자는 대상이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되고 서술적인 문장들로 일반적인 연역이 뒤따르는 그런 학문적인 진행을 흉내내고 있는 듯 하다(IP. 47) 문제가 되는 것은 이처럼 설교가 주제적 객관적 모델일 경우 어떻게 성경의 말씀이 그 주제 안에서 취급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우선 성경 언어(주로 이야기 이미지 시 등으로 이루어진)의 성격은 이런 모델과 대항해 싸우는 듯 하다. 개념적인 Sheme는 성서를 “페이지 상에 있는 무기력한 언어”(on-the-page inert)로 다루게 된다(사실 이 언어들로부터 무엇인가가 움직여지고 취급될 수 있는 것인데 말이다)("Preaching the christian faith", Liturgy 2, no. 3, p. 54-PCF) 증류를 통한 해석은 필연적으로 내러티브나 시적 의미를 옮겨버리게 되고 이것은 성서에 생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고의 변경을 초래한다(PCF 54).성경은 객관적인 명제를 위한 자료의 원천으로 제한되어지고 그 이야기는 종교적 진리의 관념적 세계의 예증정도로만 비쳐지게 된다.

이러한 증류의 방법과 연계되면서 개념적인 설교는 짧은 본문도 이런 주제의 보고로서 이바지할 수 있다고 단언함

135/ 성경은 주제학으로 바뀌어지고 명제적으로 발전됨 그러나 이런 해석은 다른 밖의 사상들이 성경의 맥락안으로 들어온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버트릭이 주장하는 것처럼 한절의 본문은 그 의미가 맥락을 벗어나서는 나오지 않기 때문이다(IP 47).

이 진리와 원리가 성경 밖으로부터 온 것이라면 분명 그것들은 설교가 발생하는 일반 문화적인 정념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이 분명해 진다. 진리를 증류시키는 습성은 특히 신앙과 문화가 종합되는 시기 즉 일종의 사람들의 생각 속에 유비(analogia)가 살아있는 그런 시기에 번성한다(IP 55). 동시대의 문화 속에서 고정된 주제와 영원한 진리를 설교하는 것은 회중들이 그들이 복음을 듣기 전에 Victorian이 됨을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문화적 반복은 불가능하다.

버트릭: 설교방법과 관련되어 진짜 핵심이 무엇이냐?라고 질문. 회중들은 설교가 너무 일반적인 언어에 머물러 있어서 거의 살아있는 경험을 얻기 힘들 지경이라고 말한다. 설교는 거의 무해무득함 (harmless)과 동의어이며 가치와 느낌을 천박하게 한다 설교는 때때로 너무 아무 깊이가 느껴지지않는 도덕적이든지 혹은 신앙적이다(PCF 54). 하지만 탈출구는 구 모델인 주제적 접근의 수정이나 예화의 보강 혹은 ‘warm-fuzzy' 주관성의 강화만으로는 해결되지 않는다. 설교의 깊이는 성취될 수 있겠지만 그러나 300년 이상 끌어온 대지식 설교는 이제 끝을 내야 한다. 이를 위해 가장 시급한 것은 성경에 대한 새로운 연구이다.

합리적인 설교방식에 대한 다양한 표현들은 버트릭이 “증류의 방법”(a Method of distillation)으로 명명한 것을 통해 성서와 연관되어 있다. 성구는 단일 주제(a single theme)으로 축소되고 방법론적으로 축소와 증류(reduction/distillation)는 설교가 증거되기 전에 발생할 필요가 있다.

136/ 그론 방법을 통해 본문은 정적인 영역(static field)-여기로부터 하나의 아이디어가 발취되는, 즉 그 안에서 무엇인가가 발견되어질 수 있는 정물화(a still-life picture)로 비춰져왔다.(IP 49). 이런 증류의 방식으로 성서를 접근하는 것은 반 고호의 작품 Starry Night을 나무들 가운데 하나 혹은 교회 종탑을 따로 떼어서 그리고 분석적으로 설명하는 것과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여기서 그냥 지나쳐 버린 것은 예술의 의도 즉 그 작품이 무엇을 하려했는지 혹은 작품의 구성이다. 버트릭이 이야기하려는 것은 구절의 중요성을 실어나르는 요소들 상당수가 간과되었다는 사실이다. : “그림‘의 구성 내러티브 구조, 스토리의 움직임 구절이 말하고 싶어하는것에 대한 질문등이 간과되었다. 특히 구절이 그동안 멈추어지고 정지된 그림-그것으로부터 무엇인가가 취해져 설교되어진 -으로 취급되어 왔다는 사실을 주목하라(IP 49).

설교학적으로 성서는 “정적인 구조”(static construct) -이것으로부터 아이디어가 증류되거나 혹은 “본문”이 추출되어지는 -로 취급되었다.(46)

그러나 최근의 문학비평적 시각은 확신하기를: 성서는 증류의 객관적인 설교방법에 민감하지 않다. 성서의 구절들은 정지된 삶(still-lifes)보다 헐씬 필름같다; 그것은 생ㄴ각 사건 혹은 이미지의 움직임을 작동시킨다(IP 53). 이 성서적 움직임은 게다가 삽화적이고(episodic)일련의 논리적 응집을 구현한다. 고로 해석자에게 과제는 그 구절이 의미하는 것이 무엇이었나하는 것이 첫째가 아니라 줄거리를 이루고 있는 언어의 논리가 무엇인가를 물어야 한다. 구절이 “가시적”(visual)논리를 반영하는가 혹은 내러티브 시스템의 하나를 반영하는가? 혹은 구절의 삽회적 움직임속에 역전이 있는가 아니면 아이러니가 있는가? 문헌비평 방법론(Literary-critical methodology)은 성경언어속에서 으미의 움직이고 구성된 구조(mobile, plotted structure of meaning)그리고 목적을 구성하는 언어를 찾아낸다.(PCF 54)

