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복음-행전

누가복음 11장 강해

by 파피루스 2025. 4. 20.
반응형

누가복음 11장 전체 요약

누가복음 11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주기도문을 가르치시는 장면으로 시작해 기도에 대한 교훈을 중심으로 구성됩니다. 이어 귀신을 쫓아내신 사건과 관련된 논쟁을 통해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의 임재와 자신이 구속자로 오신 목적을 밝히십니다. 표적을 요구하는 세대에게 요나와 솔로몬의 비유를 들어 경고하시고, 빛과 어둠의 눈에 관한 교훈을 주십니다. 마지막으로 바리새인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시며 형식적 종교를 넘어서는 참된 회개와 진정한 경건을 촉구하십니다.

누가복음 11장 구조분석 목록

  1. 주기도문을 가르치심 (11:1–4)
  2. 간청하는 벗의 비유와 기도에 대한 교훈 (11:5–13)
  3. 귀신을 쫓아내심과 바알세불 논쟁 (11:14–23)
  4. 더러운 귀신의 비유 (11:24–26)
  5.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 (11:27–28)
  6. 요나의 표적과 심판의 말씀 (11:29–32)
  7. 몸의 등불 비유 (11:33–36)
  8.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에 대한 책망 (11:37–54)

1. 주기도문을 가르치심 (11:1–4)

누가복음 11장은 제자 중 하나가 예수님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기도를 가르친 것 같이 우리에게도 가르쳐 주옵소서"라고 요청하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11:1). 이에 예수님은 간결하고 깊이 있는 기도의 내용을 가르치십니다. 이 기도는 단순한 형식이 아니라, 구속사의 중심을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나라가 임하시오며"(11:2). 이 첫 구절은 하나님의 성품과 그분의 나라의 임재를 갈망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우리는 기도를 통해 내 욕구를 앞세우는 것이 아니라, 먼저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그분의 통치를 사모하는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것은, 우리가 그 이름에 합당하게 살기를 원하는 헌신의 표현입니다.

"날마다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옵고"(11:3). 이는 생존을 위한 간구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공급하심을 인정하는 신앙의 고백입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나님을 의지하며, 물질의 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고백하게 됩니다. 또한 "우리 죄를 사하여 주옵시며 우리도 우리에게 빚진 자를 사하여 주오며"(11:4)는 구절은 구속사 전체를 요약하는 핵심입니다. 죄 사함은 십자가를 통해 성취될 하나님의 구속을 예비하며, 우리가 받은 용서를 다른 이에게 흘려보내는 삶이 참된 제자의 모습임을 보여줍니다.

마지막으로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옵소서"(11:4)는 고백은, 연약한 우리를 유혹과 타락의 길에서 보호해 달라는 기도입니다. 이는 종말론적 긴장 속에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구하는 자세이며, 우리가 날마다 은혜 없이는 설 수 없음을 고백하는 믿음의 태도입니다.

2. 간청하는 벗의 비유와 기도에 대한 교훈 (11:5–8)

예수님은 이어 기도에 대한 실제적 태도를 가르치시기 위해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에 누가 벗이 있는데 밤중에 그에게 가서 말하기를 벗이여 떡 세 덩이를 내게 빌리라 하겠느냐..."(11:5). 벗은 이미 문을 닫고 자녀들과 함께 누웠으므로 일어나 줄 수 없다고 말하지만, 간청하는 자의 끈질김 때문에 결국 일어나 줄 것이라고 하십니다 (11:6–8).

이 비유는 하나님을 마치 귀찮게 해야 들어주는 존재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간절함과 끈질김이 기도자의 자세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간청을 무시하시는 분이 아니라, 신실하게 응답하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그 응답은 기계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 믿음과 인내를 통해 기다리는 가운데 이루어집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이 비유는, 기도가 단순한 요청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관계 속에서 지속적으로 소통하는 삶임을 드러냅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나를 맞춰가는 과정이며, 하나님의 구속 계획 안에 동참하는 통로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기도는 하나님의 뜻을 이 땅 가운데 이루기 위한 도구이며,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신의 뜻을 우리에게 더욱 분명히 나타내십니다.

3. 찾고 두드리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 (11:9–13)

예수님은 이어 기도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주십니다. "구하라 그러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러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러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니..."(11:9). 이는 기도의 지속성과 확신을 강조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응답은 단번의 요청보다, 간절하고 끊임없는 기대와 신뢰 가운데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아들에게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겠느냐며, 하물며 하늘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11:11–13). 이는 하나님의 응답이 단순히 물질적 피로를 채우는 데 그치지 않고, 구속사적으로 가장 귀한 선물인 성령을 통해 이루어진다는 선언입니다. 성령은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 이후 교회와 제자들에게 주어진 가장 결정적인 구속사의 선물입니다.

