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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행전

누가복음 18장 강해

by 파피루스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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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8장

누가복음 18장은 예수님께서 기도와 겸손, 믿음과 제자도의 삶에 대해 비유와 사건을 통해 가르치신 장입니다. 예수님은 먼저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를 통해 항상 기도하며 낙심하지 말 것을 교훈하시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 비유를 통해 자기 의가 아닌 겸손한 회개가 의롭다 하심을 받는 길임을 밝히십니다. 이어 어린아이들을 품으시며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갈 자격은 단순한 신뢰와 겸손에 있음을 가르치시고, 부자 관원의 질문을 통해 재물보다 하나님을 우선하는 헌신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예수님은 다시 한 번 고난과 부활을 예고하시며 구속사의 중심을 십자가에 둡니다. 마지막으로 여리고에서 눈먼 맹인을 고치시며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자의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누가복음 18장 구조분석 목록

  1.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 (18:1–8)
  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18:9–14)
  3. 어린아이를 축복하심 (18:15–17)
  4. 부자 관원의 질문 (18:18–30)
    • 영생에 대한 질문과 율법 (18:18–21)
    • 재물과 하나님 나라 (18:22–27)
    • 제자들의 보상에 대한 약속 (18:28–30)
  5. 세 번째 수난 예고 (18:31–34)
  6. 여리고의 맹인을 고치심 (18:35–43)

1.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비유 (18:1–8)

낙심하지 말고 항상 기도하라 (18:1)

예수님은 이 비유의 목적을 명확히 밝히십니다. "예수께서 그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심하지 말아야 할 것을 비유로 말씀하여" (18:1). 이는 단순한 기도의 실천적 권면을 넘어서, 종말을 살아가는 제자들에게 주시는 중요한 구속사적 교훈입니다. '항상 기도한다'는 것은 단지 많은 시간을 기도에 투자하라는 의미가 아니라, 삶의 모든 순간을 하나님께 의지하며 사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뜻에 귀를 기울이고,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낙심하지 않는다는 것은 기도에 대한 즉각적인 응답이 없을지라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기다리는 인내를 의미합니다. 제자들은 종말의 고난 속에서 쉽게 지치고 흔들릴 수 있으므로,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마지막까지 믿음으로 견디는 기도의 삶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십니다. 구속사는 하나님이 주권적으로 이루어가시는 역사이지만, 그 역사에 참여하는 우리의 자세는 바로 이 '끈질긴 믿음'입니다. 우리는 응답이 없어 보이는 그 시간조차도, 하나님께서 일하고 계심을 믿고 나아가야 합니다.

불의한 재판장과 과부의 간청 (18:2–5)

예수님은 비유 속에 두 인물을 등장시킵니다. 한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는 불의한 재판장이며, 다른 하나는 억울함을 풀어 달라고 호소하는 한 과부입니다. 과부는 당시 사회적으로 가장 약한 계층으로, 법적 보호나 경제적 힘이 없는 자였습니다. 그녀의 반복적인 간청은 자기를 변호해 줄 힘도, 돈도, 지위도 없지만, 오직 부르짖음으로 자신의 억울함을 해결받으려는 간절함을 보여줍니다 (18:3).

재판장은 처음에는 그녀의 요청을 무시합니다. 그러나 과부의 끈질긴 요구에 마침내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고 사람을 무시하나 이 과부가 나를 번거롭게 하니 내가 그 원안을 풀어주리라 그렇지 않으면 늘 와서 나를 괴롭게 하리라 하였느니라" (18:4–5). 그는 정의감이나 자비에서가 아니라, 귀찮아서 응답합니다. 이 비유는 '이와 같이 하나님도 그렇다'는 뜻이 아니라, '하물며 하나님은 더욱 그러하지 않겠느냐'는 비교의 논리로 전개됩니다.