137/ 모든 구절은 논리와 의도를 갖고 있는 동적 구조를 갖고 있다. 성서해석자에게 특별히 요구되는 관심은 구절 형식의 이유(why)와 방식(how)과 관련되어 있다.:왜 특수한 형식을 선택했는가? 어떻게 그 형식기 기능하는가?(IP 50) 구절의 논리는 구조분석을 통해 명백해 진다. 이 구조적 구연의 구조는(systems of structual telling) -이것은 내러티브에서 갑장 분명한데 - 시간 공간 성격 관점등의 문학적 범주로 분석되어진다(IP 51).

 

138/ 성경주절의 삽화적 움직임이 줄거리를 구성할 때 그 구성은 신학적 영역을 통해 움직인다는 것이 발견될 것이다. 이 중요한 관심의 영역(field of concern)은 나뉘어진 에피소드를 신학적으로 분석함을 통해 발견되어진다(IP 52).

 

눅 7: 1-10의 에피소드 혹은 움직임의 의미를 질문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본문의 분석은 관심 영역이 공로에 대한 호소와 은혜를 포함함을 드러낸다. 그러나 그 신학적 영역은 항상 언어의 구성된 시스템을 위한 컨텍스트를 남기며 정적인 주제로 증류되어질 수 없다. : “우리는 여전히 신학적 영역과 작동(play)을 다루고 있다 - 작동이 결정적이다... - 우리는 그것을 놓칠 수 없다. 본문 구절의 에피소드가 관심 영역에서 작동함에 따라 해석자는 감추어진 전망이 드러나기 시작하는 것을 주목한다 본문은 해석학적 끈같은 것을 구현하고 있으며 -이것을 통해 작가는 주제를 보는 -그리고 이 전망은(perspective) 본문의 구조가 그 안에서 움직이는 종속적인 영역이 된다(IP 57) 역사적인 질문을 하기 보다 설교자에게 필요한 것은 본문의 구조와 움직임의 논리를 묻는 것이고 그것의 중요한 관심 영역에 대한 해석학적인 초점을 묻는 일이다.

 

버트릭에 의하면 나아가 설교자가 본문을 해석함에 있어 숙고해야 할 것은 그것이 이야기되어진 세계(addressed world)의 이슈이다: 이것에 의해 의미되어지는 것은 회중의 사회적 의식에 의해 공여하게 되는 “세계구축(World construct)이다(IP 53).

 

버트릭의 확신: 성서는 관심의 영역안에서 에피소드의 줄거리의 움직임에 의해 의미를 실어나른다는 확신/ 여기서 나아가 그는 성서 언어에 대해서도 언명: 성서의 언어는 메시지를 갖고 있을 뿐 아니라(무엇인가를 말할 뿐만 아니라 say something) 마찬가지로 무엇인가를 한다(do something) 그는 언어란 구성력을 갖는다(performative). (언어는) 의식의 소리를 듣는 참석한 회중에게 무엇인가를 하려고 시도한다 이 언어의 생동감있는 기능은 모든 성경 언어가 다 담고 있다.

 

성서구절은 회중의 의식 속에서 어떤 방식으로든 기능하려 한다.고로 설교자는 메시지가 발견되었을 때 본문을 끝내서는 안된다. 버트릭의 중심질문: 본문구절이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

 

설교를 위한 이러한 문학적이고 현상학적인 성서접근을 버트릭은 patchwork phenomeno- logy)라 부르는 데 이것은 분명하고도 직접적이다. 성서언어에는 설교의 의도에 반영되어질 의도가 있다.

 

140/ 설교는 성서의 언어뿐 아니라 필연적으로 그 본문의 표현이 현 회중들의 언어속에서 어떻게 표현될 것인가 하는 것도 다룬다. 물속에서 물고기가 헤엄치듯 사람들은 언어속에서 산다. 설교는 따라서 특별한 공동체의 연설을 통해 말씀을 표현할 필요가 있다. 언어가 현재에 맞지않게 불안정하다는 사실이야말로 설교에 있어 문제이다.

 

버트릭은 다음과 같은 문화적 언어적 현상에 주목하고 있다:

 

1. 드라마적인 전환은 언어의 총체가 쓰이는 것에 따라 일어난다. 지난 50년동안 “우리는 조상들이 사용해 오던 어휘의 절반 가량을 폐기했다. 1960년 이래의 경향은 엄청난 정도로 새로운 단어들이 등장했다는 것이다(PCF 51). 사라진 어휘와 관련하여 버트릭은 1935년 웹스터 사전에 수록되있던 450,000단어중 1978년에 사용되고 있는 것은 150000단어에 불과하다. 반대로 1950년 이래 200000단어가 새로이 사전에 올랐다("On Liturgical Language", Reformed Liturgy Music 15, no. 2(Spring 1981), p. 74).

