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강해] 1:3-5 첫째 날의 창조
[성경 본문]
3 하나님이 이르시되 빛이 있으라 하시니 빛이 있었고 4 빛이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나님이 빛과 어둠을 나누사 5 하나님이 빛을 낮이라 부르시고 어둠을 밤이라 부르시니라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첫째 날이니라
[주해]
하나님이 가라사대
3절은 ‘바요메르(원형 아마르) 엘로힘’으로 시작한다. 직역하면, ‘말씀하셨다 하나님’이다. 히브리에서서는 동사가 문장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 1절의 창조를 예외로 한다면 3절은 창조의 시작이자 일반적 창조의 패턴의 원형이다.
‘하나님이 이르시되’는 모두 10번 사용된다.(3, 6, 9, 11, 14, 20, 24, 26, 28, 29) 유의하여 보면 하나님의 말씀은 창조와 연결되어 있는 동시에 어떠한 것을 명확하게 구분하고 속성을 정의하는 것과 혼용하여 사용한다. 예를 들어 3절에서는 창조에 대한 것이지만, 6절에서는 물이 둘로 나뉘는 ‘명령’이다. 이러한 구분은 하나님의 말씀은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말하며, 창조적 능력과 소명(속성)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기도 하다. 창세기 12장에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말씀(아마르)하신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부르심이며, 존재의 이유에 대한 정의이다. 아브라함은 순종함으로 존재(소명)하게 된다.
빛이 있으라
요한은 본 절을 응용하여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요 1:1)고 선언한다. 그러나 요한은 응요한 것이지 해석은 아니다. 요한복음의 말씀 로고스는 성육신한 하나님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창세기 1:3에 기록된 빛은 ‘오르’로 창조된 빛이다.
존 월튼은 빛(오르)의 창조를 빛 자체가 아니라 ‘빛의 기간’으로 본다. 이것은 ‘빛을 낮이라’(5절) 칭하는 것에서 이유를 찾는다. 그렇다면 빛은 시간이 된다.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한 것이다. 존 월튼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첫째 날에 하나님은 시간을 창조하셨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우주의 혼돈 속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사용하시는 기능들 가운데 첫 번째 기능이다 즉, 질서 정연하고 규칙적인 시간의 진행이 바로 그것이다.”
월튼은 신화적 관점에서 본 절을 풀어 가는데, 이러한 관점은 창세기 1-11장이 주변의 신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여기는 신화의 문제는 논외로 하자. 고든 웬함은 빛을 첫 피조물로 보지만 5절의 낮이라 칭한 것에 대해 난제가 발생한다고 말한다. 필자가 보기에 3절의 빛은 빛으로서의 기간을 동시에 생각해야한다고 믿는다. 왜냐하면 그 빛이 낮이 되고, 빛은 낮을 주관하기 때문이다. 즉 이 빛은 태양이라고 직접적으로 말할 수도 있는 것이다. 문자적 직역이 아닌 이상 창세기 1장의 창조는 창조의 개념을 설명하려는 상징일 수 있기 때문이다.
빛이 있었다
‘있으라’와 ‘있었다’는 한 쌍을 이룬다. 모세는 의도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한 쌍의 문구를 통해 보여준다. 그러나 좀더 궁극적인 목적은 숨겨져 있다. ‘있으라’와 ‘있었다’는 순종을 요구하기 때문이다. 광야의 이스라엘에게 가장 큰 적는 ‘의심’이다. 의심의 기저에는 생존에 대한 욕구이자, 자신의 삶을 스스로 통제하는 욕망이 잠재되어 있다. 존재는 철저히 하나님의 명령(말씀)에 순종함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부재의 영역 속에서 불순종으로 일관하여 고통을 당한다. 창세기 1장의 창조는 광야의 혼돈과 공허에서 일어나는 하나님의 창조적 능력을 암시하고 있다.
‘있으라’와 ‘있었다’는 동일하게 ‘하야’라는 단어이다. 말씀은 곧 존재가 된다. 그렇기 때문에 말씀은 생명이며, ‘있었다’는 순종의 결과를 통해 존재하게 된다. 이제 순종은 존재하는 것들의 이유가 된다.
보시기에 좋았다.
‘있으라’와 ‘있었다’는 ‘좋았다’로 이어간다. ‘좋다’라는 히브리어 ‘토브’는 완전함과 온전함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된 것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석이자 관점이다. ‘토브’는 1장에서 7번(4, 10, 12, 18, 21, 25, 31) 사용된다. 둘째 날 누락되고, 사람의 창조가 있는 여섯 째날 두 번 사용된다. 이것은 사람의 창조가 창조의 완성이며, 하나님께서 가장 원하시는 존재라는 점을 부각시킨다.
많은 사람들은 둘째 날 토브가 기록되지 않은 것을 노아의 홍수와 연결하여 해석하지만 얼마나 타당성이 있는지는 미지수다. 만약 모세가 그러한 의도에서 토브를 누락했다면 창조 때부터 타락에 대한 염려와 어쩔 수 없이 심판해야하는 고통을 읽어낼 수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관심은 하나님께 있다는 것을 보여주며, 사람의 타락이 얼마나 하나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는가를 말해준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심판의 물은 출애굽 당시 이스라엘을 가로막는 대상인 동시에 애굽 군대를 심판하는 수단이기도 하다.
토브는 단순한 정의를 너머 인간의 역사를 바라보는 하나님의 구원사적 섭리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토브는 비록 창조 이야기 속에서는 누락되었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통해 ‘기쁨’으로 채워진다. 예수 그리스도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 하늘이 열리고 ‘너는 내 기뻐하는 아들이라’는 하나님의 음성이 들린다.
나누시고 부르시고
나눈다는 표현은 처음 등장한다. 이후 창세기 1장에 네 번(6, 7, 14, 18) 사용된다. 나눈다는 말은 차별이 아닌 구분이며, 개체로의 부름이다. 빛은 빛으로, 밤은 밤으로서의 부르시고 그것을 나누신다. 부름은 소명이며, 자신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목적대로 일하는 것이다. 고든 웬함은 레위기를 염두에 두고, 나눔의 성속의 구분을 의미하고 있다고 말한다.
결론
첫째 날의 창조는 이후의 일어날 창조의 원형이자 시작이다. 빛의 창조는 어둠과의 나눔을 의도한다. 하나님은 나눔으로 각자의 위치에서 자신의 사명을 다하도록 소명을 부여하신다. 존재는 곧 소명이며, 소명은 곧 사명으로 나아가야 한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빛’을 구원으로 연결하며,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끌고 간다. 요한은 빛이 곧 생명이라고 선언한다.(요 1:4,5,8 등) 빛은 매우 상징적인 존재로 하나님의 계명과 진리, 생명을 아는 지식 등으로 다양하게 사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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