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란한 사랑의 시선, 돌아온 신부를 향한 노래
아가 6:4-13은 사랑하는 자를 향한 신랑의 찬미와, 회복된 관계 속에서 회중과 신부 사이의 교차되는 대화로 구성됩니다. 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향해 품으신 아름다움의 선언이며, 동시에 신자의 회복 이후에 주어지는 하나님의 확증과 공동체의 축복을 담고 있습니다. 사랑은 단지 감정의 정체가 아니라, 언약에 뿌리박은 행동이며, 그 사랑의 눈은 여전히 신부를 바라보고 있습니다.
무흠한 자를 향한 거룩한 찬미
“내 사랑아 너는 디르사 같이 어여쁘고 예루살렘 같이 곱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하구나”(6:4). 신랑은 회복된 신부를 향해 다시 찬미를 시작합니다. ‘디르사’는 북이스라엘의 고대 수도로서 아름답고 우아한 도시였고, ‘예루살렘’은 하나님의 언약이 머문 중심 도시입니다. 이는 신부가 가진 아름다움이 단지 외적인 매력이 아니라, 언약적이고 영광스러운 정체성임을 나타냅니다. 동시에 ‘깃발을 세운 군대’라는 표현은 신부가 그저 사랑스러운 존재일 뿐 아니라, 영적 전쟁 속에서 담대히 서 있는 교회의 상징임을 보여줍니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해석하며 “하나님은 그 백성의 아름다움을 선포하심으로써 그들 안에 담긴 영적 권위를 세우신다”고 강조했습니다.
신랑은 계속해서 말합니다. “네 눈이 나를 놀라게 하니 돌이켜 나를 보지 말라”(6:5). 이는 단순한 부끄러움이 아니라, 사랑의 감격과 경외 속에서 일어나는 놀라움입니다. 사랑하는 자의 눈빛 하나에 감동하시며, 그 시선을 감당할 수 없는 듯 말하시는 주님의 표현입니다. 이는 우리가 주님을 향해 믿음으로 시선을 고정할 때, 주님도 깊은 기쁨과 감동을 느끼신다는 사실을 시적으로 드러냅니다. 불링거는 이를 가리켜 “신자의 작은 믿음의 눈길도 주님의 마음을 흔들 수 있다”고 풀이했습니다.
이어 신부의 아름다움이 계속 묘사됩니다. “네 머리털은 길르앗 산기슭에 누운 염소 떼 같고, 네 이는 목욕하고 나오는 암양 떼 같고”(6:5-6). 이는 아가 4장에서 반복되는 묘사로, 신랑의 사랑이 변함없고 신실함을 상징합니다. 하나님은 신자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다시 품으시며, 그 이전의 사랑을 그대로 회복시키십니다. 칼뱅은 이 구절을 인용하며 “하나님은 실패한 자를 다시 부르실 때, 그를 새롭게 하시되 이전보다 더 깊은 애정으로 회복시키신다”고 말합니다.
“왕비가 육십 명이요 후궁이 팔십 명이요 시녀가 무수하되 내 비둘기, 내 완전한 자는 하나뿐이로구나”(6:8-9). 이 말씀은 특별한 구별의 표현입니다. 아무리 많은 이들이 있어도 신랑에게는 신부가 유일한 존재입니다. 이 ‘하나뿐인’ 사랑은 선택된 교회를 향한 하나님의 전적인 주권과 사랑을 상징합니다. 이는 구약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택하신 것처럼, 신약에서는 교회를 택하셔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언약을 맺으신 사랑의 연속입니다. 이 고백은 성도의 신분을 세상과 비교하지 않게 만들며, “나는 그분께서 택하신 자”라는 깊은 자긍심을 심어줍니다.
신부를 향한 찬미의 노래
“아침빛 같이 뚜렷하고 달 같이 아름답고 해 같이 맑고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자가 누구인가”(6:10). 이 절은 회중이 함께 신부를 바라보며 부르는 찬미의 노래입니다. 이는 신부의 회복이 개인의 기쁨에만 머무르지 않고, 공동체 전체에 기쁨이 되며 존귀함으로 선포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교회는 한 사람의 회복을 함께 기뻐하며, 그 회복을 하나님의 역사의 일부로 고백합니다.