구속사에서 하나님은 결코 불의하거나, 무관심한 재판장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백성, 곧 택하신 자들의 부르짖음을 언제나 듣고 계시는 분이십니다. 우리가 하나님의 뜻을 구하며 기도할 때, 그 응답은 하나님의 때에, 하나님의 방식으로 반드시 이루어집니다. 과부의 끈질긴 기도는, 성도의 인내하는 믿음을 상징하며, 이는 하나님의 정의가 반드시 실현될 것을 향한 소망의 표현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루실 공의와 믿음의 응답 (18:6–8)

예수님은 이 비유를 마무리하며 결론적으로 말씀하십니다. "불의한 재판장이 말한 것을 들으라 하물며 하나님께서 그 밤낮 부르짖는 택하신 자들의 원안을 풀어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들에게 오래 참으시겠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속히 그 원안을 풀어주시리라" (18:6–8상). 하나님은 정의롭고 신실하신 분이며, 그분의 백성을 위해 반드시 일하시는 분이십니다. 다만 인간의 눈에는 더뎌 보일 수 있지만, 하나님의 때는 결코 늦지 않으며, 가장 완전한 때에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도전적인 질문을 던지십니다. "그러나 인자가 올 때에 세상에서 믿음을 보겠느냐 하시니라" (18:8하). 이 말씀은 비유 전체의 핵심을 요약합니다. 기도는 단지 문제 해결의 수단이 아니라, 종말을 향해 살아가는 제자의 믿음을 드러내는 행위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 끈질긴 기도로 하나님의 공의를 기다리는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완성이 가까이 다가오게 됩니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함께 흐르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그 이야기 속에서 잠잠하지 않고, 낙심하지 않으며, 하나님께 부르짖는 자로 살아야 합니다. 오늘날도 많은 믿음의 과부들이 세상의 부정과 불의 속에서 하나님께 소리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그 부르짖음을 들으시며, 속히 응답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도의 자리에서 낙심하지 않고, 주님의 오심을 기다리며 오늘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바로 구속사의 중심에 서는 제자의 삶입니다.

2. 바리새인과 세리의 비유 (18:9–14)

자기 의에 빠진 자를 향한 경고 (18:9)

이 비유는 예수님께서 어떤 사람들에게 말씀하신 것입니다. 성경은 그 대상이 누구인지 분명히 밝힙니다. "자기를 의롭다고 믿고 다른 사람을 멸시하는 자들에게 이 비유로 말씀하시되" (18:9). 이 말씀은 단지 외적인 행위의 문제가 아니라, 자기 의에 빠진 심령의 본질을 겨냥하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키고자 했고, 겉으로 보기엔 흠이 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이 의롭다고 여겼고, 그 기준으로 다른 사람들을 판단하고 무시했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볼 때, 자기 의는 복음의 가장 큰 장애물입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전적인 은혜로 이루어진 역사이며, 인간의 공로나 자격으로는 결코 구원의 자리에 설 수 없습니다. 자기를 의롭다 여기는 자는 은혜를 필요로 하지 않기에,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헛되이 여기는 결과를 낳습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 겉으로 경건한 자의 마음속 깊은 교만을 드러내시며, 진정한 회개와 믿음이 무엇인지를 대비하여 보여주십니다.

오늘날 우리도 신앙의 연수가 쌓이고, 사역과 봉사가 익숙해질수록 쉽게 자기 의에 빠질 수 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보다 더 예배에 열심이며, 더 기도하며, 더 바르게 살고 있다는 마음이 들 때, 우리는 어느덧 바리새인의 자리에 서게 됩니다. 주님은 바로 그 자리에 경고의 메시지를 던지십니다. 진정한 의는 스스로 세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주시는 의이며, 그 의는 오직 겸손한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것입니다.

바리새인의 기도와 세리의 고백 (18:10–13)

비유는 두 사람이 성전에 기도하러 올라가는 장면으로 시작됩니다. 한 사람은 바리새인이고, 한 사람은 세리입니다. 바리새인은 "서서 따로 기도하여 이르되 하나님이여 나는 다른 사람들 곧 토색, 불의, 간음을 하는 자들과 같지 아니하고 이 세리와도 같지 아니함을 감사하나이다" (18:11)라고 말합니다. 그의 기도는 감사의 형식을 띠고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자랑과 비교의 교만이 가득 찬 말입니다. 그는 자신의 금식과 십일조를 내세우며, 하나님 앞에 자격을 주장합니다 (18:12).

