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닭 울음 속의 눈물, 진리 앞의 침묵
누가복음 22:54-71은 예수님께서 체포되신 이후의 심문 장면과, 베드로의 세 번 부인 사건이 함께 등장하는 본문입니다. 인간의 약함과 하나님의 계획, 그리고 진리를 향한 저항이 교차하는 이 장면은, 우리 자신의 믿음을 돌아보게 하고 그리스도의 침묵 속에서 들리는 복음의 메시지를 다시 생각하게 합니다.
멀찍이 따르던 베드로, 무너지는 자의 자리
“예수를 잡아 끌고 대제사장의 집으로 들어갈새 베드로가 멀찍이 따라가니라.”(54절)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인간의 두려움과 애매한 충성심 사이에서 갈등하는 한 제자의 내면을 마주하게 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완전히 떠나지 않았지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한 채 ‘멀찍이’ 따릅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이 표현은 ‘μακρόθεν(마크로덴)’인데, 물리적 거리뿐 아니라 정서적 거리감을 함께 드러내는 단어입니다.
불을 피우고 둘러앉은 사람들 틈에 앉아 있던 베드로는 자신이 예수의 제자임이 드러날까 두려워 세 번이나 그를 부인합니다. 처음에는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느니라”는 말에 “나는 그를 알지 못하노라”고 답하고(57절), 두 번째는 “너도 그 도당이라”는 비난에 “나는 아니라”고 단호히 부인합니다(58절). 마지막으로는 한 시간쯤 지나 어떤 사람이 “그는 갈릴리 사람이라” 말하자, 베드로는 “나는 네 말 하는 것을 알지 못하노라”고 반복하여 거짓을 말합니다(60절).
이 일련의 부인은 단순한 실수가 아니라, 의식적인 자기보호 본능과 두려움 속에서 이루어진 행위입니다. 칼뱅은 이 본문을 해석하며, “베드로는 믿음을 가졌으나, 인간의 연약함에 사로잡혀 순간적으로 그 믿음을 숨겼다”고 말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대로 닭이 울기 전에 세 번 부인했고, 그 순간 주께서 “돌아보심”(61절)으로 베드로의 마음을 깨우십니다. 이 돌아보심은 히브리어 전통의 ‘하나님의 얼굴을 향하심’을 떠올리게 합니다. 단지 시선이 아니라, 사랑과 기억, 그리고 회복의 의지를 담은 하나님의 응시입니다.
예수님의 이 ‘돌아보심’은 비난이 아니라, 자비ㅇ입니다. 매튜 헨리는 “그리스도의 눈은 책망보다 은혜의 창으로 작용한다”고 주석합니다. 베드로는 그 눈빛 속에서 자신의 허물을 보고, 밖에 나가서 통곡합니다(62절). 그 통곡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참된 회개의 열매입니다. 어거스틴은 “참된 눈물은 은혜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했습니다. 이는 베드로가 주님의 시선을 통해 자신을 다시 보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오늘 우리도 베드로와 같습니다. 주님을 사랑한다고 말하면서도, 세상의 불 앞에서는 그분을 모른다고 말하게 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런 우리를 외면하지 않으시고, 돌아보십니다. 그분의 시선은 실패한 자를 다시 일으키시는 회복의 시작입니다. 우리가 그 시선을 외면하지 않고 받아들일 때, 진정한 회개의 길이 열립니다.
조롱당하시는 왕, 침묵하시는 진리
이어지는 본문에서는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에서 조롱과 모욕을 당하시는 장면이 나옵니다. “지키는 사람들이 예수를 희롱하고 때리며”(63절)라는 구절에서 우리는 메시아로 오신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죄인들에 의해 취급되셨는지를 보게 됩니다. ‘희롱하다’는 헬라어 ‘ἐμπαίζω(엠파이조)’는 단순한 장난을 넘어서, 악의적인 조롱과 멸시를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눈을 가리고 “선지자 노릇 하라”고 외칩니다(64절). 이는 예언자로서의 예수님의 정체성을 조롱하고, 그분의 능력을 시험하려는 시도였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십니다. 침묵은 종종 무력함의 상징처럼 여겨지지만, 여기서는 능동적인 순종과 고난 수용의 표현입니다. 이사야 53장에서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 같이 입을 열지 아니하셨다”(사 53:7)는 예언은 이 침묵 속에서 성취되고 있습니다.
