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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누가복음 22:24-38 묵상, 섬기는 자로 오신 왕

by 파피루스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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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 앞에서 배우는 섬김과 싸움의 자리

누가복음 22:24-38은 최후의 만찬 직후의 장면입니다. 이 본문은 영광을 꿈꾸는 제자들과 섬김을 강조하시는 주님, 또 고난을 준비하는 그리스도와 그 곁에서 허둥대는 제자들의 모습이 교차합니다. 우리 삶의 자리를 비추는 영적 거울이자, 십자가의 길을 걸어가는 제자의 정체성을 깊이 되새기게 하는 말씀입니다.

위대한 자를 향한 잘못된 열망

예수께서 십자가를 향한 마지막 여정을 앞두고 계신 이 엄중한 시간에, 제자들 사이에서는 “그 중 누가 크냐 하는 다툼”(24절)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참으로 안타까운 장면입니다. 사랑의 만찬이 끝난 그 자리에서조차, 제자들의 마음은 여전히 세상적 영광과 서열 다툼에 사로잡혀 있었던 것입니다. 헬라어로 ‘다투다’는 “φιλονεικία(필로네이키아)”로, 감정적이고 완강한 논쟁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의견 차이를 넘어서 권력욕의 노출을 의미합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타락한 본성, 곧 '자기 중심성'이 얼마나 뿌리 깊은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사역을 직접 보고 들은 제자들조차, 영광을 좇는 세상의 패러다임에서 쉽게 벗어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장면을 해설하며, “인간의 마음에는 성령의 은혜가 스며들기 전까지 세상의 영광에 대한 갈망이 깊이 박혀 있다”고 말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세상의 통치 방식과 하나님 나라의 질서가 정반대임을 가르치십니다. “이방인의 임금들은 그들을 주관하며, 그 집권자들은 은인이라 칭함을 받으나 너희는 그렇지 않을지니”(25-26절). 예수님은 세상의 권력자들이 ‘주관한다(κυριεύουσιν, 퀴리에우신)’는 단어를 사용하여 그들이 지배하고 군림하는 구조임을 밝히시고, 제자들에게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한다”고 명하십니다.

이 말씀은 그리스도의 공동체가 어떤 질서로 운영되어야 하는지를 명확히 제시합니다. 교회는 세상의 권력 구조를 모방해서는 안 됩니다. 오히려 십자가 아래에서 모두가 서로를 섬기는 형제자매로 서야 합니다. 칼뱅은 이 구절을 주석하며, “하나님의 나라는 겸손 위에 세워지고, 진정한 리더십은 섬김 속에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이처럼 예수님은 역설적인 진리를 통해 제자들의 시선을 높이에서 아래로, 지배에서 섬김으로 바꾸십니다.

섬기는 자로 오신 왕, 우리 중에 계시다

예수님께서는 이어서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27절)고 하시며, 자신의 본을 보여주십니다. 이 말씀은 요한복음 13장에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장면과 함께 떠오릅니다. 헬라어 ‘섬기는 자’는 ‘διακονῶν(디아코논)’인데, 이는 음식을 나르고 뒷정리를 도맡던 종의 역할을 의미합니다. 왕이신 예수께서 스스로 종의 자리를 선택하셨다는 이 선언은, 신학적으로도 깊은 감동을 줍니다.

초대 교부 요한 크리소스톰은 이 장면에 대해 “하늘의 왕이시며 천군 천사로부터 예배받는 주님께서 제자들 사이에 서서 그들보다 낮은 자의 옷을 입으셨다”고 했습니다. 이는 단지 겸손을 연기하신 것이 아니라, 그분의 본성과 구속 사역 전체를 드러낸 핵심입니다.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제자들의 연약함을 꾸짖기보다, 그들을 품으시고 “내 나라에 너희를 위하여 한 상을 차린 것 같이 너희로 내 나라에 있어 앉아 먹고 마시며 보좌에 앉아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다스리게 하리라”(30절)고 약속하십니다. 이 구절은 종말론적 소망을 담고 있습니다. 여기서 ‘나라(βασιλεία)’는 미래적 차원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의미하며, ‘보좌에 앉는다’는 표현은 통치의 참여를 상징합니다.