 

2. 최근 언어사용의 변화는 단지 잃고 얻은 양적인 어휘의 문제가 아니다. 설교영역에서는 질적인 전환이 발생했는데 로우리의 공간적 대화(spatial talk)같은 3인칭 개념적 언어는 그룹에 대한 오랄커뮤니케이션에서 기능하지 못하는 것이 되었다. 인류 애국심같은 개념어들은 더 이상 마찬가지로 그룹의식을 “형성하지 않는다. 설교자들은 언어의 양적 감소보다도 더 큰 느낌으로 여전히 수많은 설교자들이 불행하게도 이 3인칭 개념적 강화 수준에 머물고 있다. ”강단의 거성들“의 시대에 이러한 개념적 언어들은 효과를 보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설교에서는 더 이상 아니다. 강력한 힘으로 새롭게 부상하고 있는 것은 이미지 메타포 그리고 스토리에 초점을 둔 언어들이다.

141/ 어떤 새로운 설교라 하더라도 이런 요소들을 설교의 방법론으로 끌어들여야 한다.

 

3. 수사학과 관련하여 언어는 의식에 각기 다르게 작용한다. 오랄커뮤니-에 있어 회중이 단일 아이디어와 관련된 명확성에 도달하는데에는 적어도 3분이상을 필요로 한다. 또다른 측면에서 보면 회중들의 집중력이 길지않다는 것이다-한 그룹이 3분이상 한 아이디어에 집중하는 것은 어렵다. 그 결과 버트릭은: “설교자들은 특별한 방법을 구축해야 한다. 회중은 아이디어를 이해하는데 시간을 필요로 한다. 하지만 어떤 아이디어든 오랜 시간 참여하려 하지는 않는다.”(PCF 51).

 

만일 문학비평의 새로운 성경연구가 오래된 설교학적 장애를 치워버렸다면 언어상의 이러한 급격한 전환은 객관적인 설교의 생명이(objective preaching's life span)끝났다는 신호이다. “신앙은 들음에서 오기때문에(롬 10: 17) 오래된 개념적 수사학은 교회에 의헤 버려질 필요가 있다.

142/ 설교를 개념적으로 접근하는 것은 이미지와 메타포로 채워진 심원한 경험의 수준을 따라잡지 못한다. “사회복음적 설교자는 자아가 빠진 세계(a world without a self)에 설교했고 경건주의자는 세계없는 자아에 설교했다” 성서적 설교는 정적인 추상에 빠지는 것을 피함으로서 이 두가지를 극복해야한다.

 

버트릭은 새로운 설교방법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것을 문제삼는다: 만일 성구가 움직이는 언어라면 만일 그것들이 ‘세계’를 내포하고 있고 구조화된 중요성과 실현적인 목표를 갖고 있다면 ‘성경적’설교는 어떤 것이 되어야 할까?(IP p. 55).

 

143/ 그는 그 해답이 결코 줏석적 그리고 설교적 방법의 분리에 있다고 보지 않는다. 그는 현상학적 방법을 제창하면서 설교는 회중의 의식속에서 단지 사고하는 것 이상으로 기능하도록 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회중들의 목표는 그들의 의식속에 그것을 소지하도록 설교를 듣는 것이 아니다. 설교는 인간경험의 이미지와 언어가 만나는 해석학적인 의식속에 액션으로서 자리잡도록 디자인되어야 한다. 언어가 의미를 형성하는데 어떻게 기능하는가 하는 것은 모든 설교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것이다. 만일 언어가 해석학적 의식속에서 즉각적으로 기능한다면 개념적 접근 전략은 전부 배제된다. 왜냐하면 설교는 의식의 움직임 모방을 시도하여야 하기 때문에 토픽들은 객관화 될 수 없고 이야기될 수 없다. “설교란 성경을 말하는 것이어야지( a speaking of Scripture)성경에 대해 말하는 것이어서는 안된다( not about Scripture)(Ip 55). 설교가 본문에 대해(about text)말할 때 주관과 객관이라는 도식이 생겨날 수밖에 없다(subject-object dichotomy). 이것은 회중의 마음속에 본문이 작동하려는 목적을 방해한다. 나아가 이런 방식의 설교는 회중과 성서세계사이를 넓혀 놓을 뿐이다.

 

이에 반해 성경을 말하는(of)설교는 전혀 다르다.

 

144/ 이 경우 성경에서 만나는 것은 “생각의 움직임 혹은 어떤 논리에 의한 사건과 이미지”이다(IP 55). 설교자가 해야 할 것은 회중의 마음속에서 그 논리의 움직임을 반봅시키는 것이다. 그리되면 설교는 정적인 것으로 머물지 않는다. 오히려 설교의 언어가 성서본문이 제공하는 의도를 충족시키면서 의식속에서 움직이도록 디자인될 것이다. 이런 설교는 메시지를 전달할 뿐 아니라 무엇인가를 발생하게 하며 확신에 차서 성경적 회심을 표현한다. 만일 설교의 언어가 해석학적인 의식을 모방한다면 이것은 회중들을 한 이해로부터 다른 이해로 이동시키게 된다.

이런 동적 움직임은 본문이 갖고 있는 구성에 맞추어 설교의 구성을 구현하는 것에서 가능해 진다. “비록 설교가 성경의 구절 순서를 그대로 따를 필요는 없지만”(IP 56) 성경의 에피소드의 움직임에서 보여지는 성경메시지의 논리는 설교의 논리와 움직임에 중대한 의미를 가진다. ㅡ그에 있어 설교란 성경 본문의 신적 논리(theo-logic)에 맞게 그룹의 의식을 구성하려고 세심하게 고안된 일련의 움직임(a sequence of moves)이다. 설교에 있어서의 각각의 움직임은 하나의 목표로서 그것의 구성을 회중의 의식속에 갖는다.

