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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행전

누가복음 21장 강해 설교

by 파피루스 2025. 4.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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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21장 전체 요약

누가복음 21장은 예수님께서 종말과 성전 파괴에 관해 하신 예언과 교훈으로 구성됩니다. 가난한 과부의 헌금에서 시작하여, 제자들의 성전 건물에 대한 찬탄을 계기로 예수님은 앞으로 있을 성전 파괴, 환난, 종말, 인자의 재림에 대해 말씀하십니다. 역사적 사건과 종말적 사건이 겹쳐지는 방식으로 기술되며, 신자들에게 고난 속에서도 인내와 깨어 있음, 준비된 삶을 강조합니다. 끝날 때가 다가올수록 신자의 자세는 두려움이 아닌 담대함과 깨어 있는 믿음이어야 하며, 예수님은 마지막 날에 인자의 권능과 영광 가운데 오실 것을 선언하시며, 제자들에게 종말을 준비하라고 당부하십니다.

 

누가복음 21장 구조 분석 목록

  1. 가난한 과부의 헌금 (21:1–4)
  2. 성전 파괴 예언 (21:5–6)
  3. 재난과 박해의 징조 (21:7–19)
  4.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21:20–24)
  5. 인자의 재림과 마지막 날의 징조 (21:25–28)
  6. 무화과나무의 비유 (21:29–33)
  7. 깨어 있으라 하심 (21:34–38)

누가복음 19장의 신학적 핵심 주제 요약

누가복음 19장은 누가복음의 전환점이자,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 직전과 그 직후의 중요한 장면들이 압축되어 나타나며, 신학적으로 매우 밀도 높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먼저 삭개오의 회심(19:1–10)은 누가복음 전체의 중심 주제인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 오신 인자”의 사역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세리장 삭개오는 사회적으로 경멸받던 자였으나 예수님은 그를 찾아가 구원을 선포하심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도덕적 자격이나 사회적 평가와 상관없이 회개하는 자에게 주어진다는 복음의 진리를 드러냅니다. 또한 그의 실천적 회개는 구원이 실제 삶의 변화로 이어져야 함을 보여줍니다.

이어서 등장하는 '므나의 비유'(19:11–27)는 하나님의 나라가 당장 가시적으로 임하지 않더라도, 신자들에게 위임된 책임과 충성의 중요성을 강조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종말론적으로 이미 시작되었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으며, 종들은 그 사이에 충성으로 살아야 합니다. 또한 이 비유는 하나님의 나라를 거부한 자들에게 주어질 심판도 예고합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19:28–40)은 그분의 메시아적 자기 계시이며, 나귀 타심은 겸손한 왕, 평화의 왕으로 오신 메시아의 성취입니다. 백성들의 환호는 메시아 대망을 반영하지만, 예수님은 이내 예루살렘을 향해 눈물 흘리십니다(19:41–44). 이는 하나님께서 평화를 주러 오셨으나 그 기회를 거절한 도성에 대한 애통이며, 성전 파괴라는 역사적 심판을 예고합니다.

마지막 성전 정결 사건(19:45–48)은 예배 회복의 선언이며, 예수님께서 새로운 성전, 즉 그분 자신을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새 길을 열 것임을 암시합니다. 성전 중심의 종교는 무너지고,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구속사가 대체하게 됩니다.

요약하자면 누가복음 19장은 구속사의 중심인 회심, 심판, 회복이라는 세 가지 신학적 흐름이 집중되어 있으며, 예수님의 메시아 정체성과 그에 대한 인간의 반응, 그리고 종말론적 준비의 중요성을 모두 담고 있는 결정적인 장입니다.


1. 가난한 과부의 헌금 (21:1–4)

예수님의 시선이 머문 자리

예수님께서는 성전 헌금함 앞에 앉으셔서 사람들이 헌금하는 모습을 주의 깊게 보십니다. 부자들은 그들의 풍족함 중에서 헌금을 드렸지만, 한 가난한 과부는 생활비 전부인 두 렙돈, 곧 한 고드란트를 드립니다 (21:2). 예수님은 이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시며, "이 과부는 그들의 모든 사람보다 많이 넣었도다"라고 하십니다 (21:3).

예수님께서는 액수보다 헌금의 중심을 보십니다. 다른 이들은 남는 것 중에서 드렸지만, 이 과부는 자신의 삶 전체를 하나님께 의탁하며 드렸습니다. 이 장면은 단순한 기부가 아닌, 전적인 헌신과 신뢰의 표현이었습니다. 하나님께 드리는 것이란 재산의 일부가 아니라 마음의 전부를 드리는 일입니다.

