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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약 선지서

이사야 53:5 강해,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

by 파피루스 2025. 4.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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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라

이사야 53장 5절은 구약 전체를 통틀어 복음의 심장이라 부를 수 있을 만큼, 메시아의 고난과 그 고난의 대속적 의미를 가장 밀도 있게 함축하고 있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구속사의 핵심을 향해 우리를 이끌며,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어떻게 십자가에서 만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은 단순한 희생이 아니라, 반드시 필요했던 속죄의 대가였으며, 죄인된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가장 진지한 사랑의 표현이었습니다. 이 한 절의 말씀 속에는 우리의 허물과 죄악, 하나님과의 평화, 치유와 회복이라는 전 우주적 복음의 중심 메시지가 담겨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본문을 대할 때 우리는 단순한 신학적 고찰을 넘어, 우리 삶의 실체와 구원의 깊이를 다시 바라보게 됩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찔림’(מְחֹלָל, mecholal)은 히브리어에서 창이나 칼 같은 날카로운 도구에 의해 깊게 베이거나 관통당하는 고통을 표현합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창에 찔리셨던 장면을 명확하게 떠올리게 하며, 그 찔림이 단순한 육체적 상처를 넘어 우리 영혼의 죄를 대속하시기 위한 고통임을 보여줍니다. 복음서에 기록된 로마 병사의 창에 찔린 사건은 단지 우연이 아니라, 이사야의 예언이 철저히 성취된 사건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찔림의 원인은 누구 때문이었습니까? 바로 우리의 허물 때문이었습니다. ‘허물’(פֶּשַׁע, pesha)은 단순한 실수나 약함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한 의도적 반역과 고의적인 죄악을 의미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하나님을 떠났고, 그 결과는 심판이어야 했습니다. 우리는 죄에 대해 책임져야 했고, 그 책임의 대가는 피흘림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그 피를 우리 대신 흘리셨습니다. 그분은 무고하신 분이셨지만, 반역자와 같은 대우를 받으셨고, 십자가 형벌로 죽임을 당하셨습니다. 이는 단순한 동정이 아니라, 철저한 대속이었습니다.

 

이 대속의 의미는 신약 전반에 걸쳐 반복해서 강조됩니다. 베드로전서 2장 24절은 “친히 나무에 달려 그 몸으로 우리 죄를 담당하셨으니”라고 말하며, 이사야 53장의 예언이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속에서 온전히 성취되었음을 선포합니다. 예수님의 찔리심은 우리가 받아야 할 심판을 대신한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허물이 없었다면 그 찔림도 없었을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 찔림은 사랑과 동시에 경고입니다. 죄는 가볍지 않으며, 그 죄를 위해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찌르시는 아픔을 선택하셨습니다.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상함’(דָּכָא, daka)은 으깨지고 분쇄되는 상태를 묘사합니다. 이는 단지 겉으로 드러나는 고통이 아니라, 내면 깊은 곳까지 부서지는 고통입니다. 예수님께서 당하신 고난은 단순한 신체적 고통이 아니라, 영혼 깊은 곳까지 겪으신 절대적 외로움과 수치, 하나님의 진노 아래 놓인 자의 슬픔이었습니다. 십자가 위에서 외치신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라는 절규는, 우리 죄악으로 인한 단절의 깊이를 대변합니다.

 

여기서도 상함의 이유는 우리 때문입니다. ‘죄악’(עָוֹן, avon)은 단지 행동의 잘못을 넘어서, 인간 존재의 내면 깊숙한 부패함과 타락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죄를 행동으로만 이해하지만, 성경은 죄를 본성의 문제로 다룹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하나님을 거스르며, 그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는 자들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 죄의 본질까지도 대신 짊어지셨습니다.

 

이 장면을 우리는 복음서에서 분명히 보게 됩니다. 예수님은 침묵으로 채찍을 맞으셨고, 머리에 가시관을 쓰셨으며, 온갖 조롱과 침 뱉음을 당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 죄악의 무게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이 땅에서 가장 낮은 자리까지 내려가신 이유는 바로 이 죄악의 짐을 짊어지기 위함이었습니다. 그의 상함은 결코 우연이 아니라, 하나님이 예정하신 구속의 계획이었습니다.