 

145/ 그리고 하나의 움직임은 마음속에 일어나는 이해의 방식을 모방하기 때문에 읨의 개념적 차원 그리고 그 의미를 실어나르는 이미지의 개발이 필요하다. 움직임으로 들어오는 모든 아이디어는 이미지화되어질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추상적인 아이디어는 아이디어가 아니기 때문이다. 설교가 단지 단어가 들리는 것이 아니라 직접적으로 사고를 형성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이 이미지화는 구체적이어야 하고 회중들의 살아있는 경험과 연결되어야 한다. 그런 특별한 이미지없이 설교는 단지 말하는 것에 불과하게 된다. 반대로 이미지는 움직임의 개념적인 구조와 조심스럽게 연결되어야 한다.

 

146/ 이미지는 단순히 현상적 총체로서 심성에 등장하는게 아니다 이것은 의식속에 관점을 형성한다-해석학적인 안내를 하면서. 이미지는 각각의 비젼의 각도를 다 비춰주지만 전통적인 주제설교는 고정된 관조만을 제공한다.

 

* 버트릭이 제안하는 구체적인 설교작성법

 

1. Structure and Movement

성경본문의 구조는 에피소드가 갖고 있는 일련과 동일한데 설교적인 측면에서 과제는 본문의 “논리”를 표현하게 될 일련의 움직임을 개발하는 것이다. “아브라함과 이삭”이라는 설교에서 다음의 움직임이 보인다:

a. 아브라함에게 있어 모든 것은 이삭에게 걸고 있다.

b. 그러나 하나님의 명령은 하나뿐인 아들을 죽이라는 것이다.

c. 믿을 수 없게도 아브라함은 하나님께 순종한다.

d. 그러나 하나님은 제물로 양을 준비해 놓으신다

e. 맹목적인 순종의 자리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신앙의 자유로 세우신다

f. 우리 또한 자유이다 하나님을 신뢰하고 나아가는데 있어서 말이다.

 

이런 움직임의 파악이 끝난 뒤 할 일은 각 움직임을 신학적으로 체크해 보는 것이다. 각 움직임이 신학적 관심의 영역내에서 기능할 때 내포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는 일이다. 버트릭은 이삭을 죽이라는 하나님 명령의 급박성을 극대화시키고 있는데 여기서 생각해야 할 신학적 과제는 하나뿐인 아들이 아니라 이삭이 약속 그자체라는 것이다. 약속의 소멸이 문제이다. 버트릭은 -그때 -지금의 대조를 설교 초반에 극복하고자 시도하고 있다. 우리 역시 특별한 일 하나에 모든 것을 다 거는 경향이 있다. 하나님은 이삭에게 모든 것을 거는 그런 행태로부터 그것을 거두시면서 진짜 신뢰의 대상이 누군가를 시험하신다.

 

2. Identifying the contrapuntal

 

설교의 움직임과 구조가 구형되고 각 움직임이 신학적으로 검증되었으면 예증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버트릭은 각 단계에서 회중들이 저항할만한 것이 무엇인가를 체크하라고 말한다. 이 움직임을 들음에 있어 회중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것은 무엇인가? 만일 대지설교에서 한 대지가가 메시지에 대한 회중의 저항으로 전달에 실패한다면 또다른 대지들이 남아있다. 하지만 설교의 움직임이 일련으로 되어있는 그런 설교에서는 어느 한 단계의 움직임에 대한 저항이 풀리지않은 채 그냥 넘어가는 것은 그 자체로 재앙이다.

 

3. Imaging the Move

 

149/ 각 움직임을 이미지화 하는 단계 “모든 설교에서 각 아이디어는 반드시 이미지화 되어야 한다 그리고 가능하면 회중의 생생한 경험과 연결되어야 한다. 이미지를 위한 단계는 우선 성경해석이다. 핵심적인 메시지만 중여한 것이 아니라 이미지도 마찬가지 중요하다.

150/ 그의 설교 각 단계를 이미지화 하면 다음과 같다:

Move I: 미국극작가의 유대인 부모에 관한 짧은 이야기- 우리는 모든 것을 너에게 걸고 있다.

MOve II: 편안한 우리의 치료사무실의 이미지와 본문의 황량한 무대를 대조 이미지 시스템 은 영국 소설인용으로 끝남: 우리의 모든 사랑을 네가 가져갔다.

MOve III: 종교에 쉽게 다가가는 우리 이미지와(너는 대학 클럽에서 아주 쉽게 종교에 대 해 말한다) 그리고 낯선 복종을 대조시킴

Move IV: 심자가에 달린 양에 대한 비잔틴 벽화

Move V: 하나님의 선물이 우상으로 변함: Bible/ masculine church/ liturgy)

Move VI: 하나님을 믿고 행하라는 쪽지의 미니스터

 

위의 것들은 움직임을 신학적으로 견고하게 드러냈을 뿐 아니라 본문시스템과 긴밀하게 연계되어 있다. 고로 “우리는 모든 것을 너에게 걸고있다”는 인용은 아브라함의 딜렘마의 기능을 잘 살림(move I) 그리고 우리의 우상화(move V)를 잘 살림 그리고 하나님의 자기 부여를 잘 살림(move IV)

 

도입부에 중세의 이삭에 대한 그림은 십자가에 달린 양에 대한 비잔틴 그림과 겹치게 한다. 대조이미지의 사용은 2-3단계에 나오고 있는데 2단게의 인용 “우리의 모든 사랑을 네가 가져가 버렸다”는 4단계에서 하나님이 한 아이를 주신 것으로 다시 반복됨

 

151/ 4. Perspectuality and point of view

 

Point of view: 비젼에 대한 이미지의 각도와 연결됨

Perspectual Angle: 의식안에서의 움직임 자체에 대한 안내를 언급

각각의 움직임은 각기 다른 관조적 앵글로부터 나온다. 그리고 이를 통해 해석학적인 작용을 한다. 움직임의 연속을 통해 설교자는 관점의 전환을 이룰 수 있다.

