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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행전

누가복음 13장 강해

by 파피루스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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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장

누가복음 13장은 회개 없이는 멸망이라는 경고로 시작하여, 무화과나무 비유를 통해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때가 정해져 있음을 강조합니다. 이어 안식일에 고침받은 여인의 사건은 형식주의를 깨뜨리고 생명의 본질을 보여주며, 겨자씨와 누룩 비유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확장성과 내면의 변화를 나타냅니다. 또한 예루살렘으로 향하시는 예수님의 여정 속에서, 좁은 문을 통과하는 제자의 삶과 예루살렘에 대한 애통의 심정을 통해 구속사의 중심이 어디에 있는지를 분명히 드러냅니다.

누가복음 13장 구조분석 목록

  1. 회개 없이는 멸망 (13:1–5)
  2. 열매 없는 무화과나무 비유 (13:6–9)
  3. 안식일에 꼬부라진 여인을 고치심 (13:10–17)
  4. 겨자씨와 누룩 비유 (13:18–21)
  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3:22–30)
  6.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통 (13:31–35)

시대를 바라보는 영적 시선(13:6–9)

누가복음 13장은 두 가지 매우 도전적인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갈릴리 사람들이 빌라도에게 죽임당한 사건을 전하자, 예수님은 그 사건에 대한 신학적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하십니다. 당시 사람들은 재난이나 고난이 죄에 대한 직접적인 벌이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었지만,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이 갈릴리 사람들이 이같이 해를 받았다고 해서, 모든 갈릴리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13:2). 그리고 다시 강조하시며 말씀하십니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3).

예수님은 이어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에 대해서도 같은 논리를 반복하십니다. "너희는 이 사람들이 예루살렘에 거한 모든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 아느냐?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13:4–5). 이는 재난에 대한 단순한 도덕적 해석을 배격하시고, 모든 사람에게 동일하게 회개가 필요하다는 구속사적 진리를 선포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이 두 사건을 통해, 세상의 사건들을 단순히 도덕적 판단의 눈으로 볼 것이 아니라, 구원의 시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치십니다. 재난의 원인을 타인의 죄에서 찾으려는 태도는 우리를 자기 회개로 이끄는 데 실패하게 만듭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 이 순간이 회개의 기회임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혜의 날에 응답해야 합니다. 구속사는 모든 인간에게 회개를 요청하며, 지금이 구원의 날이라는 말씀을 전하고 있습니다.

유예된 심판 속의 은혜 (13:6–9)

예수님은 이어서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사람이 포도원에 무화과나무를 심은 것이 있더니 와서 그 열매를 구하였으나 얻지 못한지라" (13:6). 이 비유는 이스라엘, 나아가 하나님의 백성된 자들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열매를 맺지 못하고 있는 현실을 상징합니다. 주인은 세 해 동안 열매를 찾았지만 아무것도 얻지 못합니다. 그러자 그는 말합니다. "찍어버리라 어찌하여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 (13:7).

그러나 이때 포도원지기, 곧 중재자가 등장합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인이여 금년에도 그대로 두소서 내가 두루 파고 거름을 주리니 이후에 만일 열매가 열면 좋거니와 그렇지 않으면 찍어버리소서" (13:8–9). 이 중재자는 장차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며, 유예된 심판의 시기 속에서 회개와 결실의 기회를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자비를 보여주는 인물입니다.

비유의 핵심은 단순히 더 기다려준다는 데 있지 않습니다. 기다림 속에서 적극적인 돌봄과 개입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은 단순히 시간을 벌어주시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를 가꾸고, 회개의 열매를 맺게 하시는 일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십니다. 구속사는 그분의 인내와 자비로 이끌어지는 과정이며, 지금 우리가 살아 있다는 것은 그분의 은혜가 여전히 유효하다는 증거입니다.