반면 세리는 멀리 서서 감히 하늘을 우러러보지도 못하고, 다만 가슴을 치며 말합니다. "하나님이여 불쌍히 여기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18:13). 그의 기도에는 자기 자랑이 없고, 오직 자신의 죄를 인정하며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고백만이 있습니다. 이 대조는 단순한 외형의 차이가 아닙니다. 이는 하나님 앞에 서는 자의 마음 자세, 곧 복음을 받아들이는 자의 심령 상태를 보여주는 결정적인 장면입니다.

구속사는 자격 있는 자를 세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자격 없는 자를 은혜로 불러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으시는 이야기입니다. 세리는 스스로 의로울 수 없음을 알았기에, 하나님께만 소망을 두었습니다. 이 마음이 곧 믿음이며, 회개이며, 구원의 문을 여는 열쇠입니다. 하나님은 겸손한 자를 높이시고, 자기를 낮추는 자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기도는 그 사람의 신학이며, 신앙의 방향을 드러내는 거울입니다. 우리는 지금 어떤 기도를 드리고 있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의롭다 하심을 받는 자의 조건 (18:14)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매우 명확하게 선언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에 저 세리가 의롭다 하심을 받고 그의 집으로 내려갔고 바리새인은 그렇지 아니하였느니라" (18:14). 의롭다 하심, 곧 칭의는 인간의 선행이나 공로로 얻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자신의 죄를 인정하고 하나님의 자비에 의지하는 믿음을 통해 주어지는 선물입니다. 이는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복음의 진리입니다.

예수님은 이어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 (18:14). 하나님의 나라는 거꾸로 된 나라입니다. 세상에서는 높아지려 하면 성공이라 여기지만, 하나님 나라에서는 자기를 낮추는 자가 높아짐을 입습니다. 세상의 정의는 자격과 경쟁에 따라 움직이지만, 하나님 나라의 정의는 은혜와 겸손에 따라 움직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성전 앞에 서 있습니다. 우리의 입술은 기도를 말하고 있지만, 그 기도가 자기 자랑인지, 하나님의 자비를 구하는 회개인지 스스로 점검해야 합니다. 복음은 자기를 포기하고 하나님을 붙드는 자에게 주시는 구원의 능력입니다. 구속사의 자리에 서 있는 자는 항상 자신을 낮추며, 하나님 앞에 은혜를 구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만이 하나님께서 의롭다 하시는 자입니다.

3. 어린아이를 축복하심 (18:15–17)

사람들의 반응과 제자들의 제지 (18:15)

누가복음 18장 15절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 사람들이 예수께서 만져 주심을 바라고 자기 어린 아기를 데리고 오매 제자들이 보고 꾸짖거늘" (18:15). 당시 유대 사회에서는 랍비가 어린아이에게 안수하여 축복하는 관습이 있었습니다. 많은 부모들이 자신의 자녀들을 예수께 데려온 것도 그 기대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장면에서 이들을 꾸짖습니다. 제자들이 보기에 어린아이는 아직 하나님 나라의 대화에 적합하지 않은 존재였고, 예수님의 시간을 방해하는 비본질적인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제자들의 이러한 반응은 예수님의 마음과 정면으로 충돌합니다. 예수님은 외면당하고 무시당하는 자들, 사회적으로 소외된 자들을 한결같이 품어주신 분이셨습니다. 어린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제자들은 여전히 하나님 나라의 질서를 세상적인 권력 구조와 영향력으로 오해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구속사적 사역의 방향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초청은 조건 없는 은혜이며, 누구에게나 열려 있는 복음의 부르심입니다.

오늘날 교회 안에서도 우리는 종종 외적인 조건이나 유익을 기준으로 사람을 판단할 때가 많습니다. 그러나 주님께서 받으시는 자는 단지 이성적 이해나 사회적 자격이 있는 자가 아니라, 오직 은혜를 받아들이는 자입니다. 어린아이는 바로 그런 복음의 수용성, 순전함을 상징하는 존재입니다.