이 장면은 은혜의 절정입니다. 영광을 다투던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오히려 ‘하늘의 상’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공로 때문이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로 주어지는 언약의 은혜입니다. 청교도 신학자 윌리엄 거널은 “하나님은 우리의 실수를 기준으로 약속을 취소하지 않으신다”고 했습니다. 인간의 불완전함보다 크신 하나님의 언약이 제자들에게 여전히 유효하다는 사실은, 오늘 우리에게도 깊은 위로와 도전이 됩니다.

넘어짐을 아시되 믿음을 위해 기도하신 주님

이어서 베드로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이어집니다. “시몬아 시몬아, 사탄이 밀 까부르듯 하려고 너희를 청구하였다”(31절). ‘청구하다’는 헬라어 ‘ἐξῃτήσατο(엑세이테사토)’는 법적 용어로, 권리를 주장하다 혹은 강하게 요청하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사탄이 하나님께 베드로를 시험할 기회를 요구했다는 뜻으로, 욥기 1장과 유사한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실패를 미리 아시면서도, 그를 책망하시지 않고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32절)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베드로가 결국 실패하겠지만, 그 믿음 자체는 주님의 중보로 보존될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칼뱅은 “그리스도는 자신의 기도를 통해 성도의 구원을 붙드시며, 믿음이 꺼지지 않도록 은혜의 불씨를 지키신다”고 해석합니다.

베드로는 “주여, 내가 주와 함께 옥에도 죽는 데에도 가기를 각오하였나이다”(33절)라고 담대히 말하지만, 예수님은 “오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부인하리라”고 하십니다. 인간의 자기 신뢰가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이 장면은 우리 신앙의 실체를 깊이 돌아보게 합니다. 참된 믿음은 우리의 결단이 아니라, 예수님의 중보 기도에 의해 유지된다는 진리를 여기서 배웁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단순히 넘어짐을 예고하신 것이 아니라,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은 회복 이후 사명을 부여하시는 은혜의 약속입니다. 하나님은 넘어짐을 통하여 우리를 낮추시고, 다시 일으키시어 다른 이들을 세우는 자로 사용하십니다. 어거스틴은 “하나님은 우리의 부끄러움을 통해 우리를 가장 낮추시고, 그 자리를 사명의 자리로 삼으신다”고 했습니다.

전체 마무리

누가복음 22:24-38은 인간의 본성과 하나님의 은혜, 실패와 회복, 섬김과 영광에 대한 놀라운 대비를 담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위대한 자가 되려 다투었고, 자신들의 신념을 과신했으며, 세상의 방식으로 하나님 나라를 이해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제자들 곁에서 묵묵히 종의 자리를 택하시고, 고난의 길을 준비하시며, 그들의 믿음을 위하여 기도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우리도 여전히 영광을 꿈꾸며 경쟁하고, 실패를 반복하며 넘어지지만, 예수님은 우리를 포기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붙들어 주십니다. 그분은 세상의 임금들과 다르게 다스리시는 분이며, 섬김으로 다스리시고, 낮아지심으로 우리를 일으키시는 왕이ㅅㅂ니다.

예수님은 단지 제자들의 교사를 넘어서, 믿음의 창시자이자 완성자가 되십니다. 그분의 섬김은 우리에게 참된 리더십의 본을 보이시며, 그분의 기도는 우리 믿음의 닻이 됩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붙들고, 매일의 삶에서 주님을 닮은 섬김의 사람, 회복의 사람, 말씀 위에 굳건히 서는 제자로 살아ㄴ야 합니다.

십자가를 앞두신 예수님의 말씀은 지금 이 순간에도 우리에게 들려오고 있습니다. “나는 섬기는 자로 너희 중에 있노라.” 이 음성을 따라, 오늘도 우리가 먼저 낮아지고 먼저 용서하며, 먼저 기도하는 자리로 나아가기를 바랍니다. 그 길 끝에는, 주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의 상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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