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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행전

누가복음 16장 강해

by 파피루스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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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6장

누가복음 16장은 돈과 영원한 가치에 대한 예수님의 가르침이 중심을 이룹니다. 예수님은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를 통해 이 세상의 재물을 지혜롭게 사용하여 장차 하나님 나라에 속한 삶을 준비할 것을 교훈하십니다. 돈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영원한 것을 위한 수단임을 밝히며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선언하십니다. 이어 바리새인들의 외식과 율법의 왜곡을 지적하시고, 간결한 율법 요약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새롭게 설명하십니다. 마지막으로 ‘부자와 나사로’의 이야기를 통해 현세의 부요함이 곧 영원한 복이 아님을 경고하시며, 회개 없이는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도 믿지 않을 것이라는 메시지를 강조하십니다. 이 장은 재물, 심판, 구속사에 대한 올바른 이해를 요구하며, 하나님 나라의 백성은 지금 이 땅에서부터 영원한 것을 준비해야 함을 강하게 촉구합니다.

누가복음 16장 구조분석 목록

  1.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16:1–13)
    • 청지기의 위기와 지혜 (16:1–8)
    • 재물의 올바른 사용과 충성의 기준 (16:9–13)
  2. 바리새인의 비웃음과 율법에 대한 교훈 (16:14–18)
    • 외식을 드러내시는 예수님의 책망 (16:14–15)
    • 율법과 선지자에 대한 정리와 결혼에 관한 언급 (16:16–18)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16:19–31)
    •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 이후의 반전 (16:19–23)
    • 간구와 불가능한 중재 (16:24–26)
    •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의 고집과 그에 대한 경고 (16:27–31)

1.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 (16:1–13)

지혜로운 행동인가, 불의한 계산인가? (16:1–8)

누가복음 16장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직접 하신 비유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어떤 부자에게 청지기가 있는데 그가 주인의 소유를 낭비한다는 말이 주인에게 들렸다"는 말로 도입되는 이 비유는 매우 독특합니다 (16:1). 청지기는 주인의 재산을 관리하는 자로서 신뢰를 기반으로 책임을 맡은 인물입니다. 그러나 이 청지기는 자신의 직무를 성실하게 감당하지 않고 재산을 허비했습니다. 주인은 그를 불러 해명을 요구하고 직무에서 해임하려 합니다 (16:2).

이 상황 속에서 청지기는 위기를 직시합니다. 그는 자신이 땅을 파거나 구걸할 능력도 없다고 자각하며, 자신을 도울 사람들을 만들어야겠다는 현실적 판단을 내립니다. 그래서 그는 주인에게 빚진 자들을 불러들여 그 채무를 감면해 줍니다. 이는 법적 혹은 도덕적으로 정당화되기 어려운 행위지만, 예수님은 이 청지기가 행한 일을 오히려 '지혜롭다'고 칭찬하십니다 (16:8).

이 칭찬은 그 청지기의 부정직함 자체가 아니라, 장래를 준비하는 지혜와 결단력을 높이 평가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아들들이 자기 시대에 있어서는 빛의 아들들보다 더 지혜롭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신앙인이 종말론적 시각에서 현재를 살아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세상의 사람들보다 더 둔감하고 비결단적인 삶을 사는 현실을 지적하는 말씀이기도 합니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우리의 삶은 언젠가 결산을 맞이하게 되며, 그 때를 대비하는 삶의 자세가 필요합니다.

작은 일에 충성된 자의 진실함 (16:9–12)

예수님은 이 비유를 바탕으로 매우 중요한 결론을 내리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불의의 재물로 친구를 사귀라 그리하면 그 재물이 없어질 때에 그들이 너희를 영원한 처소로 영접하리라" (16:9). 이 말씀은 재물 자체를 불의한 것으로 보시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재물이 영원한 생명을 보장할 수 없음을 전제로 하면서, 그것을 영원한 것을 위해 사용할 줄 아는 지혜를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지극히 작은 것에 충성된 자는 큰 것에도 충성되고 지극히 작은 것에 불의한 자는 큰 것에도 불의하다"고 하십니다 (16:10). 여기서 '지극히 작은 것'은 일차적으로 재물을 의미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이 세상의 재물은 작고 잠시의 것이며, 이것을 통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진정한 신뢰를 맡길 자격이 있는지를 시험하십니다. 우리가 정직하게 다루는 작은 것들이 곧 우리의 신앙의 진실함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불의한 재물에 충성하지 못한 자가 어찌 참된 것을 맡겠느냐고 반문하시며, "너희 것이 아닌 다른 사람의 것에 충성하지 아니하면 누가 너희의 것을 너희에게 주겠느냐"고 하십니다 (16:12). 이는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기업, 곧 영원한 상속과 관계된 말씀입니다. 우리의 신앙은 단지 하나님을 향한 감정의 고백이 아니라, 실제 삶 속에서의 태도와 결정, 특히 물질을 다루는 방식에서 명확히 드러납니다.