예수님의 수용과 축복의 선언 (18:16)

예수님은 제자들의 꾸짖음을 멈추시고, 전혀 다른 태도를 보이십니다. "예수께서 그 어린아이들을 불러 가까이 하시고 이르시되 어린 아이들이 내게 오는 것을 용납하고 금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 (18:16). 예수님은 어린아이들을 가까이 부르십니다. 그들을 무시하지 않으셨고, 그들을 제자의 자리에까지 세우셨습니다.

이 구절에서 핵심은 "하나님의 나라가 이런 자의 것이니라"는 선언입니다. 어린아이는 당시 사회에서 가장 작은 자, 보호받아야 할 자, 의존적인 자의 전형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이들에게 하나님의 나라가 속한다고 말씀하십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나라는 스스로 자격을 주장하거나, 공로를 앞세우는 자가 아니라, 전적인 의존과 신뢰로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의 것임을 의미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보면, 하나님 나라의 성격은 전적으로 은혜에 기반합니다. 인간의 노력이나 조건이 아닌, 하나님의 선한 뜻에 따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됩니다. 어린아이는 그 어떤 조건도 내세울 수 없습니다. 그는 다만 의존하고, 신뢰하고, 순종할 뿐입니다. 바로 그런 자세가 구원의 자리로 나아가는 자의 마음이어야 한다는 것을 예수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우리는 신앙생활을 하다 보면 자신도 모르게 무엇인가를 이룬 것처럼 착각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언제나 처음 자리, 어린아이 같은 자세로 주님 앞에 서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은 전적인 의존 가운데 오는 자, 그 은혜 없이는 살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게 하십니다. 이것이 복음이며, 구속사의 문은 늘 낮고 좁습니다.

어린아이와 같은 자의 믿음 (18:17)

예수님은 이 장면을 이렇게 마무리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하나님의 나라를 어린 아이와 같이 받들지 않는 자는 결단코 그 곳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18:17). 이 말씀은 단순한 어린아이 예찬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린아이와 같은 자세, 곧 자기를 부인하고 겸손히 주님 앞에 나아가는 믿음 없이는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다는 진리를 선포하신 것입니다.

여기서 '받들다'는 표현은 단순한 수용이 아니라, 존중하고 소중히 여기며 받아들이는 태도까지 포함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단지 정보나 교리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생명과 진리로 받아들여 내 삶 전체를 맡기는 자세가 바로 어린아이 같은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계산하거나, 조건을 따지지 않고, 부모의 말을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따릅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런 믿음을 통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간다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구속사의 본질은 전적인 은혜이며, 이 은혜는 믿음으로만 붙잡을 수 있습니다. 그 믿음은 강한 믿음이 아니라, 단순한 믿음이며, 순전한 믿음입니다. 어린아이는 자기 자랑이 없고, 자신의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며, 오직 의존과 신뢰로 반응합니다. 우리가 구원에 이르는 길은 바로 이런 방식입니다. 하나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를 거절하시고, 자기를 낮추는 자를 받으십니다.

예수님은 이 짧은 장면을 통해 하나님 나라의 본질을, 그리고 그 나라에 들어가는 참된 자세를 분명하게 보여주셨습니다. 우리는 언제나 다시 어린아이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커질수록, 더 단순한 믿음, 더 깊은 신뢰, 더 낮은 자리로 나아가야 합니다. 그것이 구속사의 흐름 속에 참여하는 제자의 길입니다.

4. 부자 관원의 질문 (18:18–30)

영생에 대한 질문과 율법 (18:18–21)

한 관리가 예수께 질문합니다. "선한 선생님이여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18:18). 이 질문은 겉보기에 신앙적 열망을 담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먼저 질문자의 표현을 바로잡으십니다. "네가 어찌하여 나를 선하다 일컫느냐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느니라" (18:19). 이는 예수님의 선하심을 부정하시는 것이 아니라, 그가 진정으로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있느냐는 반문이자, 진리의 초점을 하나님께로 바로 돌리시는 응답입니다.