과부는 성전 시스템 속에서 가장 약한 존재였습니다. 그러나 그 누구보다 하나님의 눈길을 끄는 믿음을 보였습니다. 예수님의 시선은 화려한 헌금보다, 눈물 섞인 믿음의 결단에 머뭅니다. 우리는 오늘 무엇을 드리고 있는가, 혹은 어떤 마음으로 드리고 있는가를 돌아보게 됩니다.

헌신은 남김이 아닌 전부에서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과부가 "생활비 전부를 넣었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21:4). 이는 단순히 가진 것 없는 자가 가진 것 없는 대로 드린 수준이 아니라, 자기 생존의 기초를 하나님께 맡긴 믿음의 표현입니다. 그녀의 드림은 현실적 계산을 초월한 믿음의 행위였습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과부의 행동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예표하는 행위입니다. 예수님 역시 자신을 조금만 드리신 것이 아니라, 몸과 피, 생명 전부를 아낌없이 하나님과 우리를 위해 드리셨습니다. 이 과부는 당시에는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지만, 예수님의 입을 통해 복음서에 영원히 기록되는 명예를 얻게 됩니다.

하나님은 여전히 과부의 렙돈 같은 헌신을 찾으십니다. 세상은 큰 것을 보지만, 하나님은 전부를 드리는 작은 믿음을 기억하십니다. 참된 헌신은 남은 것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장 귀한 것을 기꺼이 내어드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하나님 나라 백성의 참된 가치관

이 사건은 단순히 헌금에 대한 교훈을 넘어, 하나님 나라 백성의 가치관을 반영합니다. 부자들은 성전이라는 제도 속에서 드렸지만, 그 마음은 자기 중심이었고, 과부는 제도 속에서 철저히 소외되었으나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한 믿음을 가진 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중심을 보시며, 인간의 평가와 반대되는 판단을 내리십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가 겉으로 보기에 화려하고 큰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보잘것없는 자의 깊은 믿음 속에 있음을 선언하십니다. 이 과부의 이야기는 오랜 종교 전통과 제도 속에서도 진정한 경건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게 합니다.

2. 성전 파괴 예언 (21:5–6)

인간의 자랑과 하나님의 경고

제자들 중 몇 사람이 성전의 아름다운 돌과 예물 장식을 칭찬합니다 (21:5). 그 장엄함은 유대 민족의 정체성과 영광을 상징했으며, 사람들의 자긍심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영광의 건축물에 대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려지리라"고 선언하십니다 (21:6).

이 말씀은 충격적이었을 것입니다. 성전은 단지 건축물이 아닌, 하나님의 임재와 언약의 중심지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성전이 더 이상 하나님의 뜻을 담는 장소가 아니며, 인간의 외식과 교만으로 오염되었음을 아셨습니다. 겉은 웅장하지만, 안은 공허하고 부패했던 성전은 이제 무너져야 할 대상이었습니다.

이 선언은 역사적으로 AD 70년 로마에 의해 실제 성전이 파괴됨으로 성취되었습니다. 동시에 이는 새로운 시대, 곧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 성전의 도래를 상징하는 구속사적 전환점이 됩니다.

무너지는 구조물, 시작되는 새 질서

예수님의 예언은 단지 건축물의 붕괴가 아니라, 구속사의 구조 전환을 의미합니다. 더 이상 돌로 지은 성전이 하나님의 임재처가 아니라, 예수님 자신이 참 성전이며, 그분 안에서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이 열렸습니다. 성전 중심 신앙에서 예수 그리스도 중심 신앙으로 패러다임이 옮겨지고 있는 것입니다.

구약의 성전은 죄 사함과 제사를 통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장소였지만, 이제 예수님은 단번에 자기 자신을 속죄 제물로 드리셔서, 우리에게 참된 구원을 열어주시는 새 언약의 성전이 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전의 파괴는 심판이자 동시에 구속사의 새 질서의 시작입니다.

참된 예배는 어디에 있는가

이 말씀은 오늘날의 교회와 신자들에게도 도전이 됩니다. 우리는 외형의 화려함이나 숫자의 크기를 자랑하지만, 하나님은 언제나 중심과 진정한 경건을 찾으십니다. 성전은 화려했지만 죽어 있었고, 과부는 보잘것없지만 살아 있는 예배자였습니다.