구속사는 단지 종말의 이야기가 아닙니다. 오늘 이 자리에서 어떻게 살아가는가에 따라 우리는 그 구속사의 흐름 속에 참여하거나, 멀어질 수 있습니다. 물질을 다룰 때 드러나는 신앙의 실제는 그 사람이 어떤 하나님 나라의 가치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는지를 보여줍니다. 우리는 재물을 통해 우리의 마음이 어디에 있는지를 시험받고 있는 것입니다.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는 인생 (16:13)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단호하게 선언하십니다. "집 하인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나니 혹 이를 미워하고 저를 사랑하거나, 혹 이를 중히 여기고 저를 경히 여김이라 너희는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느니라" (16:13). 이 말씀은 예수님의 윤리적 핵심이자, 제자도에 대한 분명한 선언입니다. 주인은 한 명이어야 하며, 우리의 마음과 삶을 통치하는 중심이 분열되어서는 안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섬긴다'는 말입니다. 단지 소유하거나 사용하는 수준이 아니라, 재물이 우리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재물을 우상처럼 여기고, 그것에 기대며 살아가는 삶은 결국 하나님께 온전히 속할 수 없는 상태를 낳습니다. 신앙은 배타적 충성을 요구합니다. 하나님을 따르는 삶은, 동시에 재물의 노예가 될 수 없는 길입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예수님께서 이 말씀을 하시는 시점은 종말을 앞둔 제자들을 훈련시키는 맥락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유업으로 받을 자들은, 지금 이 땅에서부터 무엇을 주인으로 삼고 사는지를 분별해야 합니다. 세상은 돈을 신처럼 섬기지만, 하나님의 백성은 그 돈을 도구로 삼아 영원한 것을 준비하는 자들입니다. 우리가 지금 다루는 재물은 그 자체로 시험이며, 동시에 사명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그 재물을 통해 하늘의 상급을 준비하라고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청지기의 비유는 세상의 기준으로 보면 부정직한 이야기이지만, 영원한 것을 바라보는 눈으로 보면, 놀라운 지혜의 본보기입니다. 예수님은 단지 '청지기처럼 되라'고 하신 것이 아니라, 그처럼 미래를 대비하며 지금을 의미 있게 살아내라고 하신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청지기로서, 맡은 것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충성을 증명해야 합니다. 그것이 곧 구속사 안에서 살아가는 자의 삶입니다.

 

2. 바리새인의 비웃음과 율법에 대한 교훈 (16:14–18)

외식의 가면을 벗기시는 예수님 (16:14–15)

예수님의 불의한 청지기 비유에 이어서, 바리새인들은 그 말씀을 듣고 비웃었습니다. 성경은 그 이유를 이렇게 밝힙니다. "바리새인들은 돈을 좋아하는 자들이라 이 모든 것을 듣고 비웃거늘" (16:14). 그들의 반응은 단순한 의견 차이나 이해 부족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 가치에 대한 정면 거부였으며, 그들의 마음이 여전히 세속적 탐심과 자기의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드러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그들의 숨은 의도를 꿰뚫는 복음의 빛이었고, 그 빛 앞에서 바리새인들의 외식은 본질적으로 드러나게 됩니다.

예수님은 그들에게 정면으로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사람 앞에서 스스로 옳다 하는 자들이나 너희 마음을 하나님께서 아시나니 사람 중에 높임을 받는 그것이 하나님 앞에는 미움을 받는 것이니라" (16:15). 이 말씀은 예수님의 공생애 내내 지속적으로 반복된 경고입니다. 바리새인들은 외적인 경건과 율법의 형식을 강조했지만, 하나님은 그들의 중심을 보시며, 외식과 자기의에 기초한 경건을 미워하신다는 선언입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이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외형이 아니라 중심에서부터 시작되며, 율법의 행위가 아닌 복음의 은혜에 반응하는 믿음으로 들어가는 곳입니다. 바리새인들이 의롭다고 자부하던 그 모든 경건은,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 정죄받는 교만의 증거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를 향해 묻고 계십니다. 우리는 사람 앞에서 옳다 여겨지려 하는가, 아니면 하나님 앞에서 옳다 여김을 받으려 하는가?