예수님은 이어 율법을 인용하십니다.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거짓 증언하지 말라, 네 부모를 공경하라" (18:20). 이에 대해 그 관원은 "이 모든 것을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18:21)라고 대답합니다. 그는 외적인 율법의 행위는 충실히 따랐다고 자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마음 깊은 곳, 곧 율법의 본질과 자기중심성의 문제를 드러내시고자 하셨습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율법은 구원의 수단이 아니라, 인간의 죄됨을 깨닫게 하는 거울입니다. 이 부자 관원은 율법의 조항은 지켰을지 몰라도, 율법이 요구하는 하나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본질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자신의 의로 만족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진정한 영생의 길이 행위나 자격이 아니라, 전적인 헌신과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의 믿음임을 알려주시려는 것입니다.

재물과 하나님 나라 (18:22–27)

예수님은 그 관원의 내면을 아시고 말씀하십니다. "네게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으니 네게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라 그리하면 하늘에서 보화가 네게 있으리라 그리고 와서 나를 따르라" (18:22). 이는 단순히 재산을 버리는 것이 목적이 아니라, 그의 삶의 중심이 무엇인지, 진정한 주인이 누구인지 드러내기 위한 도전입니다. 그러나 그 사람은 큰 부자였으므로 매우 근심하며 떠나갑니다 (18:23).

예수님은 이어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재물이 있는 자는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얼마나 어려운지" (18:24). 낙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쉽다는 과장된 비유는, 재물이 사람의 마음을 얼마나 강하게 붙잡고 있는지를 상징적으로 드러냅니다. 제자들이 놀라며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십니다. "무릇 사람의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 (18:27).

이 구절은 구속사의 본질을 선언합니다. 구원은 인간의 능력으로는 도달할 수 없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우리는 재물, 자격, 노력, 윤리로 하나님 나라에 이를 수 없습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그의 부르심과 역사하심에 의해 들어갈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자격을 철저히 무너뜨리고, 오직 하나님의 능력만을 의지하는 자만이 구속사의 백성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줍니다.

제자들의 보상에 대한 약속 (18:28–30)

베드로는 질문합니다. "보소서 우리가 우리의 것을 다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18:28). 이는 어느 정도 자신들의 희생과 헌신에 대한 보상의 기대가 담긴 말입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정죄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놀라운 약속으로 응답하십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집이나 아내나 형제나 부모나 자녀를 버린 자는 금세에 여러 배를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 (18:29–30).

여기서 예수님은 제자도의 대가가 결코 헛되지 않음을 약속하십니다. 복음과 하나님 나라를 위해 버린 모든 것들은 이 세상에서 여러 배의 위로와 보상을 받을 것이며, 장차 오는 세상에서는 영생이라는 가장 큰 상급을 누리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는 구속사에 참여한 자들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신실한 보증입니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이 땅의 것들을 내려놓는 자들을 통해 이루어져 갑니다. 그 길은 헌신과 희생을 요구하지만, 결코 외면받지 않으며, 하나님은 그 모든 것을 기억하십니다. 하나님 나라는 단지 미래의 약속이 아니라, 지금도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들의 삶 속에 역사하며, 그들에게 참된 위로와 능력을 부어주십니다.

우리는 이 부자 관원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으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배우게 됩니다. 그것은 율법을 지키는 수준의 신앙이 아니라, 자신의 모든 것을 주님께 맡기고 따르는 전적인 순종이며, 그것은 단순한 윤리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에 붙들린 자만이 가능한 믿음의 여정입니다. 그리고 그 길은 반드시 구속사의 결실인 생명으로 이어집니다.

