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반의 식탁 위에 놓인 은혜의 떡
이 본문은 예수님의 고난 직전에 벌어진 유월절 만찬의 장면을 중심으로, 제자들의 연약함과 하나님의 은혜가 맞부딪히는 깊은 신비를 드러냅니다. 마귀의 역사, 인간의 배신, 그리고 변하지 않는 하나님의 언약이 교차하는 이 장면은 그리스도인의 삶과 신앙을 재조명하게 합니다.
유월절 준비, 하나님의 섭리 아래 펼쳐지다
누가복음 22장은 유월절이 가까워지면서 벌어지는 긴박한 분위기로 시작합니다. “유월절이라 하는 무교절이 다가오매”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단순한 절기 이상의 의미를 읽게 됩니다. 유월절(파사흐, פֶּסַח)은 단순한 민속 행사가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의 은혜로 애굽의 종살이에서 해방된 역사적 사건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이 날은 어린 양의 피로 구원을 받은 날이며, 예수 그리스도께서 바로 그 어린 양으로 자신을 드러내시는 순간입니다(고전 5:7).
이 시기에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를 죽일 방도를 궁리합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의 수호자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하나님의 아들을 죽이기 위해 악한 계획을 꾸미고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이 “무리를 두려워하니”라는 부분입니다. 사람들의 환호를 두려워하는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뜻을 대적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마치 어거스틴이 말했듯,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으면 결국 사람을 두려워하게 된다”는 진리가 드러나는 대목입니다.
이와 동시에 마귀가 가룟 유다에게 들어갑니다. 본문은 단순히 유다가 예수를 배신한 것이 아니라, 그 배후에 사탄의 역사가 있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마귀가 가룟인이라 부르는 유다에게 들어가니”라는 구절은 요한복음 13:27과 연결되며, 인류의 구속 역사에 있어 악의 개입이 얼마나 치밀한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모든 과정을 하나님의 섭리가 통치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합니다. 칼뱅은 이 장면을 해석하며, 하나님은 사탄의 손에 붙이심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실행하신다고 말합니다. 인간의 악함조차도 하나님의 도구가 된다는 역설 속에 우리는 하나님의 주권을 봅니다.
마지막 만찬, 새로운 언약의 서막
예수께서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어 유월절을 준비하게 하신 장면은 세밀한 하나님의 계획을 보여줍니다. 예수께서 “물을 가지고 가는 사람을 따라가라”고 하신 부분은 그 당시 남자들이 일반적으로 물을 길지 않았다는 사회적 문맥을 고려할 때 매우 이례적인 지시입니다. 이 예비된 장소는 단순한 우연이 아닌 하나님의 예정과 질서 속에서 마련된 장소였습니다.
드디어 예수와 제자들이 유월절 만찬을 위해 앉게 됩니다. 예수께서는 “이 유월절 먹기를 원하고 원하였노라” 말씀하십니다. 이 반복 표현은 헬라어로 “ἐπιθυμίᾳ ἐπεθύμησα(간절히 원하였다)”는 표현으로, 예수님의 내면 깊은 갈망과 정서를 드러냅니다. 이 유월절은 단순히 구약의 의식을 반복하는 자리가 아니라, 그 의미를 성취하시기 위한 자리였습니다.
예수께서 떡을 떼시며 “이것은 너희를 위하여 주는 내 몸이라”고 하신 말씀은 단순한 상징이 아니라, 자기 몸을 찢기우는 실제적 사건을 예고하는 선언입니다. 루터는 이 구절에서 ‘이는 나의 몸이라’는 말씀을 실재의 전달로 받아들였고, 츠빙글리는 상징적 의미를 강조했지만, 칼뱅은 이 둘 사이를 연결하며, 성례를 통해 실제 은혜가 전달되나 그 본질은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 안에 있다고 보았습니다.
포도주에 대해 말씀하실 때, “이 잔은 내 피로 세우는 새 언약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새 언약(καινὴ διαθήκη)’은 예레미야 31장의 예언을 성취하는 장면이며, 십자가의 피로 인해 더 이상 율법 아래서가 아닌 은혜 안에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재정립됨을 선언합니다. 이제 희생 제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됩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피, 그분 한 분의 희생으로 모든 것이 완전해집니다.
배신과 연약함 속에 드러난 은혜의 깊이
그렇지만, 이 은혜의 식탁 가운데 충격적인 선언이 이어집니다. “그러나 나를 파는 자의 손이 나와 함께 상 위에 있도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제자들의 내면을 송두리째 흔들었습니다. 사랑의 만찬, 구속의 식탁 한가운데 배신자가 있다는 사실은, 얼마나 인간의 본성이 연약한지를 적나라하게 드러냅니다.
제자들은 각기 자기를 돌아보며 “주여, 나는 아니지요?”라고 묻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두려운 인간의 심리를 엿보게 됩니다. 그들은 스스로도 자신의 믿음을 장담할 수 없었습니다. 오웬(John Owen)은 “우리 안에는 죄의 씨앗이 있고, 그 씨앗이 자라면 누구든 유다와 같아질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인간의 연약함은 자각 없는 순간에도 죄를 향해 기울 수 있는 본성을 내포하고 있습니다.
놀랍게도 예수님은 유다의 배신을 “인자는 이미 정한 대로 가거니와”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예언의 성취를 넘어,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이루어질 메시아의 고난을 설명합니다. ‘정한 대로’라는 표현은 헬라어 “ὡρισμένον(호리스메논)”으로, 이는 하나님의 작정하심을 뜻하는 말입니다. 아무리 사탄이 역사하고, 인간이 배신해도 하나님의 뜻은 결코 꺾이지 않습니다. 불링거는 이 본문을 주석하며, “하나님의 예지는 인간의 자유를 부정하지 않으나, 그의 작정은 항상 우선한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하신 예수님의 말씀은, 하나님의 주권 아래 인간의 책임이 여전히 존재함을 보여줍니다. 칼뱅은 이 긴장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작정이 인간의 책임을 제거하지 않는다고 강조합니다. 유다는 선택의 책임이 있으며, 그 책임은 결코 하나님의 계획으로 합리화되지 않습니다.
전체 마무리
누가복음 22:1-23의 본문은 인간의 배신과 하나님의 은혜가 동시에 놓인 만찬의 장면을 통해 복음의 깊이를 다시금 조명합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식탁에 참여한다는 것은 단지 떡과 포도주를 받는 의식을 넘어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마주한 채 그리스도의 은혜를 입는 사건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아셨고, 배신자 유다까지도 식탁에 앉게 하셨습니다. 이는 단지 방임이 아니라, 끝까지 회개할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의 자비였으며, 그 자비조차 거절한 인간의 완고함은 더욱 큰 책임을 불러일으킵니다.
오늘 우리가 예배 가운데 성찬에 참여할 때마다, 주님의 떡과 잔을 받는 손이 과연 정결한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지만 동시에, 우리가 떡을 받을 자격이 있어 받는 것이 아님을 기억해야 합니다. 마르틴 루터는 “우리는 자격이 있어서 성찬을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필요를 느끼기에 그것을 받는다”고 말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유월절은 단순한 전통의 반복이 아닌, 새 언약의 시작이었습니다. 배반의 손도, 연약한 입술도 은혜로 감싸 안는 이 식탁 위에서,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의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 십자가는 지금도, 여전히 우리를 위해 피 흘리셨던 그분의 사랑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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