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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행전

누가복음 17장 강해

by 파피루스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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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7장

누가복음 17장은 제자 공동체와 믿음의 삶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으로 시작되며, 회개, 용서, 믿음의 능력에 대한 중요한 교훈을 줍니다.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와 더불어, 반복적인 죄에 대해서도 용서할 것을 명하십니다. 제자들이 믿음을 더해달라고 요청하자,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라도 큰 능력을 발휘할 수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이어서 ‘무익한 종’의 비유를 통해 겸손한 섬김의 자세를 가르치십니다. 열 명의 나병환자 중 감사한 한 명만 돌아오는 사건은 진정한 믿음과 구원의 본질을 드러내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은 그 나라는 외적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사람 안에 임하는 것임을 선포합니다. 마지막으로 인자의 날에 대한 교훈을 통해 심판의 날에 깨어 있는 삶을 촉구하십니다.

누가복음 17장 구조분석 목록

  1.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 (17:1–2)
  2. 용서에 대한 교훈 (17:3–4)
  3. 믿음에 대한 교훈 (17:5–6)
  4. 무익한 종의 비유 (17:7–10)
  5.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심 (17:11–19)
  6.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 (17:20–21)
  7. 인자의 날에 대한 교훈 (17:22–37)

1.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 (17:1–2)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먼저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해 매우 엄중한 경고를 하십니다. "실족하게 하는 것이 없을 수는 없으나 그렇게 하게 하는 자에게는 화가 있도다" (17:1). 여기서 '실족하다'는 말은 단순한 불쾌감이나 실망이 아니라, 믿음의 여정을 방해받고 넘어지는 것을 의미합니다. 곧 누군가의 말과 행동이 다른 사람의 신앙을 흔들고, 하나님과의 관계를 가로막는 죄를 말합니다. 예수님은 그런 자에게 '연자 맷돌을 목에 달아 깊은 바다에 던지우는 것이 더 낫다'고 하십니다 (17:2). 이는 고통의 형벌보다 더 무서운 하나님의 심판을 비유한 말씀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은 연약한 자, 작은 자, 이제 막 믿음에 들어선 자들을 특별히 돌보십니다. 그리고 그러한 자들을 실족하게 만드는 일은 하나님의 구속사역을 방해하는 중대한 죄로 간주됩니다. 복음은 언제나 죄인을 회복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는데, 실족하게 하는 자는 회복이 아니라 파괴의 방향으로 역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말과 행동이 공동체 안에서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항상 조심하라고 명령하십니다. 우리는 믿음의 공동체 안에서 서로를 세우는 자가 되어야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해치는 자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오늘날에도 우리는 말과 행동으로 누군가의 믿음을 꺾거나, 신앙의 자리에서 떠나게 하는 실수를 범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오는지를 분명하게 말씀하셨습니다. 구속사는 연약한 자를 위한 것이며, 우리는 그 흐름 속에서 자신이 어떤 방향에 서 있는지를 돌아보아야 합니다. 복음을 위하여 말하고, 복음을 위하여 행동하며, 연약한 형제를 보호하는 것이 곧 구속사에 합당한 제자의 삶입니다.

 

2. 용서에 대한 교훈 (17:3–4)

예수님은 실족하게 하는 자에 대한 경고 이후에, 곧바로 용서에 대한 교훈을 이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매우 의도적인 연결입니다. 공동체 안에서 실족하게 하는 일은 불가피하게 발생할 수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형제가 죄를 범하거든 경고하고 회개하거든 용서하라. 만일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네게 죄를 짓고 일곱 번 네게 돌아와 내가 회개하노라 하거든 너는 용서하라" (17:3–4).

이 말씀은 용서의 반복성과 무제한성을 강조합니다. 인간의 감정은 상처받으면 보복하거나 멀어지기를 원하지만, 예수님은 용서의 끊임없는 실천을 통해 하나님의 자비를 드러내라 하십니다. 이 용서는 결코 감정적 관용이 아닙니다. 이것은 복음의 중심에 있는 십자가의 사랑을 삶으로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구속사는 바로 용서를 통해 확장되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하신 바로 그 일을 우리도 타인에게 행하라고 명령하십니다.