기도는 단지 필요를 해결하는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구속사의 방향을 이루기 위한 동역의 자리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기도할 때 무엇을 얻느냐보다, 누구를 믿고 어떻게 구하는지가 더 중요하다고 가르치십니다. 하늘 아버지는 가장 좋은 것을 가장 정확한 때에 가장 적절한 방식으로 주시는 분이십니다.

이 말씀은 제자들에게 기도는 포기하지 않고 계속해야 할 영적 호흡이며, 그 기도를 통해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구속사의 도구로 빚어가신다는 진리를 확인시켜 줍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자로서 오늘도 주님의 뜻을 이루어가야 합니다.

3. 귀신을 쫓아내심과 바알세불 논쟁 (11:14–23)

예수님께서 한 벙어리 귀신 들린 자를 고쳐주시자, 그 사람이 말하게 되어 무리가 놀라게 됩니다 (11:14). 그러나 일부는 예수님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려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요구합니다 (11:15–16). 이 장면은 예수님의 사역이 사람들 사이에서 얼마나 강력한 반향을 일으켰으며, 동시에 얼마나 격렬한 오해와 저항을 불러일으켰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비방에 논리적으로 대응하십니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진다"고 하시며, 사탄이 스스로를 쫓아낸다면 그 나라는 설 수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11:17–18). 이는 예수님의 사역이 사탄의 권세를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권능에 의한 것임을 드러내는 구속사적 해명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심은 그 나라의 침투와 승리의 표지입니다 (11:20).

예수님은 또한 "강한 자가 무장을 하고 자기 집을 지킬 때에는 그 소유가 안전하되 더 강한 자가 와서... 무장을 해제하고 전리품을 나눈다"고 하십니다 (11:21–22). 여기서 '더 강한 자'는 예수님 자신이시며, 사탄의 권세를 깨뜨리고 포로된 자들을 자유케 하시는 구속자의 능력을 말합니다. 결국 예수님의 오심은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실제로 돌입했음을 선포하는 사건이며, 이는 단지 개인의 치유를 넘어 온 인류의 해방을 향한 거대한 구속의 전환점입니다.

4. 더러운 귀신의 비유 (11:24–26)

예수님은 귀신이 사람에게서 나간 후 물 없는 곳을 방황하다가 다시 그 집으로 돌아오려 한다는 비유를 드십니다. 그 집이 비어 있고 청소되어 있으면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리고 들어가 처음보다 더 악하게 된다고 말씀하십니다 (11:24–26). 이는 단순한 귀신 들림의 문제가 아니라, 정결함 이후의 영적 공백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경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비유의 핵심은, 악한 영이 쫓겨난 자리, 곧 하나님의 은혜로 깨끗해진 심령이 그 상태로 머물면 더 위험해진다는 것입니다. 구속은 단지 악을 제거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빈 자리에 성령과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그분의 통치를 채워야 완전해집니다. 이 비유는 개인 구원에 있어서도, 공동체적 갱신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원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영적 중립이란 없으며, 하나님 나라의 통치가 임하지 않은 정결함은 오히려 더 큰 위험에 노출된 상태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회개와 결단 이후에도 지속적인 순종과 말씀으로 살아가는 제자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합니다. 구속사는 비움이 아니라 채움이며, 예수님으로 채워지지 않은 삶은 다시 어두움에 사로잡힐 수 있습니다.

5.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의 복 (11:27–28)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실 때, 무리 중 한 여인이 외칩니다. "당신을 뵌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11:27). 이는 당시 유대 문화에서 가장 큰 축복을 낳은 자녀의 영광을 통해 표현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가르침을 본 그녀는 그분을 낳은 어머니를 복되다 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대답은 우리의 시선을 다시 본질로 돌립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11:28). 이는 혈연이나 외적인 영광이 복의 근거가 아니라, 말씀에 대한 순종과 실천이 진정한 복의 기준이라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구속사의 핵심이며, 이를 듣고 지키는 자만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는 자입니다.

이 말씀은 마리아조차도 단순히 예수님의 육적 어머니였기 때문에 복된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마음에 두고 끝까지 지켰기에 복되다는 점을 시사합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은혜를 보고 듣는 것으로 완성되지 않으며, 말씀에 대한 지속적인 순종과 실천이 있을 때에만 구속의 삶으로 열매 맺게 됩니다.