불링거는 이 침묵을 두고 “하나님은 때로 말씀보다 침묵으로 더 깊은 진리를 드러내신다”고 했습니다. 예수님은 자기변명이나 반격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 속에서 하나님의 뜻에 완전히 복종하십니다. 우리는 종종 억울함 속에서 말로 자신을 변호하려 하지만, 진리는 말이 아니라 존재 자체로 증명됩니다. 예수님은 침묵 가운데 진리 그 자체로 서 계셨고, 그 침묵이 결국 모든 인간의 거짓을 드러내는 빛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의 고난은 단지 육체적 고통에 머물지 않았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조롱당하고, 모욕을 받는 그 시간은 인간이 감당할 수 없는 영적 고통의 시간이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 모든 조롱을 침묵으로 감내하셨고, 결국 그 침묵은 구속의 문을 여는 열쇠가 되었습니다. 참된 믿음은 억울함보다 더 깊은 차원의 신뢰로 주님의 뜻에 순복하는 데서 자랍니다.
공회 앞에서 선언된 정체성, 진리를 향한 대결
“날이 새매 백성의 장로 곧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이 모여서 예수를 그 공회로 끌어다가”(66절)라는 구절은 유대 지도자들의 공식적인 심문을 알리는 말입니다. 공회는 헬라어로 ‘συνέδριον(쉬네드리온)’이며, 유대 최고 종교 재판 기관을 뜻합니다. 그들은 예수께 “네가 그리스도이거든 우리에게 말하라”고 요구합니다(67절). 이는 단순한 질문이 아니라, 이미 결론을 정해두고 몰아세우는 공세적 심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내가 말할지라도 너희가 믿지 아니할 것이요”(67절)라고 답하십니다. 이는 그들의 마음이 이미 닫혀 있음을 아시는 주님의 통찰입니다. ‘믿지 않는다’는 헬라어 ‘πιστεύω(피스튜오)’는 신뢰의 부족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의지를 거부하는 태도를 포함합니다. 그들의 질문은 진리를 알고자 하는 갈망이 아닌, 정죄를 위한 도구에 불과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침묵만을 유지하시지 않고, 자신의 정체성을 분명히 드러내십니다. “이후에는 인자가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에 앉아 있으리라 하시니”(69절). 이 말씀은 다니엘서 7:13과 시편 110:1의 메시아적 예언을 인용한 것으로, 예수님께서 인자이며 심판자이심을 선언하신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권능의 우편’은 단순히 위치의 문제가 아니라, 권위와 주권의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이 대답은 결국 그들의 분노를 불러일으킵니다. “네가 그러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질문에, 예수께서는 “너희들이 내가 그라고 말하고 있다”(70절)고 말씀하십니다. 헬라어 원문은 “Ὑμεῖς λέγετε ὅτι ἐγώ εἰμι(휘메이스 레게테 호티 에고 에이미)”로, 이는 자신을 명확히 드러내면서도 그들의 책임을 동시에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이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고 “더 이상 물을 필요가 없다”(71절)며 그분을 정죄합니다. 하지만 이들의 판단은 진리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자신들의 권력과 체제를 지키기 위한 결론이었습니다. 이 장면에서 우리는 인간이 어떻게 진리 앞에서도 불의한 판단을 내릴 수 있는지를 보게 됩니다. 그리스도를 배척한 이들 가운데에는 종교 지도자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율법을 알고 있었지만 그 율법의 성취이신 예수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칼뱅은 이 본문을 해설하며 “진리 자체가 죄인들의 법정에서 정죄받는 이 장면은 인간의 부패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여준다”고 말합니다. 진리는 때로 거부당하고 조롱받으며 외면당하지만, 결국 그 진리는 스스로 빛을 발하게 됩니다. 예수님의 고백은 인간 재판정에서 정죄되었으나, 하나님의 역사에서는 온 인류를 구원하는 선언이 되었습니다.
전체 마무리
누가복음 22:54-71은 인간의 배신과 두려움, 하나님의 아들의 고난과 진리의 선포가 뒤엉켜 있는 복음의 결정적 순간입니다. 베드로는 두려움 속에서 주님을 부인했고, 예수님은 침묵 속에서 진리를 증거하셨습니다.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진리를 외면한 채 자신들의 체제를 지키기 위해 예수를 몰아세웠고, 예수님은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묵묵히 그 길을 걸으셨습니다.
이 본문은 우리에게 거울과도 같습니다. 우리는 얼마나 자주 베드로처럼 주님을 알고 있다고 하면서도, 실제 상황 속에서는 그분을 부인하며 살고 있는지 돌아보게 됩니다. 또한 진리 앞에 서야 할 우리의 삶이, 종종 침묵하거나 타협하며 살아가고 있지는 않은지도 생각해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 본문은 절망이 아니라 소망으로 끝납니다. 베드로는 회복되었고, 예수님의 침묵은 부활의 아침으로 이어졌으며, 거절당한 진리는 결국 인류의 구원이 되었습니다. 우리는 이 말씀 앞에서 다시 한번 기도와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주님의 시선은 여전히 우리를 향하고 있으며, 그 침묵은 지금도 사랑의 언어로 우리를 부르고 있습니다. 진리를 향한 걸음, 그것이 비록 조롱과 고통을 동반할지라도, 결국 그 길 끝에는 영광의 주께서 우리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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