우리는 이 무화과나무의 비유 앞에서 진지하게 우리 삶을 점검해야 합니다. 겉으로는 종교적 형식을 갖추고 있지만, 실상은 열매 없는 신앙에 머물러 있지는 않은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잎사귀만 무성한 신앙이 아니라, 참된 회개와 변화의 열매를 요구하십니다. 유예된 시간은 무한하지 않으며, 반드시 끝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은혜를 헛되이 받지 말고 열매 맺는 삶으로 응답해야 할 때입니다.

구속사 속의 회개와 열매 맺는 삶

예수님의 이 두 메시지는 하나의 공통된 진리를 전하고 있습니다. 바로, 회개하지 않는 자는 멸망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고는 심판의 두려움만을 강조하는 말씀이 아닙니다. 동시에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얼마나 오래 참으시며, 또 얼마나 열심히 회개의 기회를 주시는지를 강조하십니다. 이는 구속사 전체를 관통하는 하나님의 성품이기도 합니다.

회개는 단순한 감정적 반응이나 일회적 결단이 아니라, 삶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전환입니다. 진정한 회개는 열매로 나타납니다. 겉모습이 아닌 중심에서, 말이 아닌 삶으로, 후회가 아닌 변화로 나타나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찾으시는 열매는 사랑, 정의, 겸손, 순종, 그리고 복음에 합당한 삶의 태도입니다.

구속사는 단지 심판의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회개의 기회를 함께 제시합니다. 그 기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졌고, 지금 이 순간에도 유효합니다. 그러나 그 시간은 무한정 주어지지 않습니다. 무화과나무에게도 끝이 있듯이, 우리에게도 결산의 날이 있습니다. 그날에 열매 없는 나무가 되지 않도록 지금 주님의 은혜에 응답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그 은혜를 위해, 우리의 열매 맺음을 위해, 스스로 포도원지기가 되어 우리 삶을 일구고 계십니다. 돌을 제거하시고, 거름을 주시고, 우리를 살리기 위해 십자가에서 모든 수고를 감당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우리가 열매로 그 사랑에 응답해야 할 시간입니다. 구속의 은혜는 변화된 삶으로 증명되어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 사는 길입니다.

안식일에 드러난 참된 회복의 뜻 (13:10–17)

누가복음 13장 10절 이하에서 예수님은 안식일에 한 회당에서 가르치실 때, 열여덟 해 동안 병마에 시달려 허리를 펴지 못한 한 여인을 보시고 고쳐주십니다. "예수께서 보시고 불러 이르시되 여자여 네가 네 병에서 놓였다 하시고 안수하시니 여자가 곧 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13:12–13). 이 장면은 단순한 치유의 사건을 넘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나타나는 구속의 능력을 드러내는 상징적인 사건입니다.

이 여인은 육체적으로는 등을 펼 수 없는 상태였지만, 그것은 단순히 질병이 아니라 영적으로 억눌려 있는 상징적 현실을 반영합니다. 예수님은 그녀를 보고 말씀만이 아니라 손을 대어 안수하심으로 직접적인 접촉과 회복을 베푸십니다. 이는 메시아가 오셔서 잃어버린 자를 회복시키는 사역을 행하신다는 구속사의 실제적 성취입니다.

이 사건은 또한 예수님의 시선이 언제나 고통받는 자를 향해 있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사람들이 주목하지 않았던 이 여인을 예수님은 먼저 보시고 부르셨습니다. 구속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잊지 않으시고, 정해진 때에 반드시 회복하시는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이 치유는 단순한 몸의 회복을 넘어, 하나님의 자녀로 다시 세워지는 구속의 회복을 나타냅니다.

종교 형식주의를 뚫고 나오는 복음의 능력 (13:10–17)

그러나 이 놀라운 회복의 사건 앞에서 회당장은 분노합니다. 그는 "안식일에 병 고치는 일을 여섯 날 중에 하라 안식일에는 하지 말라"고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13:14). 예수님은 이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외식하는 자들아! 너희가 각각 안식일에도 자기의 소나 나귀를 외양간에서 풀어내어 물 먹이러 가지 아니하느냐?" (13:15). 그리고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면 열여덟 해 동안 사탄에게 매인 바 된 이 아브라함의 딸을 안식일에 풀어 주는 것이 합당하지 아니하냐?" (13:16).