구속사 안에서 복이란, 하나님의 말씀 앞에 머물고, 그것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분을 따르는 자들에게 사역의 외형이 아닌, 내면의 순종과 진실된 제자도를 요청하십니다.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진정으로 복되며, 그는 하나님의 뜻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생명의 사람입니다.

6. 요나의 표적과 심판의 말씀 (11:29–32)

예수님께서 많은 무리가 모였을 때, 그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세대는 악한 세대라 표적을 구하되 요나의 표적밖에는 보일 표적이 없나니" (11:29). 이 말씀은 단순한 기적의 부정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사역에 대한 신앙의 태도를 점검하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 기적 이상의 표적은 주어지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십니다.

요나가 니느웨 사람들에게 회개의 경고를 외친 것처럼, 예수님은 죄로 물든 세대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하십니다. 요나가 물고기 뱃속에서 삼 일을 보낸 사건은, 장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삼 일 만에 부활하실 구속의 예표입니다. 요나는 구약의 예언자였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직접 구원을 이루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요나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으며" (11:32), 또한 "솔로몬보다 더 큰 이가 여기 있다"는 말씀은 예수님 자신의 구속자 되심을 명확히 드러내는 선언입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그분의 사역과 존재 자체가 이미 가장 큰 표적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믿지 않고 외적 기적만을 구하는 자들에게 주시는 심판적 경고입니다. 니느웨 사람들과 남방 여왕이 마지막 날에 이 세대를 정죄할 것이라는 예언은, 구속사의 결정적 계시 앞에서 거부한 자들이 받게 될 심판의 확실성을 강조합니다. 복음은 듣고 회개하는 자에겐 생명이지만, 거절하는 자에겐 심판입니다.

7. 몸의 등불 비유 (11:33–36)

예수님은 이어서 몸의 등불에 대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누구든지 등불을 켜서 움속에나 말 아래 두지 아니하고 등경 위에 두나니 이는 들어가는 자들로 그 빛을 보게 하려 함이라" (11:33). 이는 앞서 말씀하신 요나의 표적과 연결되어, 복음의 계시는 감추어지지 않고 드러나야 하며, 그것은 곧 하나님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사역임을 말합니다.

예수님은 몸의 등불은 눈이라고 하시며, "네 눈이 성하면 온 몸도 밝을 것이요,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 하십니다 (11:34). 이 말씀은 단지 육체의 눈이 아닌, 영적 시각과 분별력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눈, 즉 마음의 눈이 말씀을 향해 열려 있고 하나님의 뜻을 따라 분별하고 바라볼 때, 우리의 전 존재는 빛 가운데 거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네 안에 있는 빛이 어둠이 되지 아니하도록 조심하라"고 경고하십니다 (11:35). 이는 겉으로는 신앙의 모양을 지녔지만, 실제로는 말씀에 반응하지 않고 고집과 완고함으로 살아가는 이들을 향한 말씀입니다. 빛이 있음에도 받아들이지 않는 자는, 스스로를 어둠 가운데로 밀어 넣는 자입니다. 복음의 빛은 거절하면 오히려 심판이 되며, 그 심판은 눈이 어두운 데서 비롯됩니다.

예수님은 "네 온 몸이 밝아 조금도 어두운 데가 없고 온전히 밝아 등불이 그 빛으로 너를 비출 때와 같으리라"고 하십니다 (11:36). 이는 구속사의 빛이 우리 안에 충만히 임할 때, 삶 전체가 하나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존재로 바뀐다는 약속입니다. 참된 제자도는 복음을 지식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그 빛을 삶으로 살아내는 것에 있습니다. 말씀을 듣고 회개하고 따르는 자의 삶은 어둠이 아니라 빛 가운데 있는 자의 길입니다.

복음은 어둠 속에 비추는 하나님의 빛이며, 우리가 진심으로 그 빛을 사모하고 따를 때, 하나님의 구속 역사는 우리를 통해 더욱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등불을 덮지 말고, 마음의 눈을 열어 그리스도의 빛을 온몸으로 받아들일 때, 우리는 이 세대를 밝히는 빛의 자녀가 됩니다.