 

칼빈은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감당하신 고난은 단순한 동일시가 아니라, 실제로 그 죄의 형벌을 담당하신 것이다. 그의 상함은 공의의 요구에 대한 충족이었다." 우리는 이 상함을 볼 때마다 죄의 심각성과 동시에 구원의 깊이를 다시 묵상해야 합니다. 그 상함이 없었다면, 우리의 용서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이 절은 교환의 복음을 가장 아름답고 깊이 있게 선언합니다. 한 분이 징계를 받으셨고, 그 대가로 우리가 평화를 얻었습니다. 한 분이 채찍에 맞으셨고, 그 결과로 우리가 나음을 얻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복음의 원리입니다.

 

‘징계’(מוּסָר, musar)는 단순한 형벌만을 뜻하지 않고, 교육적 의미를 내포한 고통입니다. 이는 하나님의 공의가 우리를 향해 쏟아졌다면 우리가 감당해야 했을 고통을 예수님께서 대신 감당하셨다는 뜻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평화를 주셨습니다. 이 평화는 단순한 감정의 안정이나 문제 없는 상태가 아닙니다. ‘샬롬’(שָׁלוֹם)은 관계의 회복, 내면의 치유, 공동체의 화해, 전인격적인 안정을 포괄하는 풍성한 단어입니다.

 

예수님의 징계는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하게 만들었고, 이는 로마서 5장에서 사도 바울이 말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자"는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그는 진노의 대상이 되어 우리를 평화의 자리로 옮기셨습니다. 그 평화는 세상이 줄 수 없는 평화이며, 외부의 조건과 상관없는 하늘의 은혜입니다.

 

‘채찍’(חַבּוּרָה, chabburah)은 살이 찢기고 피가 흐를 정도의 심한 매질을 뜻합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채찍에 맞으셨고, 그 상처로 인해 우리는 ‘나음’(רָפָא, rapha), 곧 전인격적인 치유를 입었습니다. 이 나음은 육체적인 병만이 아니라, 영혼의 회복, 마음의 상처, 하나님과의 단절로 인한 모든 고통의 치유를 포함합니다. 그의 고통은 우리의 회복이 되었고, 그의 상처는 우리의 새 생명이 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구절은 베드로전서 2장 24절을 통해 다시 인용되며, 초대교회 성도들에게 예수님의 고난이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우리의 삶을 바꾸는 현재적 능력임을 증언합니다. 그 고난은 한순간의 비극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 가운데 진행된 구속의 절정이었습니다.

 

결론

이사야 53장 5절은 단순히 예언적 언어를 넘어, 십자가 복음의 정수를 담고 있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고난이 얼마나 구체적이며, 철저하게 우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분은 찔리셨고, 상하셨으며, 징계를 받으셨고, 채찍에 맞으셨습니다. 그 모든 고난의 이유는 단 하나, 우리 때문이었습니다.

이 진리를 믿는다는 것은 단순한 지적 동의가 아닙니다. 그것은 내 삶을 돌아보게 하며, 내 죄를 깊이 깨닫게 하고, 동시에 그 사랑 앞에 무릎 꿇게 합니다. 우리는 더 이상 정죄 아래에 있지 않으며, 예수님의 고난 덕분에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고, 영혼의 깊은 곳에서 치유를 경험하는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오늘도 이 말씀 앞에 머무르십시오. 그리고 그 고난이, 그 찔림이, 그 징계가, 그 채찍이 누구를 위한 것이었는지를 기억하십시오. 바로 나를 위한 것이었고, 당신을 위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매일 그 은혜 안에 살아가고 있으며, 그 사랑에 응답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나타난 그리스도의 사랑은 지금도 우리를 새롭게 하며,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구속사를 계속 이루어 가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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