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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행전

누가복음 15장 강해

by 파피루스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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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장

누가복음 15장은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구속적 사랑을 세 가지 비유로 보여주는 복음의 정수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하심을 비판하는 바리새인들의 태도에 응답하여, 잃은 양, 잃은 드라크마, 그리고 잃은 아들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각각의 비유는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하나님께서 얼마나 기뻐하시며, 구원의 은혜가 어떤 본질을 갖는지를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특히 탕자의 비유에서는 집 나간 작은 아들의 회개와 돌아옴, 그리고 이를 기뻐하지 않는 큰아들의 태도를 통해, 하나님의 자비와 인간의 자기의(自己義)의 대비가 뚜렷하게 드러납니다. 구속사는 잃은 자를 향한 하나님의 열정적 사랑의 드라마이며, 회개는 그 사랑에 응답하는 유일한 길임을 선포합니다.

누가복음 15장 구조분석 목록

  1. 잃은 양의 비유 (15:1–7)
  2.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15:8–10)
  3. 탕자의 비유 (15:11–32)
    • 작은 아들의 방탕과 회개 (15:11–20)
    • 아버지의 용서와 기쁨 (15:21–24)
    • 큰 아들의 분노와 아버지의 권면 (15:25–32)

1. 잃은 양의 비유 (15:1–7)

하나님의 마음에 가까이 있는 자들 (15:1–2)

누가복음 15장은 세리와 죄인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들으러 가까이 오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이들을 향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반응은 냉소적입니다. 그들은 "이 사람이 죄인을 영접하고 음식을 같이 먹는다"며 수군거립니다 (15:2). 그들의 비판은 단지 예수님의 행위에 대한 판단이 아니라, 그들이 이해하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를 드러냅니다. 이들은 의롭다고 여기는 자신들의 기준으로 구원의 자격을 판단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상황을 통해 하나님의 구속 역사, 곧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마음을 비유로 설명하십니다. 이 장면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복음은 철저히 은혜 위에 세워진 구원이며, 자격이나 도덕적 우위가 아닌 하나님의 전적인 사랑과 부르심에 기초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 나아오는 자는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으며, 그들은 하나님께 가장 가까운 자들입니다. 복음은 항상 중심에서 주변으로 확장되며, 그 주변은 곧 회개하는 죄인들입니다.

 

잃은 한 마리의 가치를 아시는 하나님 (15:3–6)

예수님은 그들에게 한 비유를 들려주십니다. "너희 중에 어떤 사람이 양 백 마리가 있는데 그 중의 하나를 잃으면 아흔 아홉 마리를 들에 두고 그 잃은 것을 찾아내기까지 찾아 다니지 아니하겠느냐?" (15:4). 여기서 놀라운 점은 하나를 잃었을 때, 아흔아홉 마리를 잠시 두고서라도 그 하나를 위해 모든 수고를 아끼지 않는 목자의 태도입니다. 이는 당시 사회적 계산으로는 납득되지 않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계십니다.

 

잃은 자 한 명이 하나님께 얼마나 귀한 존재인지, 하나님은 수고를 아끼지 않고 그를 찾아 나서십니다. 이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사건에서 완성됩니다. 하늘 영광을 버리고 인간이 되셔서, 죄 가운데 길 잃은 한 사람을 찾으러 오신 하나님의 사랑이 이 비유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목자가 그 양을 찾아 어깨에 메고 집으로 돌아와 친구들과 이웃을 불러 기뻐하며 잔치를 벌이는 장면(15:5–6)은 단순한 기쁨을 넘어서, 구속사가 완성될 때 하늘에서 벌어질 영광의 환희를 예고합니다.

 

구속사는 절대적 사랑의 이야기입니다. 열심히 살아가는 자만이 아닌, 길 잃고 실패하고 넘어진 자를 찾아오시는 하나님, 그분이 주인공이신 복음의 이야기는 결국 회개의 기쁨, 회복의 감사로 귀결됩니다. 예수님은 한 사람을 귀하게 여기십니다. 아흔아홉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하나를 포기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이십니다.