8. 바리새인과 율법교사에 대한 책망 (11:37–54)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한 바리새인이 식사 자리에 초청하자 예수님께서 그 집에 들어가 앉으십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식사 전에 손 씻지 않으셨다는 이유로 바리새인은 속으로 이상히 여깁니다 (11:37–38). 이 장면은 율법과 전통, 외적 경건의 문제를 드러내는 구속사적 대화의 출발점이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외적인 깨끗함과 내면의 부패를 대조하시며 책망을 시작하십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바리새인은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나 너희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도다" (11:39). 겉은 단정하지만 내면은 죄로 가득한 위선의 상태입니다. 이는 단순한 도덕적 질책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사람의 중심을 보신다는 구속사적 관점을 명확히 드러내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외형이 아니라 마음의 동기와 본질을 보십니다. 그러므로 경건은 외형이 아닌, 내면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정한 것을 안에서부터 시드니 겉도 깨끗하리라"고 하시며 (11:41), 참된 깨끗함은 마음의 변화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강조하십니다. 그리고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이여"라는 반복적 선언을 통해, 그들이 십일조는 철저히 하면서도 공의와 하나님 사랑은 버리는 모순을 지적하십니다 (11:42). 이는 신앙의 본질보다 형식에 집착하는 종교적 위선을 고발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구속사의 참된 삶이 율법을 지키는 형식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사랑과 정의임을 선언하십니다.

위선의 종교와 참된 영광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신앙이 사람에게 보이기 위한 영광을 추구한다고 책망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이여, 너희가 회당의 높은 자리와 시장에서 문안 받기를 좋아하도다" (11:43). 그들의 종교는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사람의 인정을 추구하는 이중적인 신앙입니다. 이러한 태도는 참된 구속사적 공동체를 왜곡시키며, 영혼을 살리는 복음의 능력을 상실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어 "화 있을진저 너희가 평토장한 무덤 같아서 그 위를 밟는 사람들이 알지 못하느니라"고 하십니다 (11:44). 이는 바리새인의 삶이 거룩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죽음의 냄새를 숨기고 있는 무덤과 같다는 강한 경고입니다. 그들의 삶은 오히려 주변 사람들을 부정하게 만들고, 생명의 길에서 멀어지게 하는 방해물이 되고 있다는 구속사적 평가입니다.

예수님의 책망은 단지 개인적인 비판이 아니라, 종교의 본질을 왜곡하고 하나님의 뜻을 가리우는 위선의 체계를 향한 심판입니다. 구속사는 사람을 살리는 진리를 통해 역사하십니다. 따라서 외식과 형식주의는 반드시 무너져야 할 거짓 종교입니다. 예수님은 거짓 영광을 쫓는 자들에게 진정한 하나님의 영광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주십니다.

율법교사를 향한 경고와 선지자의 피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말합니다. "선생님 이렇게 말씀하시니 우리까지 모욕하심이니이다" (11:45). 이에 예수님은 율법교사들에게도 세 가지 화 있을진저 선언을 이어가십니다. 먼저 "사람에게 감당하기 어려운 짐을 지우고 자신은 손가락 하나 대지 아니하는 자"로 규정하십니다 (11:46). 이는 말씀을 해석하고 가르치는 자들이 정작 그 말씀의 본질을 살지 않는 위선적인 교권주의를 드러냅니다.

또한 예수님은 조상들이 선지자를 죽이고, 그 무덤을 만드는 너희도 같은 자손이라고 하십니다 (11:47–48). 이는 구속사의 역사를 방해하고, 진리를 말한 자들을 제거해온 종교적 체계의 문제를 지적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선지자를 박해한 이들의 피가 이 세대에 요구될 것이라는 선언은, 심판이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경고하는 예언입니다 (11:50–51).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지식의 열쇠를 가져가서 자기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고자 하는 자도 막았다"는 강한 경고를 주십니다 (11:52). 이는 율법의 해석자들이 진리로 나아가는 문을 열기는커녕 오히려 닫아버렸다는 구속사적 비판입니다. 복음의 문은 열려 있는데, 형식과 전통에 갇힌 자들은 그 문을 막고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 책망 이후,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매우 격렬히 대응하며 책잡을 말을 얻고자 모의를 시작합니다 (11:53–54). 이는 예수님의 책망이 단순한 감정이 아닌, 구속사적 진리를 선포하는 권세 있는 말씀이었음을 반증합니다. 그들은 결국 이 말씀을 듣고 돌이키는 대신, 예수님을 제거하려는 길로 나아갑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종교성이 구속사 앞에서 얼마나 단단하게 저항할 수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진리의 칼날을 숨기지 않으시고, 사랑으로 경고하시며, 그들을 회개로 이끄시려 하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형식 속에 숨어 있지 않은지, 하나님의 진리 앞에 정직히 서 있는지를 되돌아보아야 합니다. 참된 경건은 중심의 회개와 진리 안에 거하는 순종에서 출발합니다.

 

 

728x90
반응형

'복음-행전'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13장 강해  (0) 2025.04.20
누가복음 12장 강해  (0) 2025.04.20
누가복음 10장 강해  (0) 2025.04.20
누가복음 9장 강해  (0) 2025.04.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