 

율법과 복음, 구속사의 전환 (16:16–17)

예수님은 율법에 대해 정리하며 말씀하십니다. "율법과 선지자는 요한의 때까지요 그 후부터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이 전파되어 사람마다 그리로 침입하느니라" (16:16). 이는 구속사의 큰 흐름을 압축한 요약이자 선언입니다.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을 예비하는 그림자였고, 이제는 복음이라는 실체가 임하였기에, 누구든지 그 나라에 들어오기 위해 치열하게 반응해야 한다는 도전이 주어집니다.

"침입하느니라"는 표현은 단순한 초청이 아니라 적극적인 반응을 요구하는 복음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옛 자아를 내려놓고, 예수님을 따르려는 결단이 필요합니다. 이는 율법의 시대에서 복음의 시대로 전환되는 역사의 중심에 있는 선언이며, 복음의 시대는 은혜를 받되 헛되이 받지 않아야 할 시기임을 강조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율법을 폐기하지 않으십니다. "율법의 한 획이라도 떨어짐보다 천지가 없어짐이 쉬우리라" (16:17)는 말씀은, 율법의 본질과 정신이 복음 안에서 더욱 온전하게 성취된다는 사실을 말해줍니다. 율법은 그 자체로 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이정표였고, 예수님은 그 율법을 완성하러 오셨습니다. 율법은 무너뜨릴 대상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하나님의 뜻입니다.

구속사는 율법에서 은혜로의 단절이 아닌, 연속적 성취입니다. 율법의 본뜻은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이며, 이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안에서 가장 완벽하게 실현되었습니다. 그러므로 복음 안에서 율법은 죽은 글자가 아니라, 생명의 빛으로 살아나며, 우리는 그 빛에 비추어 날마다 자신을 점검하고, 하나님의 뜻을 좇아 살아가는 자들로 부름 받았습니다.

 

율법을 자기 유익에 왜곡한 위선자들 (16:18)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결혼과 이혼에 관한 말씀을 예로 드십니다. "무릇 자기 아내를 버리고 다른 데 장가 드는 자는 간음함이요 무릇 남편에게서 버림을 받은 여자에게 장가 드는 자도 간음함이니라" (16:18). 이 말씀은 단순히 윤리적 지침을 주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당시 바리새인들과 종교 지도자들은 율법을 이용해 자기 유익을 추구하며, 아내를 쉽게 이혼시킬 수 있는 해석을 만들어낸 바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이러한 해석을 정면으로 거부하십니다. 율법을 자신에게 유리하게 조작하며 하나님 말씀을 변질시키는 그들의 위선을 드러내신 것입니다. 이는 단순한 결혼 문제를 넘어,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기준이 아니라 자신의 도구로 전락시킨 자들에 대한 강력한 경고입니다.

구속사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과 진리에 기초합니다. 사람의 편의나 해석에 따라 그 뜻이 흔들리거나 바뀌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히 유효하며 그 기준은 절대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왜곡하거나 이용하려는 자들은 결국 그 말씀에 의해 심판받게 될 것입니다. 참된 제자는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말씀대로 살아내려는 결단 속에서 구속사의 통로로 쓰임받게 됩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의 외형과 말씀이 일치하지 않는 삶을 지적하시며, 우리에게도 동일한 질문을 던지십니다. 우리는 말씀을 나의 삶에 맞추려 하는가, 아니면 나의 삶을 말씀에 맞추려 하는가? 구속사는 말씀을 살아내는 자들을 통해 지금도 이어지고 있으며, 그 말씀은 언제나 중심을 향해 다가오는 하나님의 음성입니다.

 

3. 부자와 나사로의 비유 (16:19–31)

이 땅에서의 삶과 죽음 이후의 반전 (16:19–23)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인간 삶의 가장 극단적인 대비를 보여주십니다. 자색 옷과 고운 베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롭게 즐기며 사는 부자와, 온몸에 헌데가 가득하고 부자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로 배를 채우려 했던 거지 나사로가 그 대상입니다 (16:19–20). 나사로는 문 앞에 버려진 채 개들이 헌데를 핥는 존재로 묘사됩니다 (16:21). 그는 이름이 밝혀진 인물로, 하나님께 기억되고 기록된 존재이며, 반면 부자는 이름 없이 등장합니다. 이는 구속사에서 중요한 메시지를 내포합니다. 하나님께 기억되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차이는 이 땅에서의 부요함이나 가난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에 있습니다.