5. 세 번째 수난 예고 (18:31–34)

예루살렘으로 향하는 여정의 목적 (18:31)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을 따로 데리시고 다시 한 번 그분의 수난과 죽음, 부활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이는 누가복음에서 세 번째 수난 예고입니다. "보라 우리가 예루살렘에 올라가노니 선지자들을 통하여 기록된 모든 것이 인자에게 응하리라" (18:31). 여기서 강조되는 것은 '기록된 모든 것'이 '응한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의 수난은 우연하거나 인간의 배반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 역사 속에서 이미 예언되었고 철저히 계획된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이 단순한 순례나 사역의 연장이 아니라, 십자가를 향한 결단된 행보임을 분명히 밝히십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장면은 하나님의 약속이 실제로 성취되어 가는 과정을 드러냅니다. 구약의 선지자들, 시편과 율법서에 이미 기록된 고난받는 종의 모습이 이제 예수님의 삶을 통해 실현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도 때때로 고난의 길을 우연이라 여기거나 피해야 할 운명처럼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 붙들린 인생은 고난조차도 구속사의 일부가 될 수 있습니다. 예수님처럼 우리도 순종의 걸음을 걸을 때, 하나님께서 미리 기록하신 구원의 이야기에 참여하게 됩니다.

고난의 세부 묘사와 제자들의 이해 부족 (18:32–33)

예수님은 자신이 장차 당할 고난을 구체적으로 말씀하십니다. "그가 이방인들에게 넘겨지겠고, 희롱을 당하며, 능욕을 받고, 침 뱉음을 당하겠고, 채찍질하고 죽일 것이나 그는 삼일 만에 살아나리라" (18:32–33). 이 말씀에는 구속사의 핵심이 담겨 있습니다. 인자는 사람들에게 버림받을 뿐 아니라, 조롱과 모욕, 고통과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이루게 됩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단순한 종교적 순교나 도덕적 모범이 아니라, 인간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하나님의 절대적 희생이었습니다. 삼일 만에 살아날 것이라는 부활의 약속은 이 고난이 끝이 아니며, 영광으로 이어질 것임을 보여주는 구원의 확신입니다. 십자가 없이는 부활도 없으며, 고난 없이는 영광도 없습니다.

그러나 제자들은 이 말씀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이 말씀을 하나도 깨닫지 못하였으니 그 뜻이 감추어졌음이라 그들은 그 이르신 바를 알지 못하였더라" (18:34). 이는 단지 지식의 부족이 아니라, 메시아에 대한 기대와 구속사의 방식에 대한 이해가 아직 율법적, 정치적 틀 안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여전히 영광의 왕을 기대했지만, 예수님은 고난의 종으로 오셨습니다. 구속사의 길은 인간의 기대를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는 길입니다.

6. 믿음으로 눈을 뜨는 자 (18:35–43)

예수님이 여리고에 가까이 가실 때, 한 맹인이 길가에 앉아 구걸하고 있다가 예수께서 지나가신다는 말을 듣습니다. 그는 소리 질러 말합니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18:38). 많은 사람들이 그를 꾸짖으며 조용히 하라고 하지만, 그는 더욱 소리 지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예수님의 정체를 깨닫고 있는 자와 그렇지 않은 자의 분명한 대비를 봅니다.

예수님은 그를 부르시고 묻습니다. "네게 무엇을 하여 주기를 원하느냐?" 그는 대답합니다.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18:41).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 (18:42). 그는 즉시 보게 되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예수님을 따릅니다. 구원은 단순히 육체의 회복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는 삶의 전환을 의미합니다.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맹인의 눈뜸은 단지 기적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의 실체를 상징합니다. 이 사건은 앞서 수난 예고를 이해하지 못한 제자들과 대조를 이룹니다. 제자들은 눈은 떴지만 마음은 가려져 있었고, 맹인은 육체의 눈은 가렸으나 믿음으로 예수님을 알아보았습니다.

믿음은 예수님을 알아보는 눈이며, 구속사는 그런 눈을 가진 자들을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님은 고난의 길을 걸어가시면서도, 중간에 멈추지 않고 외면당한 한 사람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를 회복시키십니다. 이것이 구속사의 방식입니다. 예수님의 길에는 언제나 고난과 영광, 외면과 회복, 십자가와 부활이 함께 놓여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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