하나님은 새로운 성전, 곧 성령이 거하시는 우리 각 사람을 통해 예배받기를 원하십니다. 돌 위에 돌이 무너져도, 그리스도 안에 세워진 성전은 무너지지 않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디에 중심을 두고 있는가, 참된 예배와 하나님의 임재를 어떻게 살아내고 있는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3. 재난과 박해의 징조 (21:7–19)

종말의 질문, 종말의 준비

제자들은 성전 파괴 예언을 듣고, "이 일이 언제 있겠사오며 이런 일이 일어나려 할 때에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라고 묻습니다 (21:7). 인간의 본성은 '언제'와 '어떻게'에 집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시기보다 태도에 주목하십니다.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고 경고하십니다 (21:8).

거짓 messiah, 전쟁, 지진, 기근, 전염병 등 여러 재난이 일어나겠지만, 이는 끝의 본질이 아니라 과정일 뿐입니다 (21:9–11). 예수님은 종말을 두려워하기보다, 믿음을 지키는 삶의 태도를 강조하십니다. 종말은 두려움의 사건이 아니라, 믿음의 인내를 시험하고 정결케 하는 시기입니다.

구속사의 관점에서 종말의 징조는 하나님의 나라가 다가오고 있다는 거대한 흐름 안에 있는 사건입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시대의 혼란 속에서도 진리에 흔들리지 않고 깨어 있어야 합니다.

박해의 때에 드러나는 증거

예수님은 제자들이 회당과 감옥에 넘겨지고, 임금들과 청독들 앞에 서게 될 것이라 말씀하십니다 (21:12). 그러나 이는 고난이 아니라 증언의 기회입니다. "이 일이 도리어 너희에게 증거가 되리라" 하십니다 (21:13).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사전에 변명할 말을 준비하지 말라 하시며, 직접 입과 지혜를 주시겠다고 약속하십니다 (21:14–15). 이는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하신다는 보증이며, 박해가 곧 하나님 나라의 확장이라는 역설적 메시지입니다. 복음은 늘 고난 가운데 전파되며, 고난은 복음을 드러내는 통로가 됩니다.

제자들은 심지어 부모, 형제, 친척, 친구에게까지 배신당하고, 죽임을 당하기도 할 것입니다 (21:16). 그러나 그 가운데서도 하나님은 그들의 생명을 지키시며, 머리털 하나도 상하지 않게 하실 것이라고 약속하십니다 (21:18). 이는 영원한 보호의 약속이며, 죽음을 초월한 생명의 보장이기도 합니다.

인내로 구원을 이룰 자들

"너희의 인내로 너희 영혼을 얻으리라" (21:19)는 말씀은 구속사 전체에서 매우 중요한 구절입니다. 신앙은 일회적 결단이 아니라, 끝까지 견디는 길입니다. 인내는 믿음을 현실 속에서 증명하는 행위이며, 구속의 열매가 삶 속에서 맺어지는 과정입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이 말씀을 붙잡고 수많은 박해 속에서도 복음을 지켰습니다. 오늘날 우리도 동일한 영적 전선에 서 있습니다. 미혹과 고난이 가득한 세상에서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붙들고 인내해야 합니다. 인내는 약한 자의 순응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강한 믿음의 표현입니다.

4. 예루살렘의 멸망 예고 (21:20–24)

성전이 아닌 예루살렘의 심판

예수님은 이어서 예루살렘의 구체적인 멸망에 대해 예언하십니다. "예루살렘이 군대들에게 에워싸이는 것을 보거든 그 멸망이 가까운 줄을 알라" 하십니다 (21:20). 이는 역사적으로 AD 70년 로마의 타이터스 장군이 예루살렘을 포위하고 파괴한 사건을 지칭합니다.

이 심판은 단순한 군사적 결과가 아니라, 하나님의 거절에 대한 응답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을 향해 수차례 회개를 촉구하셨고, 눈물로 경고하셨습니다. 그러나 백성은 메시아를 거절했고, 그 거절의 결과가 역사 속에 심판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단지 과거의 일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지속적으로 거절하는 자에게 결국 공의가 임한다는 구속사의 원리를 보여줍니다. 은혜는 영원히 열려 있지 않습니다. 회개의 때를 무시할 때, 심판은 역사 속에 현실이 됩니다.

도망하라, 기회를 붙잡으라

예수님은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하고, 성 안에 있는 자들은 성 밖으로 나가라고 하십니다 (21:21). 이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경고입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때, 물리적 회피가 아닌 영적 깨어 있음과 분별력이 요구됩니다.

"이 날들은 기록된 모든 것을 이루는 징벌의 날이니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의 계획 안에 있는 심판의 성취를 뜻합니다 (21:22). 재앙의 날조차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으며, 모든 역사는 구속사의 흐름 가운데 움직이고 있습니다.