신부는 아침빛처럼 뚜렷합니다. 이는 어두움을 뚫고 나오는 생명의 시작이며, 영적 소생의 빛입니다. ‘달’은 밤을 밝히는 은은한 빛이며, ‘해’는 능동적 생명의 빛을 의미합니다. 즉, 회복된 성도는 주님의 빛을 반사하는 존재에서, 그분의 영광을 직접 드러내는 존재로 자라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런 변화의 과정을 함께 보며 찬송하게 됩니다.
“깃발을 세운 군대 같이 당당한 여인”이라는 반복은, 신자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시 확인시켜 줍니다. 교회는 사랑받는 공동체이자, 동시에 세상 속에 세워진 하나님의 군대입니다. 이는 에베소서 6장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입고 서 있는 신자의 모습과 연결되며, 사랑과 전쟁이 공존하는 영적 삶을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신앙의 회복, 동산으로의 귀환
“골짜기의 푸른 나무들을 보려고, 포도나무가 순이 났는가, 석류나무가 꽃이 피었는가 하고 내가 호두 동산에 내려갔을 때에”(6:11). 이는 신랑의 내면을 묘사하는 구절이지만 동시에 신부의 신앙 회복의 상태를 점검하는 신랑의 애정 어린 순례입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안에 생명의 싹이 트는가, 믿음이 회복되는가를 살피시는 분입니다. 포도나무는 풍성한 열매, 석류는 생명과 정결, 호두는 견고함을 상징합니다. 이 모든 것을 주님은 동산 안, 곧 교회와 성도의 마음속에서 살피십니다.
“나도 모르고 내 마음이 나를 내 귀한 백성의 병거 가운데 이끌었구나”(6:12). 이는 은혜의 주권적 역사입니다. 우리가 계획하지 않았고 의도하지 않았지만,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그의 구속의 길, 사명의 자리로 이끄셨다는 고백입니다. 불링거는 “성도의 모든 진보는 주님의 주권 아래 일어나는 영적 이동”이라 해석합니다. 신자는 어느 날 갑자기 하나님의 손에 의해 자신이 새로운 자리에 이끌려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은혜의 역사입니다.
마지막 구절에서 회중이 다시 신부를 부릅니다. “돌아오고 돌아오라 술람미 여자야 우리가 너를 보게 하라”(6:13). 술람미는 ‘샬롬’에서 파생된 이름으로, 평강의 여인, 혹은 평화로운 자라는 뜻입니다. 이는 회복된 신부의 새로운 이름이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화평을 누리는 교회의 정체성을 상징합니다. 교회는 이제 술람미로 불리며, 세상 앞에 사랑과 평화의 증인으로 서야 합니다. 회중의 외침은 신자의 삶이 세상의 관람과 관심 속에 놓여 있으며, 동시에 그 삶이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역할을 감당해야 함을 의미합니다.
이에 신랑은 응답합니다. “어찌하여 마하나임의 춤을 추는 것을 보는 것처럼 술람미 여자를 보려느냐.” 이는 단순한 구경이 아니라, 신자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을 진정으로 발견하라는 권면입니다. 마하나임은 창세기 32장에서 야곱이 천사의 군대를 본 장소이며, 하나님의 임재가 나타난 자리입니다. 신자의 회복된 삶은 곧 하나님의 임재를 드러내는 현장이 되어야 하며, 세상은 그것을 통해 하나님을 알아가야 합니다.
전체 마무리
아가 6:4-13은 신부의 회복 이후 주님의 찬미와 공동체의 인정을 통해 사랑의 언약이 다시 굳건해지는 과정을 보여줍니다. 실패했던 신부는 여전히 신랑의 눈에 흠 없고 사랑스러운 존재이며, 그 사랑은 이전과 다름없이 온전하게 회복됩니다. 회복된 자는 교회의 찬양 속에 다시 세워지고, 세상 앞에 ‘술람미’라는 새로운 이름으로 등장하게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를 향해 같은 눈으로 바라보십니다. 우리가 넘어지고 머뭇거릴지라도, 회복을 이루신 주님은 다시 우리를 사랑의 동산으로 부르시며, 그 자리에서 찬양과 영광으로 우리의 존재를 덧입히십니다. 우리는 그분의 것입니다. 그리고 그 사랑은 여전히 ‘깃발을 세운 군대’처럼 확고하고 찬란합니다. 오늘도 그 시선 앞에 우리는 다시 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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