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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역사서/여호수아

[여호수아 강해] 4. 2:15-24 붉은 줄로 표시하라

by 파피루스 2019. 7. 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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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수아 강해] 4. 2:15-24 붉은 줄로 표시하라

 

 

 

[본문 읽기]

 

2:15 라합이 그들을 창문에서 줄로 달아 내리니 그의 집이 성벽 위에 있으므로 그가 성벽 위에 거주하였음이라

2:16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

2:17 그 사람들이 그에게 이르되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이 맹세에 대하여 우리가 허물이 없게 하리니

2:18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

2:19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2:20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 하니

2:21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2:22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

2:23 그 두 사람이 돌이켜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 눈의 아들 여호수아에게 나아가서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하고

2: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강해]

 

아마도 여호수아 3장만큼 난해한 장도 없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1장에서 ‘사흘’(1:11)이란 단어와 2장에서의 ‘사흘’(22절)이 전혀 어울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는 여호수아를 기록한 저자만의 독특한 신앙관이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여호수아 1장 1-9에 담긴 서론에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은 여호수아을 위로하고 명령합니다. 그 말씀에 대한 여호수아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 내러티브가 끝난 다음 곧바로 여호수아가 일어나 관리들에게 요단강을 준비하도록 명령합니다. 여호수아 1:1-9은 2장에서 있었던 두 정탐군이 여리고로 들어간 사이에 일어난 것으로 보입니다. 2장을 1:9과 10절 사이에 집어넣으면 모든 것들이 다 해결됩니다. 여호수아 기자는 아마도 1장을 보강하기 위해 2장을 정교하게 기록한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두 정탐꾼은 라합에 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여호수아로 하여금 가나안 정복에 대한 두려움을 사라지게 합니다.

 

15-21 정탐꾼의 경고

22-24 정탐꾼의 보고

 

1. 집 안에 있으라.

 

라합은 두 정탐꾼을 밧줄을 통해 내 보냅니다. 라합의 집은 성벽 위에 있습니다. 다행히 그로인해 정탐꾼들이 쉽게 들어가고 탈출할 수 있었습니다. 성벽에 집이 있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입니다. 분명한 것은 사회의 중심이 아니라 천민이었고, 소외 계층인 것은 분명합니다. 라합이 나가는 그들에게 충고합니다. 뒤쫓는 사람들과 마주칠 수 있으니 산으로 가서 사흘 동안 숨어 있으라고 말합니다.(16절)

 

정탐꾼들은 라합에게 경고합니다.

“우리를 달아 내린 이 창문에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들을 이곳에 모으라. 문 밖에 나가면 책임질 수 없다.”

 

라합과 그들의 가족이 안전을 제공받을 수 있는 조건은 ‘라합의 집 안’에 머무는 거입니다. 또한 그 집 창문에 표시를 두어야 합니다. 이는 붉은 줄을 곧장 예수님의 피로 연결하지만 약간 무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문’은 유월절과 깊은 연관이 있다는 것은 맞습니다. 문안에 있어야 책임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죽음의 사자가 애굽을 덮칠 때 어린 양의 피를 문설주를 발라 문안으로 죽음의 천사가 들어오지 못하게 합니다. 이것은 언약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을 때 어떤 저주도 받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들어오지 못합니다. 이것이 보혈의 능력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본다면 라합의 표시는 그리스도 안에 있어야 한다는 신약적 의미를 어느 정도 내포한다고 봐야합니다.

 

2. 창문의 붉은 줄

 

두 정탐꾼은 라합에게 두 번째 조건을 내세웁니다. 그것은 ‘창문에 붉은 줄을 매는 것’입니다.(18절) 창문은 반드시 두 정탐꾼을 내린 창문이어야 합니다. 라합은 그들을 보낸 후 붉을 줄을 창문에 매 답니다.(21절)

 

붉은 줄은 라합과 두 정탐꾼만이 아는 사실입니다. 아무도 모릅니다. 둘 사이의 약속은 매우 은밀하고, 배타적입니다. 붉은 줄은 그리스도와 성도와의 은밀한 신앙의 경험과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도를 체험할 때 우리는 복음의 신비를 깨닫게 됩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이 거듭났는지 알지 못합니다. 아무리 겉으로 보기에 건실하고 도덕적이라할지라도 부도덕하고 악한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은 속여도 하나님은 절대 속일 수 없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바른 신앙을 가진 이들은 반드시 붉은 줄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줄이 왜 그곳에 있는지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과 거듭난 성도만이 압니다.

 

 

3. 정탐꾼의 보고

 

여리고 왕이 정탐꾼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곧바로 추적시킵니다. 그러나 추적자들이 찾지 못하고 되돌아갑니다. 그들은 산에서 정확하게 ‘사흘을’(22절) 머물다가 이스라엘이 머물고 있는 싯딤의 여호수아에게 갑니다. 산에서 내려와 강을 건너는 장면은 앞으로 일어날 전쟁의 한 장면처럼 보입니다.

 

그들은 그들이 겪은 ‘모든 일을’ 고합니다. 그 모든 일의 근거는 라합이 알려진 사실에 의한 것입니다.

 

2:24 또 여호수아에게 이르되 진실로 여호와께서 그 온 땅을 우리 손에 주셨으므로 그 땅의 모든 주민이 우리 앞에서 간담이 녹더이다 하더라

 

그들은 실제로 여리고 백성들을 직접 만나지 못했습니다. 오직 라합의 이야기를 통해 전해들은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들의 보고와 믿음은 라합의 보고와 믿음에 속한 것입니다. 라합의 믿음이 그들에게 전이되어 용기와 담대함을 허락해 준 것입니다. 이제 모세 때의 열 정탐꾼의 보고와 비교해 봅시다.

 

“31그와 함께 올라갔던 사람들은 이르되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하고 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33 거기서 네피림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을 보았나니 우리는 스스로 보기에도 메뚜기 같으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았을 것이니라” (민 13:31-33)

 

현저히 다르다는 것을 발견합니다. 사실 열 정탐꾼은 라합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은 상관하지 않았습니다. 라합의 믿음의 고백이 비록 두 정탐꾼에게 위로를 주기를 했지만, 그 믿음은 두 정탐꾼의 것이기도 합니다. 두 정탐꾼은 여호수아에게 용기를 북돋아 줍니다. 이제 모든 준비가 끝이 났습니다.

 

마치면서

 

라합은 위대한 믿음의 여인이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걸고 기꺼이 두 정탐꾼을 숨겨주었습니다. 라합은 매우 천하고 가치 없는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녀는 그 누구보다 아름다운 눈을 가졌고, 용맹함을 지녔습니다. 두 정탐꾼을 통해 우리는 성도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배웁니다. 먼저는 항상 그리스도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지 않다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두 번째는 성도는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신비와 배타적 은밀성을 지녀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은 이해할 수 없는 비밀을 간직해야 합니다. 마지막으로 한 사람의 믿음은 다른 사람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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