믿는 자는 그날을 피하는 데에만 집중할 것이 아니라, 그날이 오기 전 복음을 전하고, 하나님 앞에 바로 서야 할 책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징조를 보는 눈은 회개와 결단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이방인의 때와 하나님의 나라

예루살렘은 이방인들에게 짓밟히며, "이방인의 때가 차기까지 그렇게 되리라" 하십니다 (21:24). 이는 하나님의 구원이 이스라엘을 넘어 이방인에게로 확장될 것을 시사합니다. 유대인의 불순종은 이방인의 구원의 기회가 되었으며, 이는 바울이 로마서에서 강조한 구속사의 대역전입니다.

이방인의 때가 찬다는 것은, 정해진 때에 하나님의 구속사가 완성되고, 메시아가 다시 오심으로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실현된다는 약속입니다. 따라서 지금은 이방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고 있는 구속사의 '은혜의 때'이며, 우리는 이 기회를 사모하며 복음에 참여해야 합니다.

5. 인자의 재림과 마지막 날의 징조 (21:25–28)

천체의 요동과 불안한 세상

예수님은 마지막 날의 징조로 해와 달과 별들에 징조가 있고, 땅에서는 민족들이 혼란에 빠질 것이며, 사람들이 세상에 일어날 일을 무서워하여 기절할 것이라 하십니다 (21:25–26). 이는 단순한 자연재해가 아니라, 온 우주적 질서의 흔들림이며, 피조세계가 창조주 앞에 서게 될 마지막 경고입니다.

이 징조들은 하나님의 통치가 완전하게 드러날 날이 가까이 왔음을 의미합니다. 그 날은 하나님을 모르는 자에게는 심판의 날이지만, 믿는 자에게는 구원의 날입니다. 세상의 불안은 믿는 자의 소망을 밝히 드러내는 기회입니다.

인자가 구름을 타고 오심

"그 때에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 (21:27). 이는 다니엘서 7장을 배경으로 한 재림의 선언입니다. 초림의 예수님은 겸손한 나귀를 타고 오셨지만, 재림하시는 주님은 영광 중에, 온 세상의 심판자이자 왕으로 오십니다.

구속사의 절정은 인자의 재림입니다. 초림에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재림으로 완성되며, 그날은 모든 권세가 예수 그리스도 앞에 무릎 꿇는 날입니다. 이 장면은 위로가 아닌 경고이며, 준비된 자에게는 소망의 성취입니다.

머리를 들라, 구원이 가까웠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웠느니라" (21:28). 이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격려이며, 종말의 징조 앞에서 신자의 올바른 태도를 가르쳐 주는 말씀입니다.

우리는 세상의 징조 앞에서 머리를 숙이는 자가 아니라, 머리를 들고 하나님을 바라보는 자들입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구속은 완성되고, 하나님의 나라는 흔들리지 않기 때문입니다. 종말의 날은 절망의 날이 아니라, 주님과의 만남이 완성되는 영광의 날입니다.

오늘 우리는 이 날을 두려워하지 말고, 기쁨으로 준비하며, 깨어 있어야 합니다. 인자의 재림은 모든 신자에게 최종적인 회복과 승리를 약속하는 복된 날입니다.

6. 무화과나무의 비유 (21:29–33)

자연의 징조, 종말의 징조

예수님은 무화과나무와 모든 나무를 예로 들어 말씀하십니다. "싹이 나면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너희도 이런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하십니다 (21:30–31). 이는 종말의 징조들이 자연의 계절 변화처럼 확실하고 분명하다는 것을 강조하는 비유입니다.

예수님은 자연의 이치를 통해 제자들에게 영적 분별력을 요구하십니다. 계절의 변화를 아는 것처럼, 시대의 징조를 분별하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인식해야 합니다. 종말은 막연한 공포가 아닌, 예고된 도래입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갑자기 닥치는 것이 아니라, 미리 말씀하신 대로 점진적으로 임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성도들에게 영적 무감각이 아닌, 깨어있는 분별력을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멀리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삶 속에서 이미 임하고 있으며, 종말은 그 완성을 향해 다가오고 있는 중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예수님은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고 말씀하십니다 (21:32). 이 말씀은 논란이 많지만, 많은 학자들은 여기서의 "세대"가 단순히 시간적 범주의 의미를 넘어, 예수님의 초림으로부터 시작된 종말론적 시대, 즉 교회 시대를 의미한다고 해석합니다.