이 장면은 복음이 율법을 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율법의 참된 정신을 완성하는 것임을 보여줍니다. 안식일은 단지 일을 멈추는 날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모든 것을 회복시키는 날입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형식에 매여 사람의 생명과 고통을 외면하는 종교 지도자들의 위선을 지적하시며, 진정한 안식일의 의미를 되찾게 하십니다.

구속사는 고통받는 자를 외면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들에게 가장 먼저 다가가고, 그들의 삶을 새롭게 하며, 메마른 율법주의 안에서 새로운 생명의 사건을 일으킵니다. 이 사건은 하나님 나라가 이미 우리 가운데 임하였다는 분명한 증거입니다. 예수님은 이 여인을 통해 모든 율법주의적 형식주의를 무너뜨리시며, 하나님의 사랑과 회복의 능력이 무엇인지를 선포하십니다.

겨자씨와 누룩: 하나님의 나라의 본질 (13:18–21)

예수님은 이어서 하나님 나라에 대해 비유로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무엇과 같을까? 마치 사람이 자기 채소밭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자라 나무가 되어 공중의 새들이 그 가지에 깃들였느니라" (13:19). 겨자씨는 작지만 자라면 큰 나무가 되며, 그 안에 많은 생명이 거하게 되는 공간을 만들어냅니다. 이는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말해주는 비유입니다.

또한 예수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마치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13:21). 누룩은 보이지 않지만 전체에 스며들어 변화를 일으키는 특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이는 하나님의 나라가 외형적으로는 작고 보이지 않게 시작되지만, 결국 온 세상을 변화시키는 능력과 확장성을 가지고 있다는 선언입니다.

이 두 비유는 누가복음이 보여주는 구속사의 방향과 정확히 일치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작은 일, 즉 안식일에 병든 여인을 고치시는 예수님의 사역도 사람들 눈에는 사소하고 비논리적일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하나님 나라의 실제적인 침투이며, 그리스도의 구속 역사가 시작된 실재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조용히 그러나 강력하게 우리 안에서 시작되며, 공동체 전체를 변혁시켜 나갑니다.

예수님께서 이 여인을 고치신 사건과 바로 이어지는 겨자씨와 누룩의 비유는 분명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그 여인의 일생과 같이 메마르고 눌린 삶 가운데 스며들어, 치유하고 회복시키며, 새 생명을 움트게 합니다. 비록 작고 초라한 시작처럼 보이지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시작이며, 결국은 커다란 구속의 열매를 맺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소유한 자는 이제 그 작지만 강력한 복음을 가슴에 품고 세상 가운데 살아갑니다. 겨자씨처럼 심겨지고, 누룩처럼 스며들며, 우리의 삶 전체가 하나님의 통치 아래 놓이게 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비로소 안식과 회복, 그리고 생명의 열매를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5.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13:22–30)

예수님은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여정 중 각 성과 마을을 지나며 가르치십니다. 이때 어떤 이가 묻습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 이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은 의외로 숫자에 대한 정보가 아니라, 구원에 이르는 삶의 방식에 초점을 둡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13:24).

여기서 '좁은 문'은 구원의 길이 협소하고 어렵다는 단순한 의미를 넘어서, 그 문을 통과하기 위해 포기해야 할 것이 많고, 진정한 헌신이 요구된다는 사실을 말합니다. 이는 자기부인과 십자가의 길을 따르라는 예수님의 제자도 정신과도 연결되어 있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길은 누구나 쉽게 통과할 수 있는 문이 아니라, 회개와 믿음으로만 통과 가능한 진리의 문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말씀하십니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는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열어 달라 해도 내가 너희를 알지 못한다고 하리라" (13:25). 이는 유대인들 중에서도 형식적 신앙에 머무르며 예수님을 거부한 이들에게 주시는 경고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문은 영원히 열려 있는 것이 아니며, 기회가 있을 때 믿음으로 응답해야 합니다. 구속사는 시간 안에서 진행되며, 심판의 날이 오기 전에 준비된 자만이 그 나라에 참여할 수 있습니다.