 

설교에서 첫 번째 움직임은 좀 복잡한 관조: 회중들은 미래를 향한 약속을 이야기하는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는가 질문받는다. 유대인 부모 이야기은 이것보다 오랜 이야기는 아니지만 그러나 이것을 재차 강화하고 있다.

 

Move II에서는 기도자라 불리우는 couch에 대한 관점이 언급된 다음 곧 바로 all our love...로 나아가고 있다.

Move III에서는 관점이 생략되어 있다. 아마도 아브라함의 환상적인 복종과 우리의 자유를 다루려했기 때문인 듯

Move iv에서는 다시 더 강한 관점이 재등장: 십자가에 달린 어린 양에 대한 언급을 통해

Move V에서는 회중들이 낮은 정도의 그 어떤 우상섬기는 자들이라고 추정

Move VI에서는 복음이 성직자의 담을 덮고 있다고 보는 성직자의 견해와 회중을 동일시함

이를 통해 Perspectuality는 움직임이나 이미지 자체와 마찬가지로 설교의 ‘디자인된 내적 측면’(a designed - in aspect of the sermon)이라 할 수 있다.

 

152/ 5. Introduction and conclusion

 

이 방식은 개념적 설교의 서론이 회중의 흥미자극하는 것을 필요로 하는 것과는달리 그런 작업을 필요로 하지않음 이미 이야기 자체가 흥미를 담고 있음/ 주석적인 언급이나 설교자 개인의 이야기도 불가

 

결론: 간단한 언어와 단순한 구성이 필수적 5-7문장이 좋음 결론은 요약이 아님 덜 교리적이고 보다 감정을 자극하는 것이 좋음 완전 해결하기 보다는 남겨 놓는 것이 좋음 특히 본문 자체가 강력한 촉구를 담고 있는 경우라면 설교 역시 동일하게 나가는 것이 좋음

 

6. Move Design

 

각 움직임의 내적인 디자인의 목적은 움직임이 의식속에서 형태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 특히 각 단계의 처음과 마지막 언어는 의도를 살리는 것이어야 함/즉 개념적인 필요가 성립되어야 함 처음 두 세문장에서 개념적인 단어가 나와야 함:

 

a. 주목할 것은 이삭은 독자 이상의 의미를 가진다는 것입니다. 그는 희망입니다. 인간의 모든 것이 달려있는 희망입니다. 하나님의 모든 약속은 이삭에게 모아져 있습니다.

 

c.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일에 순종했습니다. 그는 들었을 때 즉시 그것을 행했습니다. 그는 순종했씁니다. 지긋히 눈을 내리고 그는 아들을 인도해 가면서 중얼거립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실 거야 하나님이 준비하실거야

 

구연언어는 그룹에 있어 다르게 형성된다. 그룹에서 행해지는 오랄언어는 그것이 형성되는데 더 많은 시간이 걸린다. 한번에 표현하는 것 보다는 여러번에 걸쳐 표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각 단계마다 두 세 문장에 중심적인 개념을 실어넣는 것이 바람직 하다.

 

설교결론과 관련하여 버트릭이 주제설교에 대해 비판하는 것은 이 설교가 반드시 마감있는 것을 고집한다는 것이다. 회중들은 다음 대지로 넘어간다고 해서 전대지에 대한 생각을 접어두는게 아니다. 물론 회중들의 의식의 계속적인 움직임을 정지시키기 위해서는 마감이 필요활 수도 있다. 또 이를 통해 새로운 시작을 준비할 수 있게 하기도 한다.

버트릭은 서론에서 사용되었던 자료의 반복을 주장한다.

 

* 버트릭이 제안하는 움직임의 내적 개발을 위한 가이드라인 *

 

1. 이미지작업 전에 사용하는 개념적 문장은 3-4개를 넘지않도록 하라 단조로운 개넘문장은 회중들의 의식이 기능하는 것을 급격히 멈추게 한다.

 

157/ 2. 한 아이디어를 3개 이상으로 세분하면 그것을 받아들일 회중은 없다

 

3. 각 움직임은 그 내부에 쓰이는 자료를 각기 달리하는 것이 좋다. 만일 설교자가 동일한 패턴을 반복하게 되면 회중의 집중력은 급격히 떨어지게 된다.

 

4. 각각의 움직임은 각기 다른 각도의 관조를 사용해야 한다. 개념적 설교의 단조로운 3인칭 구도는 능동적인 의식을 죽이는 것이다.

 

5. 각 움직임은 의사소통되는 언어위에 세워져야 한다.

 

6. 한 움직임속에서 이미지를 개발하려 할 때 적어도 세 개이상의 문장을 사용하여야 하며 그것이 스토리예화일 경우는 최대 5개 문장을 사용해야 한다.

 

7. 긴 인용, 시 찬양같은 것들은 길게 자리잡지 않도록 하라.사용되는 시도 현대적이거나 일 상적인 경우에만 기능발휘할 수 있다.

 

8. 한 개의 쌍을 이룬 이야기나 두 개의 구도를 한꺼번에 이야기하면 회중들은 그것을 의식 속에 소화하지 못한다. 대중의 그룹 의식은 동일한 가치의 두 요소를 한꺼번에 조종하지 못한다. 대개 하나는 못 풀든지 두 개 모두에 실패한다.