AD 70년 예루살렘의 멸망은 이 말씀의 부분적 성취였으며, 앞으로 다가올 최종적 심판과 재림은 이 말씀의 궁극적 성취로 이어집니다. 즉, 우리는 이미 종말의 시대 안에 살고 있으며, 이 시대는 끝을 향해 가고 있다는 경각심을 갖게 합니다.

예수님은 이 말씀을 통해 제자들에게 단순히 종말을 두려워하지 말고, 예언이 실제 역사 속에서 이루어질 것을 믿고 준비하라고 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반드시 성취되며, 우리가 사는 시대는 그 성취의 중심에 놓여 있는 시간입니다.

하늘과 땅은 없어져도, 말씀은 영원히

"하늘과 땅은 없어지겠으나 내 말은 없어지지 아니하리라" (21:33). 이 선언은 하나님의 말씀의 절대성과 불변성을 보여주는 핵심 구절입니다. 피조 세계는 흔들리고 사라질 수 있지만, 하나님의 약속은 변함이 없습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의 말씀은 창세 때부터 지금까지 그분의 계획과 의지를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그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고, 그 말씀으로 예언하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성취하셨으며, 지금도 그 말씀으로 믿는 자를 구원으로 인도하고 계십니다.

성도는 말씀 위에 인생을 세워야 하며, 흔들리는 세상 속에서도 말씀은 우리를 굳건히 붙드는 반석이 됩니다. 그리스도의 재림도, 하나님의 나라의 완성도 말씀대로 반드시 이루어질 것입니다.

7. 깨어 있으라 하심 (21:34–38)

방탕과 염려에서 깨어 있으라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경고하십니다. "너희는 스스로 조심하라" (21:34). 마음이 방탕함과 술취함과 생활의 염려로 둔화되지 않도록 하라고 하십니다. 이는 종말을 준비하지 못하게 하는 삶의 태도들입니다. 깨어있지 않으면 그 날이 덫과 같이 갑자기 임할 것입니다 (21:35).

구속사적 관점에서 예수님의 이 경고는 단순한 도덕적 권면이 아니라, 영적 생존을 위한 명령입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날은 그분의 백성에겐 영광의 날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자에겐 심판의 날이기 때문입니다. 믿음의 사람은 일상의 삶에서도 하늘의 시선을 유지해야 하며, 주님을 기다리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삶의 분주함과 염려는 우리의 시야를 흐리게 하고, 종말의 긴박함을 망각하게 만듭니다. 예수님은 이 땅의 삶과 하늘의 부르심을 동시에 붙잡고 살아가는 깨어 있는 신자의 자세를 요구하십니다.

기도하며 준비하는 삶

"이러므로 너희는 장차 올 이 모든 일을 능히 피하고 인자 앞에 서도록 항상 기도하며 깨어 있으라" 하십니다 (21:36). 예수님은 깨어 있으라는 말씀과 함께, 기도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 기도는 단순한 경건 생활의 도구가 아니라, 영적 깨어 있음의 가장 실제적인 표현입니다.

기도는 세상의 흐름에 영혼이 휩쓸리지 않도록 붙들어 주며, 말씀 안에 자신을 점검하게 합니다. 성도는 하루를 기도로 시작하고 기도로 살아야 합니다. 재림을 기다리는 신자는 기도의 무릎으로 오늘을 살아야 하며, 마지막 날 인자 앞에 설 준비는 오늘의 기도로 완성되어야 합니다.

이 말씀은 단순히 개인의 경건을 넘어서, 공동체적 경고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항상 깨어 있는 공동체로 존재해야 하며, 예배와 말씀, 기도와 섬김을 통해 재림을 준비하는 깨어 있는 신부로 살아가야 합니다.

성전에서의 마지막 가르침

본문은 예수님께서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시고, 밤에는 감람산에서 지내셨다고 기록합니다 (21:37). 모든 백성은 아침 일찍 성전에 나아와 말씀을 들었습니다 (21:38). 예수님은 십자가를 앞두고 마지막까지 백성에게 하나님의 나라를 가르치셨습니다.

이 장면은 구속사의 마지막 준비단계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영광의 왕으로 오시기 전, 고난받는 종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성전에서의 마지막 가르침은 예수님의 사역이 단절되지 않고, 십자가를 통해 성취될 것임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오늘 우리도 주님의 마지막 말씀 앞에 다시 서야 합니다. 그분은 지금도 말씀하시며, 우리를 깨어 있는 신부로 준비시키십니다. 마지막 날 주 앞에 설 그날을 소망하며, 오늘을 깨어 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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