회개하는 자에게 용서하지 않는 것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용서하신 은혜를 헛되이 여기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용서받은 자들이 용서를 흘려보내는 공동체이며, 복음은 회개한 자를 정죄하는 것이 아니라 끌어안고 회복시키는 길입니다. 예수님은 그 길을 우리에게 명령하셨습니다. 하루에 일곱 번이라도, 그 마음이 돌이킬 때마다 우리는 십자가 아래에서 다시 그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3. 믿음에 대한 교훈 (17:5–6)

제자들은 이 말씀을 듣고 예수님께 말합니다. "우리에게 믿음을 더하소서" (17:5). 이 요청은 단지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방금 들은 예수님의 명령이 얼마나 인간적으로는 불가능하게 느껴졌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외의 대답을 주십니다. "너희에게 겨자씨 한 알만한 믿음이 있었다면 이 뽕나무더러 뿌리째 뽑혀 바다에 심기우라 하였을 것이요 그것이 너희에게 순종하였으리라" (17:6).

예수님은 믿음의 크기를 강조하지 않으십니다. 믿음의 본질은 그 '양'이 아니라 '내용', 곧 누구를 믿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겨자씨는 매우 작지만, 살아 있는 생명력을 지니고 있기에 결국 큰 나무로 자랍니다. 이와 같이 참된 믿음은 작아 보이지만, 하나님의 능력을 붙드는 믿음은 불가능한 것도 가능케 합니다. 예수님은 믿음의 핵심이 어떤 거창한 신비나 기적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단순히 순종하고 의지하는 데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믿음은 하나님의 구속 역사를 우리의 삶에 연결시키는 통로입니다. 믿음이란, 하나님의 구원의 계획에 나를 맡기고, 그분의 뜻을 따라 사는 선택을 의미합니다. 이 믿음을 통해 우리는 용서할 수 있고, 회개를 받아들일 수 있으며, 실족하게 하지 않는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믿음은 인간의 감정을 뛰어넘어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아가게 하는 능력입니다.

예수님은 오늘 우리에게도 말씀하십니다. 제자의 삶은 단지 이상적인 윤리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을 통해 가능해지는 현실입니다. 겨자씨만한 믿음이라도, 그 믿음이 살아 있다면 우리는 복음에 순종하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 땅에서 살아낼 수 있습니다. 그 믿음으로 우리는 실족시키지 않고, 용서하며, 구속사의 흐름에 참여하는 참된 제자의 삶을 걷게 되는 것입니다.

 

4. 무익한 종의 비유 (17:7–10)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믿음과 용서에 대해 가르치신 후, 무익한 종의 비유를 통해 제자의 태도에 대해 강조하십니다.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너희 중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17:7). 종은 주인의 뜻을 따르는 자이며, 그가 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서 특별한 칭찬을 받을 만한 자격은 없다는 논리를 펼치십니다.

주인은 오히려 종에게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 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고 말합니다 (17:8). 이 비유는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 곧 창조주와 피조물, 주님과 종의 올바른 위치를 정리해 줍니다. 제자는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이며, 그것은 특별한 공로가 아닌 본연의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명하신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17:10).

이 비유는 구속사적 관점에서 매우 중요합니다. 구속사는 인간의 공로나 자격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와 주권에 의해 진행됩니다. 우리의 순종과 헌신은 구원의 조건이 아니라, 구원받은 자로서 마땅히 행해야 할 삶의 태도입니다. 제자도의 길은 칭찬이나 보상을 바라는 길이 아니라, 은혜를 입은 자로서 겸손히 자기 자리를 지키는 길입니다. 복음은 우리가 무엇을 했는가보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가에 중심을 둡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의무보다 권리로 오해하며, 자신이 무언가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보상하셔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익한 종의 마음, 곧 자신이 마땅히 행할 일을 했을 뿐이라는 겸손과 순종의 자세를 통해, 제자의 삶이 얼마나 하나님 중심적인가를 드러내라고 하십니다. 이것이 바로 구속사에 합당한 신자의 태도입니다.