 

9. 급히 제시된 네 개의 아이디어는 의식속에 수용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가령 바울 은 우리에게 사랑 죄 희망 은혜을 말했습니다) 언어는 대개의식속에 집합하려는 경향이 있다.

 

10. 이미지나 다른 예증의 세기는 움직임의 세기와 비례한다. 예화가 길어질수록 이것은 개념적인 것과는 멀어지게 된다.

 

7 Stories in preaching

 

현상적 방법에서 이야기가 갖는 특징적 요소는 이미 서론과 결론 move formation, point of view에서 다 나왔다. 설교자가 1인칭으로 설교하게 되면 그것은 회중의 초점을 분산시키게 된다. 설교에 사용되는 이야기가 길면 마치 그들이 세상을 받아들이듯 이야기를 받아들이게 된다는 것이 문제이다 스토리가 힘이 있을수록 회중들은 자신들을 곤경으로부터 구해내기가 어렵게 되고 설교의 움직임과 구조에 맞추기가 어렵게 된다.

 

비슷한 현상은 너무 많은 이야기를 사용할 때에도 일어나게 된다. 스토리예화는 움직임의 개념적 측면을 구체화하는 것으로 작용하게 된다.

 

한 이야기가 설교전체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이 경우 이 이야기는 성서 구절과 관련된 신학적 논리적인 것을 반영하는 것이어야 한다.

 

평가

 

버트릭은 다른 사람과는 구분됨는 인물로 그가 쓴 현상학적 방법 오늘날의 다른 많은 설교 방법론들과 비교해 볼 때 매우 여러 면에서 독특하다 할 수 있다. 성경과 설교가 줄거리를 가진 언어시스템을 갖고 있는 반면 그는 내러티브를 해석의 일차적 원리로 채택하지는 않는다. 그는 성경구절과 설교가 theo-logic을 과시하는 플롯으로 움직이고 있음을 주장하면서도 귀납적 방법에서 주장하는 것 처럼 그것을 표준적인 설교의 운동으로 간주하지는 않는다.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설교의 어떤 형식과 움직임을 구조적으로 제한하는 것을 반대한다는 것이다. 오직 성서본문만이 설교의 형태와 가동성을 구형하는 지도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는 새설교학 주창자들과 구 시대적 개념적 설교에 대해 강한 연대를 과시한다. 추론적인 설교(discursive Preaching)의 죽음은 증류의 방법을 적용함으로 성경을 잘못사용했기 때문이다. 구 설교학은 헬라의 수사학으로부터 유래한 논쟁의 정적 모델에 기초하고 있다. 명제와 아이디어의 집합 결과는 인간의 인지적 측면에만 말을 거는 정적인 시스템이다(static system) 버트릭은 이점에 있어 라이스 미첼 로우리 크래독에 동의하면서도 한가지 결정적사항을 덧붙인다: 개념적 설교는 새로운 성경연구와 해석학의 구도로 보는 것을 알지 못하던 때에 만들어진 것으로 더 이상 효과적인 복음 선포의 방법이 되지 못한다는 것이다. 만일 신앙이 들음에서 난다면 주제적 설교는 문제인 것이 왜냐하면 이것은 더 이상 회중들에게 들려지지않기 때문이다.

 

추론적 설교의 불가능성에 있어 다른 설교가들과 연합하는 것을 떠나 그의 현상적 방법은 그 나름의 긍정적 부정적 특징을 갖는다.

 

1. 버트릭이 서구 사회의 언어환경 변화를 지적하면서 설교언어 역시 문화와 언어에 일고있는 이러한 혁명이 소통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을 몰라서는 안된다고 주장한 것은 옳다. 하지만 성경 언어는 이미 어떤 의도를 갖고 있는 것이고 설교자는 예리하게 그것의 의미뿐 아니라 그것의 행동을(doing) 물어야 한다

 

 

설교문: 아브라함 그리고 이삭/ 창 22: 1-4; 계 5: 11-14.

 

아주 오래된 독일의 목판화에는 이삭의 희생이 그려져 있습니다. 온 몸을 꽁꽁 묶인채 이삭이 장작더미위에 눕혀져 있습니다. 모든 것을 체념한 듯 큰 눈을 꿈벅 거리면서 말이지요. 그 위에 아브라함이 서서 양손에 칼을 움켜쥔채 막 찌르려 하고 있습니다. 그림의 위쪽 한 편에는 가시덤불에 걸린 힌 양이 서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참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입니다. 이 이야기만큼 아주 오랜 동안 신앙인들에게 골치거리를 제공해 준 것도 드물 것입니다. 어거스틴에서 카프카에 이르기 까지 키에르케고로에서 칼 바르트에 이르기까지 말이지요. 아마 우리는 이삭의 희생으로부터 ‘폭력과 은혜’를 추출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로부터 무엇을 생각할 수 있습니까?