 

회개 하나로 일어서는 구속의 잔치 (15:7)

비유의 마지막에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늘에서는 회개할 것 없는 의인 아흔아홉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는 것보다 더하리라" (15:7). 이 말씀은 하나님의 기쁨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한 사람의 진실한 회개를 누구보다 기뻐하십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구속사의 결실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회개할 것 없는 의인'은 사실상 자기의에 빠져 있는 자들을 뜻합니다. 이들은 자신을 의롭다 여기기에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오히려 죄를 인정하고 돌이키는 자를 더 기뻐하십니다. 회개는 단지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길이며, 그 길 위에 있는 자가 하나님 나라에 속한 자입니다.

 

이 장면은 단지 하늘의 기쁨을 묘사하는 것을 넘어서, 하나님 나라가 무엇을 기뻐하는 나라인지를 설명해 줍니다. 교회가, 성도가, 하나님의 마음을 품는다는 것은 바로 이 기쁨에 동참하는 것입니다. 잃은 양 하나를 찾고 회복시키는 데 온 마음을 쏟는 것이야말로, 예수님의 사역에 동참하는 길이며, 우리가 추구해야 할 제자도의 본질입니다. 구속사는 늘 한 사람을 향해, 그 잃은 자를 향해 뻗어갑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일을 기뻐하는 사람들, 함께 어깨 메고 잔치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2.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 (15:8–10)

하나님 나라의 가치를 드러내는 상징 (15:8)

예수님은 잃은 양의 비유에 이어 잃은 드라크마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여자가 열 드라크마가 있는데 하나를 잃으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찾아내기까지 부지런히 찾지 아니하겠느냐" (15:8). 드라크마는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에 해당하는 화폐로, 이 열 개는 단순한 재산이 아닌 여인에게는 생계와 안정, 혹은 결혼 지참금의 의미도 있었던 귀한 소유였습니다.

 

이 비유에서 중요한 포인트는 여인이 하나를 잃었을 때 그것이 아홉 개가 남았음에도 불구하고 결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이는 하나님께서 한 사람, 잃은 자 하나를 향해 얼마나 깊이 관심을 두고 계신지를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구속사는 결코 군중 속에서 숫자로만 존재하는 인간을 다루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잃은 자 하나를 위해 등불을 켜고, 집을 쓸며, 손수 찾는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여인이 등불을 켠다는 표현은 어두운 곳에 있는 것을 밝히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며, 이는 성령의 조명과 말씀의 빛으로 길 잃은 자를 찾으시는 하나님의 사역을 상징합니다. 또한 집을 쓸며 찾는 행위는 고된 노동과 집중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은 잃은 자를 찾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이시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로 완성되는 구속사의 핵심 진리를 예고합니다.

 

회복의 기쁨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15:9)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은 혼자 기뻐하지 않습니다. 그녀는 "그 벗과 이웃을 불러 모으고 말하되 나와 함께 즐기자 잃은 드라크마를 찾아내었노라 하리라"고 말합니다 (15:9). 이 구절은 단지 잃은 물건을 되찾은 기쁨의 묘사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회복과 구원이 공동체적 기쁨으로 이어진다는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잃은 자의 회복을 공동의 잔치로 바꾸시는 은혜의 장소입니다. 이는 누가복음 15장 전체가 보여주는 하나의 일관된 흐름이기도 합니다. 잃은 양을 찾은 목자도, 드라크마를 찾은 여인도, 돌아온 아들을 맞이한 아버지도 모두 친구와 이웃을 불러 함께 기뻐합니다. 이 공동체적 기쁨은 교회의 본질을 잘 보여줍니다. 교회는 회복의 현장이며, 회개로 돌아오는 자를 위해 하늘의 기쁨을 함께 누리는 곳입니다.

 

또한 여인의 기쁨은 단지 소유물의 회복에 그치지 않습니다. 드라크마 하나는 그 자체로는 작은 단위일 수 있지만, 온전한 '열 개'를 이루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존재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를 그렇게 보십니다. 공동체 안에서의 한 사람, 교회 안에서의 한 영혼은 결코 대체 가능한 수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는 완성을 이루기 위한 필수적 존재입니다. 구속사는 전체가 아닌 '하나'를 통해 완성됩니다.