배척당한 자들의 구속사적 반전 (13:26–28)

문 밖에 남은 자들은 말합니다.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 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13:26). 그러나 예수님은 단호히 말씀하십니다.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13:27). 이는 단순히 예수님의 사역을 보고 들은 것으로 구원이 주어지지 않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구속은 단지 종교적 경험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관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주님을 곁에서 보았던 유대 지도자들조차도, 그분을 거부하고 회개하지 않았다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든 선지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있고 오직 너희는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슬피 울며 이를 갈리라" (13:28). 이는 구속사의 주체라고 여겨졌던 이스라엘 안에서조차도, 신실하지 않은 자들은 제외되고, 믿음으로 반응한 자들만이 그 나라에 들어간다는 심판의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결코 혈통으로 계승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오직 믿음으로, 회개로, 예수 그리스도를 따르는 삶을 통해 참여하게 됩니다. 구속사는 언제나 겉모양이 아니라 중심의 진실을 통해 사람을 평가하십니다. 하나님 앞에서 우리는 어떤 외적인 배경도 아닌, 예수님의 말씀에 어떻게 반응했는가로 심판을 받습니다.

구속사의 역전과 하나님 나라의 확장 (13:29–30)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리라" (13:29). 이는 구속사가 유대 민족에만 제한되지 않고, 온 열방으로 확장될 것이라는 선언입니다. 하나님 나라의 잔치는 전 세계로부터 믿음으로 응답한 자들이 함께 앉는 영광의 자리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전체가 강조하는 하나님 나라의 보편성과 은혜의 확장성을 잘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 유명한 말씀을 하십니다.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도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13:30). 이는 구속사의 역전 원리를 상징하는 말씀입니다. 인간의 시선으로 평가한 우선순위와 기준은 하나님 나라에서는 무의미하며, 하나님은 낮은 자를 높이시고 겸손한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구속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은혜가 있고, 그 은혜는 자격 있는 자가 아니라, 회개하고 주님을 붙든 자에게 임합니다.

6.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애통 (13:31–35)

그때 어떤 바리새인들이 예수님께 말합니다. "나가서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13:31). 그러나 예수님은 담대히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오늘과 내일은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고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13:32). 이는 예수님께서 자신의 사역과 죽음, 부활에 대한 확고한 계획을 가지고 계시며, 누구의 위협에도 그 길을 멈추지 않으신다는 구속사적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것이니 선지자가 예루살렘 밖에서는 죽는 법이 없느니라" (13:33). 이는 예루살렘이 선지자들을 죽이고 하나님의 메시지를 거부해 온 장소임을 지적하시며, 자신의 죽음 또한 그곳에서 이루어질 것을 예고하신 것입니다. 구속사의 클라이맥스는 바로 예루살렘에서의 십자가이며, 예수님은 그 길을 거부하지 않으시고 담담히 걸어가십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애통해하십니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 (13:34). 이는 구속의 손을 내미시는 하나님의 마음과, 그것을 거절하는 인간의 완고함을 동시에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심판을 선포하십니다. "보라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 (13:35). 이는 이스라엘이 예수 그리스도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는 한, 그들에게는 구속의 은혜가 임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언젠가는 그들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게 될 날이 올 것이라는 소망의 여지도 담겨 있습니다.

이 말씀은 구속사의 중심이자 정점이 예루살렘에서 이루어질 것임을, 그리고 그 길이 거절과 고난, 그러나 결국은 승리로 끝날 것임을 보여주는 예언입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하여 애통하시며,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는 구속자이십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그분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좁은 문으로 들어가 그 길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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