 

5. 열 명의 나병환자를 고치심 (17:11–19)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으로 가실 때, 사마리아와 갈릴리 사이를 지나가시다가 열 명의 나병환자를 만나십니다 (17:11–12). 그들은 멀리 서서 예수님께 소리 높여 말합니다. "예수 선생님이여 우리를 불쌍히 여기소서" (17:13). 당시 나병은 단순한 피부병이 아니라, 사회적으로 완전히 격리된 존재를 의미하며, 육체뿐 아니라 영혼까지 소외된 자로 간주되었습니다. 그들이 멀리서 외친 것은 단순한 절차의 문제가 아니라, 자신들의 절망적 상태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가서 제사장들에게 너희 몸을 보이라"고 명령하십니다 (17:14). 이는 구약 율법에 따라 정결한 자가 되었음을 확인받기 위한 절차였고, 동시에 믿음을 요구하는 시험이기도 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가는 도중에 나음을 입었습니다. 이 장면은 말씀에 대한 순종이 기적을 이끌어내는 원리임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열 명 중 오직 한 명만이 돌아와 예수께 큰 소리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를 표현합니다 (17:15–16). 더욱이 그는 사마리아인, 곧 유대인들에게 멸시받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슬프게 말씀하십니다. "열 사람이 다 깨끗함을 받지 아니하였느냐 그 아홉은 어디 있느냐?" (17:17). 이는 육체의 치유와 영혼의 구원의 차이를 드러내는 질문입니다. 아홉은 병이 나았지만, 예수님께 돌아오지 않았고, 오직 한 사람만이 예수님께 감사하며 그분을 하나님으로 고백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말씀하십니다. "일어나 가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7:19).

이 본문은 구속사적으로 매우 깊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육체의 치유보다 더 중요한 것은 영혼의 구원이며, 그것은 믿음과 감사로 반응하는 자에게 주어집니다. 구속사는 단지 삶의 문제 해결이 아니라, 하나님께 돌아가는 영적 회복입니다. 많은 이들이 예수님께 도움을 구하지만, 정작 진정으로 하나님께 나아와 감사를 드리는 자는 적습니다. 하나님은 단지 우리의 문제를 해결하시는 분이 아니라, 그분과의 관계 안으로 우리를 초청하시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의 길은 예루살렘, 곧 십자가를 향해 가는 여정이었습니다. 그 여정 가운데 만난 이 열 명의 나병환자 중 단 한 명만이 진정한 믿음으로 예수님을 붙들었고, 그 믿음이 그를 온전하게 하였습니다. 감사는 단지 예의가 아니라, 믿음의 열매이며, 구속사에 참여하는 자의 고백입니다. 우리도 날마다 주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를 통해 주님께 나아가는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감사와 믿음으로 응답하는 자의 길

이 두 사건은 서로를 보완하며, 제자의 삶이 어떤 태도로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르쳐줍니다. 무익한 종의 비유는 겸손과 순종의 삶을, 열 명의 나병환자 사건은 감사와 믿음의 반응을 강조합니다. 구속사는 자기를 내세우는 자가 아니라, 받은 은혜에 응답하는 자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찾으시고, 감사하는 자를 기뻐하십니다. 그분 앞에서 우리가 내세울 것은 없고, 오직 주의 은혜에 감사하며 주님의 뜻을 순종하는 마음뿐입니다. 우리는 주인의 뜻에 철저히 순종하는 종으로, 동시에 그 은혜에 감격하여 날마다 주님께 나아가는 나사로 같은 자가 되어야 합니다. 그것이 구속사에 합당한 참된 제자의 길입니다.

 

6.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교훈 (17:20–21)

바리새인들이 예수께 "하나님의 나라가 어느 때에 임하나이까"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이 질문의 근본적 오해를 지적하십니다. 그들은 하나님 나라를 외적인 정치적 사건이나 가시적인 기적을 통해 도래하는 것으로 기대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 하십니다 (17:20–21).