둘 다 죽음을 맞이합니다. 나사로는 천사들에 의해 아브라함의 품에 안기고, 부자는 음부에서 고통 중에 눈을 들어 아브라함과 나사로를 멀리서 바라봅니다 (16:22–23). 이것은 세상과 전혀 다른 기준이 작동하는 하나님의 나라의 질서를 보여줍니다. 부자의 고통과 나사로의 위로는 단순한 위치 변화가 아니라, 구속사의 궁극적 전환입니다. 세상에서는 부자의 삶이 축복처럼 보였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형벌에 이르는 불신의 길이었고, 나사로의 가난한 삶은 고통 가운데서도 믿음으로 기다린 자에게 주어지는 하늘의 상급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당시 유대 사회에 만연했던 물질적 축복과 경건의 연관성을 무너뜨리십니다.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이나 재산의 유무로 판단하지 않으시며, 오히려 고통 중에도 하나님을 향해 의지한 자를 기억하시고 높이십니다. 구속사는 겉으로 드러나는 조건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믿음과 마음의 방향에 의해 결정됩니다.

 

간구와 불가능한 중재 (16:24–26)

고통 중에 있는 부자는 아브라함에게 간청합니다. 나사로를 보내어 손가락 끝에 물을 찍어 자신의 혀를 서늘하게 해달라고 요청합니다 (16:24). 이는 단순한 부탁이 아닙니다. 이 비유는 죽음 이후의 세계에서 인간이 자신의 처지를 바꿀 수 없음을 말합니다. 나사로에게 부자의 고통을 덜어달라는 이 요청은 아이러니하게도 생전에 나사로의 고통에 무관심했던 그의 삶을 되비추는 장면이기도 합니다.

아브라함은 말합니다. "아들아, 너는 네가 살았을 때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 그뿐 아니라 너희와 우리 사이에 큰 구렁이 놓여 있어 여기서 너희에게 건너가고자 하여도 갈 수 없고 거기서 우리에게 건너올 수도 없느니라" (16:25–26). 이 대화는 하나님의 공의가 얼마나 확고하며, 죽음 이후에는 더 이상 기회가 없음을 단언합니다.

구속사적으로 이는 매우 무거운 선언입니다. 회개와 구원은 이 땅에서 주어지는 유일한 기회이며, 죽음은 그 모든 기회의 종결을 의미합니다. 아브라함의 품은 하나님의 나라를, 음부는 하나님의 심판을 나타냅니다. 죽음 이후에는 두 영역 사이를 이어줄 다리가 없습니다. 구속사는 우리에게 오늘이라는 시간 안에서 회개하고 믿음으로 응답할 것을 촉구합니다. 내일은 보장되지 않으며, 죽음 이후에는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을 듣지 않는 자의 고집과 그에 대한 경고 (16:27–31)

부자는 자신의 형제 다섯이 아직 살아 있음을 언급하며, 그들에게 나사로를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고 회개하게 해달라고 간청합니다 (16:27–28).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렇게 답합니다. "그들에게는 모세와 선지자들이 있으니 그들에게 들을지니라" (16:29). 이는 곧 성경, 곧 하나님의 말씀이 이미 충분히 주어졌으며, 구원에 이르기에 부족함이 없다는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계시는 이미 명확하며, 더 많은 기적이나 초자연적 사건이 필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부자는 다시 간청합니다. "아니로소이다. 아버지 아브라함이여 만일 죽은 자에게서 그들에게 가는 자가 있으면 회개하리이다" (16:30). 하지만 아브라함은 단호히 말합니다. "모세와 선지자들에게 듣지 아니하면, 비록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는 자가 있을지라도 권함을 받지 아니하리라" (16:31). 이 말씀은 이후에 있을 예수님의 부활을 예고하며,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완고한 불신을 미리 보여주는 예언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의 이 비유는 기적이나 감정적 충격이 아니라, 오직 말씀을 통한 회개만이 구원에 이르는 길임을 강조합니다. 말씀을 무시한 채 기적만을 구하는 신앙은 결국 회개의 자리로 나아가지 못하고, 자기중심적 기대만을 반복하게 됩니다. 구속사는 말씀이 중심에 있고, 그 말씀 앞에 자신을 낮추고 귀 기울이는 자만이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됩니다.

오늘날도 우리는 동일한 부르심을 받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손에 주어졌고, 복음은 전해졌습니다. 더 많은 증거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이미 주어진 말씀에 대한 믿음의 응답이 필요합니다. 탕자의 회개처럼, 나사로처럼 이름 없이 살았지만 하나님께 기록된 자처럼, 말씀 앞에 겸손히 서는 자가 진정한 구속의 자리에 있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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