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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요한계시록 3:14–22 묵상

by 파피루스 2025. 6.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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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 밖에 서신 주님의 부르심: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마지막 권면

요한계시록 3:14–22은 아시아 일곱 교회를 향한 메시지 중 마지막 부분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음성입니다. 주님은 이 교회를 책망하시되, 어떤 칭찬도 없이 오직 회개를 촉구하십니다. 그들의 타협적이고 미지근한 신앙, 그리고 자족적인 태도는 주님의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문 밖에 서서 두드리며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본문은 현대 교회가 얼마나 쉽게 형식과 물질에 안주할 수 있는지를 경고하며, 참된 회개와 교제를 회복하라는 주님의 사랑의 외침입니다.

아멘이시며 창조의 근본이신 이의 음성

14절에서 주님은 자신을 “아멘이시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시요 하나님의 창조의 근본이신 이”로 소개하십니다. ‘아멘’은 히브리어 어원 그대로 ‘확실함’, ‘진실함’을 의미하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약속을 완전하게 성취하신 분이심을 강조합니다. ‘충성되고 참된 증인’은 그분의 말씀이 결코 거짓이 없고, 심판과 구원에 대한 증거가 완전하다는 의미입니다. ‘창조의 근본’(archē tēs ktiseōs tou theou, ἀρχὴ τῆς κτίσεως τοῦ θεοῦ)은 그리스도께서 피조물 중 첫 번째가 아니라, 창조의 근원이며 주권자이심을 말합니다(요 1:3, 골 1:15–17).

이러한 자기 계시는 곧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가 얼마나 그리스도의 본성과 어긋나 있는지를 강조하는 장치로 사용됩니다. 그들은 스스로를 부요하다고 여겼지만, 주님 앞에서는 참 진리에서 멀어진 자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본문은 매우 날카로운 진단이면서도, 동시에 참된 구원자께서 마지막까지 주시는 자비의 외침이기도 합니다.

미지근한 신앙과 자기기만의 위험

15절에서 주님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고 하시며, 라오디게아 교회의 상태를 ‘미지근함’으로 진단하십니다. 당시 라오디게아 지역은 뜨거운 온천과 차가운 샘이 인근 도시에 공급되었고, 라오디게아는 수로를 통해 물을 끌어오다 보니 물이 미지근하고 불쾌한 상태가 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이 지역적 배경은 곧 이 교회의 영적 상태를 직설적으로 드러내는 데 사용된 것입니다.

‘미지근하다’(chliaros, χλιαρός)는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상태, 즉 열정도 없고 냉철한 회개도 없는 타협적이고 무감각한 신앙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고 하십니다. 이는 차가운 회의주의자보다 형식에 안주한 명목상 신자가 오히려 더 위험하다는 뜻입니다. 그 결과 “네가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16절)고 선언하십니다. ‘토하다’(emeō, ἐμέω)는 신약성경 전체에서 유일하게 사용된 단어로, 주님의 거부와 구역질나는 심정을 그대로 표현한 강력한 언어입니다.

17절에서 그들의 자기기만적 태도가 드러납니다.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고 말하나, 실제로는 “곤고하고 가련하며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자”입니다. 이는 물질적 풍요 속에 영적 빈곤이 가려져 있던 상태를 의미하며, 그들은 자신의 영적 상태를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곤고하다’(talaipōros, ταλαίπωρος)는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를 말하며, ‘가난하다’(ptōchos, πτωχός)는 완전히 무력하고 의존적인 자를 뜻합니다. 주님은 이 교회가 스스로를 진단하는 것과, 하나님께서 보시는 실체 사이의 괴리를 드러내십니다.

이러한 상태를 향해 주님은 직접적인 해결책을 제시하십니다. 18절에서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며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고 하십니다. ‘불로 연단한 금’은 진정한 믿음을 의미하며(벧전 1:7), ‘흰 옷’은 의의 옷, 구속받은 자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안약’은 라오디게아 지역이 안약 제조로 유명했던 배경을 반영하면서, 영적 통찰과 깨달음의 회복을 요구하는 상징으로 사용됩니다.

19절에서 주님은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며 징계하노니”라고 하시며, 이 모든 경고가 사랑에서 비롯된 것임을 밝히십니다. ‘책망하다’(elenchō, ἐλέγχω)는 죄를 드러내어 바르게 하기 위함이며, ‘징계하다’(paideuō, παιδεύω)는 아버지가 자녀를 교육하듯이 교정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주님의 진노는 파괴를 위한 것이 아니라, 회복을 위한 자비의 도구입니다.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는 말은 더 이상 미지근하게 살지 말고, 뜨거운 마음으로 돌아오라는 절박한 요청입니다.

문 밖에 서 계신 주님의 초대

20절은 이 본문 전체의 중심이자 절정입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와 더불어 먹고 그는 나와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종종 전도용 본문으로 사용되지만, 실제로는 교회 안의 신자에게 주시는 말씀입니다. 즉,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 밖에 계시며, 그들에게 다시 들어가기를 원하십니다.

‘두드리다’(krouō, κρούω)는 반복적이고 지속적인 행동을 의미하며, 주님의 인내와 기다림이 담긴 행동입니다. 이 장면은 구약에서 여호와께서 그의 백성을 향해 자비로 부르시는 모습들과 깊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문을 열면 주님은 들어오셔서 교제하시며, ‘먹는다’는 것은 히브리 문화에서 친밀한 교제를 의미합니다. 이는 회복된 관계, 영적 친밀감, 잃어버린 첫사랑의 회복을 상징합니다.

21절은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내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 같이 하리라”고 하십니다. 이는 계시록 전체에서 반복되는 ‘이기는 자’에 대한 가장 영광스러운 약속 중 하나입니다. ‘보좌에 함께 앉는다’는 것은 단지 구원 이상의 의미로, 왕적 권세와 통치, 메시아적 승리에의 참여를 의미합니다. 이는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부끄러움 가운데 있던 자들도 회개하고 주님과 다시 동행하면 가장 높은 영광에 참여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놀라운 복음입니다.

마지막 22절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을지어다”는 일곱 교회에 반복된 결론입니다. 이 말씀은 단지 라오디게아 교회에 국한되지 않으며,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에게 향한 보편적 명령입니다. 듣는 자만이 회개할 수 있으며, 회개하는 자만이 회복될 수 있습니다.

마무리

요한계시록 3:14–22은 가장 치명적인 상태에 있던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한 예수님의 책망이자, 동시에 가장 따뜻한 초청의 말씀이기도 합니다. 그들은 부요하다고 자만했지만, 실상은 가장 가난한 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여전히 문 밖에서 기다리시며, 그들과 교제하기를 원하십니다. 이 말씀은 모든 시대의 교회와 성도가 자기기만에서 벗어나 진실로 회개하고, 주님과 다시 친밀히 동행할 것을 촉구합니다. 회개는 곧 회복의 문이며, 미지근한 신앙에서 뜨거운 헌신으로 전환하는 길입니다. 주님의 음성을 듣고 문을 여는 자는, 주님의 보좌에 함께 앉는 영광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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