 

하늘에서 울려 퍼지는 회개의 노래 (15:10)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 비유를 이렇게 정리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와 같이 죄인 한 사람이 회개하면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 기쁨이 되느니라" (15:10). 이 말씀은 단지 하늘의 천사들이 환호한다는 묘사가 아니라, 하늘의 기쁨이 얼마나 깊고 실제적인지를 선포하는 복음의 선언입니다. 회개는 단지 인간의 고백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기쁨을 이끌어내는 구속사의 핵심 사건입니다.

 

여기서 회개는 단순히 눈물을 흘리고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품으로 돌아오는 전인격적 전환입니다. 이는 방향의 전환이며, 관계의 회복이며, 정체성의 회복입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회개할 때 마치 잃은 보물을 다시 얻은 여인처럼 기뻐하시며, 그 기쁨은 하늘에 가득 퍼집니다. 이는 곧 예수님의 사역의 목적이기도 합니다.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라"(19:10).

 

이 비유는 단순한 감동이 아닌, 우리의 시선을 하나님의 마음으로 이끌어가는 복음의 렌즈입니다. 우리는 잃어버려졌던 드라크마처럼, 하나님 없이 살아왔던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빛을 켜시고, 수고하시며, 마침내 우리를 다시 품에 안으셨습니다. 그리고 우리 또한 이제는 다른 잃은 자들을 향해 같은 수고와 기쁨으로 살아가야 할 자들입니다. 구속사는 하늘의 잔치를 위해 지금도 계속되고 있으며, 그 잔치의 기쁨에 동참하는 것이 바로 제자된 우리의 특권입니다.

 

3. 탕자의 비유 (15:11–32)

작은 아들의 방탕과 회개 (15:11–20)

예수님께서는 잃은 양과 드라크마의 비유에 이어, 세 번째이자 가장 강력한 비유로 '탕자의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한 사람에게 두 아들이 있었고, 그 중 작은 아들이 아버지에게 유산의 분깃을 요구하여 먼 나라로 떠나 방탕하게 그 재산을 허비합니다 (15:11–13). 이 장면은 단지 가정의 불화나 개인의 타락을 묘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을 떠나 자기 인생을 스스로 책임지려는 인간의 죄된 본성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유산을 요구한다는 것은 아버지의 존재보다 자신의 자율과 소유를 더 중요시한 행동으로, 당시 사회에서 도덕적 파탄을 의미하는 파격적인 행위였습니다.

 

그가 모든 것을 탕진한 후, 때마침 그 땅에 큰 흉년이 들어 궁핍하게 되고, 마침내 그는 돼지를 치는 일까지 하며 굶주리는 상황에 이릅니다 (15:14–16). 이는 율법 아래 부정한 짐승으로 간주된 돼지와 함께 있는 그 모습 자체가, 유대인의 입장에서 가장 비참하고 절망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자신이 사는 세상이 얼마나 허망하며, 자기를 만족시켜줄 수 없는지를 경험한 이 아들의 모습은, 죄의 길이 결국 생명과 자유가 아닌 멸망과 굴욕으로 이끈다는 구속사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이 극한의 절망 속에서 그는 드디어 자신을 돌아보게 됩니다.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15:17). 이는 단지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근원을 떠났다는 사실에 대한 자각의 시작입니다. 이 장면에서 중요한 것은 단지 환경의 변화가 아니라, 마음의 방향이 바뀌었다는 점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15:18). 이 고백은 진정한 회개의 시작이며, 단지 상황 개선을 위한 타협이 아닌, 죄에 대한 본질적인 통찰이 담긴 절절한 결단입니다.

 

그는 더 이상 아들의 자격을 주장하지 않고, 품꾼으로라도 받아주시기를 바라는 겸손한 자세로 돌아옵니다. 그는 사랑을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받아주심만으로도 감사한 자가 됩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이 장면은 인간이 죄 가운데 있을 때 하나님을 떠나 사는 실존의 비참함을 드러내며, 회개를 통한 구속의 문이 어떻게 열리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자격 있는 자를 찾지 않으시고, 진심으로 돌이키는 자를 기다리시는 분이십니다.