 

우선 먼저 주목할 것은 이겁니다: 이 삭은 외아들 이상의 중요성을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입니다. 이삭은 희망 그 자체입니다. 인간육체의 모든 것을 짊어진 희망 그게 바로 이삭입니다. 이삭의 어깨에는 하나님의 모든 약속이 짊어져 있습니다. 여러분 그 이야기를 기억하세요? 하나님이 불쑥 아브라함과 사라를 찾아오셔서 네 자손들이 바다의 모래처럼 번성할 것으고 네 자손으로부터 열방이 나올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해 보십시오. 그 노인네들은 킬킬거리고 웃었습니다. 왜요? 구십세에 아이를 갖는다는 것은 의학적 지식으로 볼때에는 불가능이거든요! 그런데 별안간 이삭이 잉태되었고 태어났습니다 기적의 아이가 태어난 겁니다. 바로 하나님이 그리 하신 것이지요! 이삭을 통해 수많은 후손이 나왔고 수많은 나라들이 세워졌습니다. 어느 미국 작가가 하는 이야기를 들었어요. 그의 유태인 부모가 자신에게 해주기 위해 얼마나 검소하게 생활하고 아끼는지 모른다는 겁니다. 그렇게 아낀 것으로 그에게 일년에 세차례씩 새 옷을 사줍니다. 그를 사립학교에 입학시키고 그의 대학 학비 전체를 대 줍니다. “아들아 너는 우리의 전부다!” 그의 어머니가 늘상 하시는 말씀입니다.“아들아 너는 우리의 전부다!”

 

희망을 하나로 모은다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우리가 살 수 있는 나라를 허락하시었습니다. 여러분이 알기 전에 우리는 이렇게 노래하곤 했습니다: “미국이여, 그대는 우리의 전부이어라!” 혹은 교회에도 예외는 아닙니다: “장로교회여, 그대는 우리의 전부이어라!”

 

잘 들으세요, 이삭은 외 아들 이상의 의미입니다. 이삭은 하나님의 약속이 구체적으로 나타난 것입니다. “아들아 너는 우리의 전부이니라!” 이삭은 희망이었습니다. 온 세상의 희망이었습니다.

그래서 무슨 일이 일어났습니까? “이삭을 죽이라” 하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네 하나뿐인 아들을 잡아 죽여라!” 우리는 그 말을 듣는 순간 소스라치게 놀랍니다. 우리는 항상 하나님을 사랑의 하나님이라고 말해왔습니다 사랑의 하나님!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은 실로 감당하기 어려운 말입니다: “그를 죽여라!” 순식간에 인생이란 (생명이란) 우리가 생각했던 그런 것- 가령 “기도자”라고 불리우는 의자위에서 우리의 영혼을 어떤 신에게 쏟아놓는 그런 안락한 치료사의 사무실 같은 그런 것과는 상관없는 것이 되버립니다. 오히려 우리는 돌짝 밭과 화장터의 장작더미 번쩍이는 칼날에 둘러쌓여 꼼짝 못하고 있습니다. 그래요, 하나님은 우리에게 좋은 선물들을 주셨습니다마는 그러나 하나님이 그것을 다시 빼앗아가셨습니다! 영국 소설속에 나오는 여주인공은 이렇게 절규합니다: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 우리가 사랑하는 모든 것을 당신은 앗아가 버렸습니다”. 재기발랄한 모든 아이들을 위해 날카로운 칼날이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학자로서 그런 어두운 그림자를 포함시키기 위해 하나님-관념을 재 설정해야 할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어쩌면 지독히도 좋은 분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지독히도”라는 부사를 주목하십시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지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아들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그를 죽여라, 그를 죽여버려라!”

 

그런데 아브라함은 모든 일에 순종을 했습니다. 아브라함은 자기가 들은 것들을 그대로 행했습니다. 그는 복종했습니다. 넋나간 눈으로 내키지 않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아들을 산 꼭대기로 데리고 갑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중얼거립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실거야 하나님이 예비하실거야! 광신도 아브라함은 복종했습니다. 우리중 대다수에게 종교란 그리 어려운게 아닌 심지어 캠퍼스에소 조차 가능한 일종의 자유로운 신조와 같은 것이라서 대학 클럽안에서 조차 종교에 대해 토론할 수 있습니다. 그때 우리가 가볍게 성경을 펼쳐 놓으면 독약이 든 Kool-Aid를 주고 지나가는 험악한 눈의 아브라함과 마주치게 됩니다. 그러면 우리는 몹시 당황해 합니다. 서남부 지방으로 내려가면 헌신자라 불리우는 한 집단이 있습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들은 1950년대 까지 사람을 희생제물로 드렸다고 합니다. 마침내 그들은 조사를 받게 되었습니다. 조사관이 심문을 합니다. 도대체 당신들은 어떤 사람들이기에 사람을 희생제물로 드린단 말입니까? 그러자 그들의 지도자가 대답합니다: “당신은 하나님을 진지하게 대하지 않는군요”. 글쎄요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지요. 우리는 온순한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자선을 계획하고 우리의 작은 죄도 고백하며 한 주간에 최소한의 시간이라도 선교를 위해 계획을 세우고 극도로 모든 일에 경건한 삶을 살려 노력합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이 보여준 철저하고 맹목적인 복종을 보십시오. 하나님이 명령하셨습니다. 그러자 아브라함은 그것이 자기의 하나뿐인 희망을 죽이는 일이었음에도 하나님의 뜻에 자기를 복속시켰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삭을 죽이기 위해 산으로 갔던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하셨고 아브라함은 복종했습니다.