이 말씀은 하나님의 나라가 어떤 지리적 위치나 시공간적 형태로 제한되지 않으며, 눈에 보이는 왕국이 아니라는 점을 강조합니다. '너희 안에 있다'는 말은 '너희 가운데 있다', 곧 예수님 자신을 통해 이미 도래하고 있음을 선언하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 안에서 시작되었고, 그의 백성들 가운데 성령으로 임하며, 결국 완성될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는 현재적이면서도 미래적인 실재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초림으로 시작되어,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그 기초가 놓였으며, 성령을 통해 믿는 자들 안에 현재적으로 확장되고 있습니다. 우리는 단지 장차 올 나라만을 기다리는 존재가 아니라,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 나라의 통치를 받으며 살아가는 존재입니다. 이것이 복음을 따라 사는 삶의 본질이며, 교회는 이 하나님 나라의 현재적 실현을 세상 가운데 증언하는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의 이 선언은 우리 신앙의 시선을 외적인 환경 변화보다 내면의 복음적 변화에 집중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마음과 공동체 안에서 시작되어 세상 가운데 퍼져가는 영적인 실재이며, 그 통치가 이루어지는 곳마다 회개와 회복, 정의와 평강이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제자된 우리는 하나님 나라의 백성으로서 이 땅에서 그 통치를 드러내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7. 인자의 날에 대한 교훈 (17:22–37)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인자의 날, 곧 다시 오실 날에 대해 가르치십니다. 그는 먼저 말합니다. "때가 이르리니 너희가 인자의 날 하루를 보고자 하되 보지 못하리라" (17:22). 이는 종말의 때를 향한 갈망이 있으나, 그 때를 인간이 예측하거나 조작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이어서 "사람들이 너희에게 말하되 보라 저기 있다, 보라 여기 있다 하여도 나가지 말고 따라가지 말라"고 하십니다 (17:23). 종말에 관한 잘못된 예언과 유혹들이 있을 것이나, 예수님은 그러한 거짓 표적을 따르지 말 것을 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인자의 날을 "번개가 하늘 아래 이쪽에서 번쩍여 저쪽까지 비췸 같이" 임한다고 하십니다 (17:24). 이는 그 날이 갑작스럽고, 명백하며, 숨길 수 없는 사건으로 임할 것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그 전에 인자는 "많은 고난을 받으며 이 세대에게 버림받을 것"이라고 하십니다 (17:25). 십자가의 고난은 다시 오실 주님의 영광에 반드시 선행해야 하는 구속사의 필연적인 과정입니다.

노아의 때, 롯의 때처럼 사람들이 일상적인 삶에 몰두해 있을 때, 하나님의 심판은 갑자기 임했습니다 (17:26–30). 이는 인자의 날도 마찬가지일 것임을 보여주는 경고입니다. 사람들은 먹고 마시고 사고팔며 심고 건축하면서도, 하나님의 말씀에는 귀를 닫고 살아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심판은 결코 준비되지 않은 자들에게 면제되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경고하십니다. "롯의 아내를 기억하라" (17:32).

이 말씀은 뒤를 돌아보는 삶, 곧 세상에 미련을 두는 삶의 위험성을 말합니다. 구속사의 시계가 종말을 향해 나아가고 있는 이 시대에, 제자는 두 마음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에 집중해야 합니다. "자기의 목숨을 보전하고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 자는 살리리라" (17:33)는 선언은 복음의 역설이자 구속사의 본질입니다. 자기 중심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자만이 참된 생명을 얻게 됩니다.

예수님은 끝으로 말씀하십니다. "두 사람이 한 자리에 누워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17:34). 이는 종말의 날에 일어날 명백한 분리를 가리킵니다. 같은 장소, 같은 삶의 환경 속에 있더라도, 하나님 나라의 기준은 외적인 것이 아니라 내면의 믿음과 순종에 따라 결정됩니다. 구속사는 결국 믿음으로 반응하는 자와 무관심으로 일관하는 자를 가르는 거룩한 구분입니다.

인자의 날은 심판이면서도 동시에 구원의 날입니다. 제자된 우리는 두려움이 아닌 소망과 믿음으로 그 날을 기다리며, 지금 이 자리에서 하나님 나라의 삶을 충성스럽게 살아가야 합니다. 종말은 미래가 아니라, 현재를 바르게 살아가게 하는 복음의 시급함입니다. 하나님 나라가 우리 안에 있고, 그 날은 분명히 오기에, 우리는 늘 깨어 준비되어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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