 

아버지의 용서와 기쁨 (15:21–24)

작은 아들이 돌아오는 장면은 이 비유의 정점입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었다고 기록합니다 (15:20). 이는 당시 아버지의 체면과 사회적 위신을 고려할 때 있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유대 문화에서 노인이 달려간다는 것은 체면 손상의 의미였지만, 이 아버지는 그 모든 사회적 통념을 깨고 아들을 향해 전력질주합니다. 이는 곧 죄인을 향해 달려오시는 하나님의 열심을 상징합니다.

 

아들의 고백은 준비된 말 그대로 시작되지만, 아버지는 그가 품꾼의 신분으로 전락하겠다는 고백을 끝까지 하기도 전에, 하인들에게 명령합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반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15:22). 이는 단순한 환대가 아니라, 아들의 신분을 완전히 회복시키는 구속의 선언입니다. 이 옷은 신분의 회복을, 반지는 권위의 회복을, 신발은 자유인의 신분을 의미합니다. 구원은 용서에 그치지 않고, 회복을 포함하는 전인적 역사입니다.

 

그리고 아버지는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벌입니다.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15:24). 이는 단순한 가족적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집에서 이루어지는 구속의 잔치이며, 천국에서의 기쁨을 지상에 미리 보여주는 모형입니다. 하늘에서는 한 영혼의 회개가 그 어떤 승리보다도 더 큰 환희로 간주됩니다.

 

이 장면은 구속사가 어떤 방식으로 완성되는지를 보여줍니다. 하나님은 죄인을 그냥 받아주시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회복시키시며, 그 회복을 공동체적 기쁨으로 선포하십니다. 구원은 은밀한 용서가 아니라, 공적인 환대이며, 하나님의 집에 다시 초청되는 사건입니다. 아버지의 기쁨은 곧 하늘의 기쁨이며, 회개는 그 기쁨을 현실로 이끌어오는 유일한 길입니다. 구속사는 그 기쁨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잔치입니다. 이 잔치에 참여하는 자는 단지 구경꾼이 아니라, 함께 기뻐하며 그 기쁨을 확산시키는 제자가 되어야 합니다.

 

큰 아들의 분노와 아버지의 권면 (15:25–32)

그러나 이 비유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밭에 있던 큰아들이 돌아와 음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하인에게 무슨 일이냐 묻자, 동생이 돌아와 아버지가 송아지를 잡았다는 소식을 듣고 분노합니다 (15:25–28). 그는 아버지께 나아가 항변합니다.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15:29). 이 항변은 공로주의적 신앙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보상받기 위해 섬긴 것입니다.

 

이 장면은 자기 의로 가득 찬 유대 지도자들, 곧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의 태도를 상징합니다. 겉으로는 아버지의 집에 머물고 있지만, 실상은 아버지의 마음을 알지 못한 채, 자신의 공로로 보상을 기대하는 모습입니다. 그는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고, 오히려 그 기쁨을 비난합니다.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이 모습은, 복음이 확장될 때 기쁨보다 시기와 분노로 반응하는 자들을 경고하는 메시지입니다. 큰아들은 형제의 회복보다 자기 지분에 대한 손해를 더 우려합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에게도 동일한 사랑으로 말씀하십니다.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 (15:31–32). 이 권면은 아직도 회개하지 않은 이스라엘과, 오늘날 자기 의에 갇혀 복음의 기쁨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을 향한 하나님의 부드러운 초청입니다. 또한 큰아들에게도 여전히 문은 열려 있으며, 그 역시 아버지의 기쁨에 동참할 기회를 갖고 있다는 희망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비유는 단순히 한 아들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리 모두가 작은 아들처럼 죄 가운데 하나님을 떠난 자이며, 동시에 큰아들처럼 종교적 외형 속에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는 자일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구속사는 오직 아버지의 마음을 아는 자, 그 잃은 자의 회복을 기뻐하는 자를 통해 완성됩니다. 하나님의 집에서 진정한 자녀로 산다는 것은, 그 기쁨의 자리에 함께 앉아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당시 바리새인들뿐 아니라 오늘날 우리 모두에게도, 구속사의 자리로 초대하십니다. 그리고 그 자리는 언제나 돌아오는 자와 맞이하는 자, 둘 다를 위한 기쁨의 장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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