 

자 칼을 숯돌에 가는 소리를 들어보십시오. 옆구리를 포박하고 있는 아브라함의 팔을 보십시오. 갑자기 아브라함의 시야에 가시덤불에 걸린 양이 들어왔습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실거야”그는 득의양양하게 소리칩니다. “하나님이 예비하실거야!” 자 만일 여러분이 기독교인이라면 여러분은 갈보리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그렇지 않나요? 다른 한 쪽의 돌 산 그리고 높이 세워진 십자가를 말입니다. 오래 전에 그려진 십자가상가운데 비잔틴 벽화가 있습니다. 그 그림은 돌산과 나무십자가를 보여줍니다. 하지만 그 십자가에는 예수 대신 거대한, 십자가에 못 박힌 양이 달려있습니다. 하나님의 양! 보십시오 만일 하나님이 우리 죄를 위해 독자를 십자가에 못 박히도록 내어주려 한다면 그렇다면 보십시오. 심하게 손상된 생명의 표면 뒤에 있는 것은 거룩한 폭력이 아니라 사랑입니다. 그 사랑은 얼마나 놀랍고 그 하나님 사랑은 말할 수 없이 강력해서 그 자신을 우리를 위해 희생 제물로 드리실 정도입니다. 십자가에 달린 어린양 그것은 곧 보좌에 앉은 어린양입니다! 그래서 아브라함은 덤불에 걸린 어린양을 보고 기쁨에 겨워 소리쳤던 것입니다. 돌에 칼을 가는 소리, 포박한 팔, “하나님이 예비하실거야” 아브라함은 소리칩니다.

 

자 이제 아브라함의 제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아시겠습니까?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신앙으로 자유케 하셨습니다. 성경은 이 이야기를 테스트라고 부릅니다마는 그 단어는 너무 평범합니다. 높은 돌 산 위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자유케 하셨습니다. 맹목적인 복종이 신앙으로 바뀌었습니다. 아, 우리가 은혜의 수단을 바라는 우리의 희망에게 얼마나 쉬이 포로가 되는지요, 그리고 그로 인해 하나님을 잊어버리는 지요.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선물을 우상으로 바꾸어 버립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경을 주셨습니다마는 그러나 보십시오 우리는 얼마나 그 페이지를 찬란하고 무오를 보증하는 교리로 채우는지요: “성경, 그대에게 모든 것이 달려 있소!” 혹시 하나님은 강력한 교회를 통해(로마카톨릭 교회: 역자 주) 우리에게 신앙으로 들어가게 하셨는지도 모르겠지요. 그것을 알기 전까지는 우리가 그 하나님의 대변자와 절대적인 위치를 점하고 있던 성직자들을 보호하겠지요: 그래서 웅장한 남성 베이스의 합창단은 “ 모든 것이 당신에게(카톨릭 교회) 달렸소”라고 노래했습니다. 60년대 전까지만 해도 한 자유 카톨릭 저널에서는 아주 유쾌하게 이런 발표를 내 놓았습니다: “하나님은 오직 라틴 미사를 통해서만 역사 하십니다”. 이에 대해 어느 독자가 내놓은 대답은 이겁니다: “아마도 하나님은 그럴 수 있을지 모르지만 우리는 그럴 수 없습니다”. 교회의 그런 태도에 어떤 종교적 우상화 같은 것이 보이지 않습니까? 그런 것들에 대해 “죽여버려라” 라고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우리의 영혼을 산산조각 내시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모든 잘못된 사랑을 날려 버리시는 분입니다. 바로 그 높은 산 위로 하나님은 아브라함과 이삭을 부르셨고 그리고 바로 거기서 하나님은 놀랍고도 잔인한 은혜로 아브라함을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참된 신앙을 위해 자유케 하신 것입니다.

 

자 여기서 우리는 20세기 속의 갈보리 돌산을 만나게 됩니다. 우리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믿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준비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성경과 우리의 교회 우리의 예전을 갖고 있습니다마는 그런데 그 모든 것들이 이전과는 뭔가 좀 다릅니다: 번쩍이는 화려함은 닳아 버렸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우리의 교회와 교단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참된 생명을 유지하지 못할 때에도 특별히 하나님이 모든 교단을 싹 쓸어버리시는 그런 때에도 말입니다. 예 그래요 우리는 성경을 사랑할 수 있습니다. 각각의 거룩한 페이지를 보호하지 않고서도 말이지요, 특별히 오늘날 성경의 권위를 위협하면서도 말이지요. 우리는 우리의 모든 필요를 채우기 위해 자기를 내어주신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이 준비하실거야! 하면서 말이지요. 북부 주의 한 목사님이 자신의 집무실에 벽지를 발랐습니다. 흔히 벽지는 같은 글자들로 혹은 문장들로 이루어져 있기 마련이고 그것들의 선을 맞추어 반복적으로 모든 공간을 바르지 않습니까? 작업을 마친 후 그 목사님은 자기 책상에 앉아서 그 벽지에 쓰여진 글자를 읽을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라! 자유케 하라 하나님을 믿으라! 자유케 하라”. 우리가 보좌에 앉으신 어린양 그 하나님을 신뢰하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의 모든 사랑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습니다: 우리의 성경 교회 국가 심지어 남과 여라는 구분! 우리는 갈보리로부터 인간의 세계속으로 비틀거릴지언정 넘어갈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확신하면서 말이지요.

 

자 이제 여러분 마음에 그림들을 옮겨 놓으십시오. 돌로 된 언덕 일단의 가시덤불 횡하니 패인 두 눈 그리고 높게 치켜든 예리한 칼! “그를 죽여라!” 천둥같은 하나님의 음성이 울려퍼집니다. 그런데 여기 또 다른 그림 하나가 있습니다. 언덕 위에 세워진 나무 십자가, 그리고 십자가에 달려있는 어린 양! “하나님이 준비 하실거야!”. 이 두 그림을 여러분 마음속에 간직하십시오. “하나님 당신께서 우리의 모든 사랑하는 것들을 치워주시고 오직 당신 자신을 주시옵소서”. 하나님을 믿으면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다 놓아주십시오. 여러분들이 사랑하는 것들을 다 놓아준다면 하나님을 믿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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