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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음-행전

누가복음 19장 강해

by 파피루스 2025. 4.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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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9장

누가복음 19장은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을 앞두고, 구속사적 정점으로 향하는 흐름을 보여줍니다. 삭개오의 회심 사건은 하나님의 구원이 잃어버린 자를 찾아오신 예수님의 사역 목적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며, 이어지는 ‘므나의 비유’는 종말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에 대비한 충성과 책임을 강조합니다. 예수님의 나귀 타신 입성은 스가랴의 예언 성취로, 평화의 왕으로서의 메시아를 선언하는 구속사의 핵심 장면입니다. 그러나 도성 예루살렘을 향한 예수님의 눈물과 성전 청결 사건은, 그 나라에 합당하지 않은 자들에 대한 심판적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19장은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국면에서 구원의 은혜와 하나님의 심판이 함께 선포되는 전환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누가복음 19장 구조분석 목록

  1. 삭개오의 회심 (19:1–10)
  2. 므나의 비유 (19:11–27)
    • 출발과 위임 (19:11–14)
    • 돌아와 결산하심 (19:15–26)
    • 그를 미워한 자에 대한 심판 (19:27)
  3.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 (19:28–40)
  4.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다 (19:41–44)
  5. 성전을 청결케 하심 (19:45–48)

1. 삭개오의 회심 (19:1–10)

여리고에서 만난 삭개오의 간절한 시선 (19:1–4)

예수님께서 여리고로 들어가시고 거니실 때, 한 사람의 이름이 기록됩니다. 그의 이름은 삭개오이며, 세리장이요 또한 부자였습니다 (19:2). 당시 유대 사회에서 세리는 로마 제국을 위해 세금을 징수하던 자로서, 동족에게 배신자로 인식되며 깊은 경멸의 대상이었습니다. 삭개오는 그 세리들 중에서도 수장이었으며, 많은 재물을 축적한 자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지위와 부에도 불구하고 그는 예수님을 보고자 하는 간절함으로 움직입니다.

"그가 예수께서 어떠한 사람인가 하여 보고자 하되 키가 작고 사람이 많아 할 수 없어" (19:3). 삭개오는 육체적으로도 작았고, 사회적으로도 고립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군중 속에서 밀려나 있었지만, 그 마음 안에는 예수님에 대한 절박한 열망이 있었습니다. 그는 뽕나무 위로 올라갑니다 (19:4). 이는 체면을 중시하던 당시의 문화에서 매우 파격적인 행동이었습니다. 그러나 삭개오는 체면보다 예수님을 보는 것을 선택합니다.

구속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바로 이러한 자를 찾아오십니다. 사람들에게 버림받은 자, 스스로의 죄를 인식하며 구원자를 찾는 자, 그가 바로 예수님께서 가까이 오시는 대상입니다. 삭개오의 모습을 통해 우리는 복음 앞에서 체면도, 자존심도 내려놓고 오직 은혜를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자의 태도를 배우게 됩니다.

예수님의 부르심과 삭개오의 응답 (19:5–7)

예수님께서 그곳에 이르러 나무 위에 있는 삭개오를 보시고 말씀하십니다. "삭개오야 속히 내려오라 내가 오늘 네 집에 유하여야 하겠다" (19:5). 이 부르심은 예수님의 구속사적 의지를 명확히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군중의 중심에서 인기를 얻으려 하지 않으시고, 주변에서 간절히 찾고 있는 한 사람을 향해 시선을 멈추십니다. 그리고 이름을 부르시며, 그 집에 거하시겠다고 하십니다. 이는 단순한 방문이 아니라, 함께 교제하고 구원을 이루시겠다는 선언입니다.

삭개오는 "급히 내려와 즐거워하며 영접"합니다 (19:6). 그는 더 이상 주저하거나 주님의 초청을 미루지 않았습니다. 삭개오의 반응은 회심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주님의 말씀에 즉시 순종하고, 자신의 삶을 열어 주님을 모시는 것, 그것이 참된 구원의 시작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수군거리며 말합니다. "저가 죄인의 집에 유하러 들어갔도다" (19:7). 복음은 언제나 경계를 넘습니다. 사람들은 여전히 외적인 기준과 과거의 행적을 가지고 판단하지만, 예수님은 내면의 변화와 믿음의 반응을 보십니다. 구속사는 인간의 시선을 무너뜨리고,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게 만듭니다.

회개의 열매와 구원의 선언 (19:8–10)

삭개오는 예수님 앞에서 말합니다.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배나 갚겠나이다" (19:8). 이 고백은 단지 도덕적 결심이나 감정적 반응이 아니라, 참된 회심의 열매입니다. 삭개오는 재물로 상징되던 자신의 우상을 내려놓고, 삶의 방향을 돌이켜 의와 사랑의 길로 나아갑니다. 이는 율법을 넘어선 복음의 변화입니다.

예수님은 이 장면을 보시고 선언하십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19:9). 예수님은 삭개오의 혈통이 아니라, 믿음으로 인한 회심을 통해 그를 아브라함의 자손, 곧 언약 백성으로 인정하십니다. 이것은 구속사의 원리가 오직 믿음에 있음을 분명히 보여줍니다. 혈통이나 출신, 과거가 아니라, 지금 이 자리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고 따르는 믿음이 구원의 기준입니다.

예수님은 마지막으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 (19:10). 이는 예수님의 공생애 전체를 관통하는 구속사적 선언입니다. 예수님은 잃어버린 자, 소외된 자, 죄인들을 찾아오셔서 그들을 회복시키고 구원하시는 분이십니다. 삭개오의 회심은 그 대표적인 열매이며,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시는 초청의 본보기입니다.

삭개오의 이야기에서 우리는 구속사의 핵심을 보게 됩니다. 주님은 부르시고, 회개한 자는 응답하며, 그들에게 구원이 임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방식이며, 오늘도 그 부르심은 이어지고 있습니다.

2. 므나의 비유 (19:11–27)

출발과 위임 (19:11–14)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가 곧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19:11). 그들은 예수님을 정치적 메시아로 생각하며, 곧 로마의 압제에서 해방시키고 이스라엘을 회복할 분으로 오해하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기대를 바로잡기 위해 예수님은 한 비유를 말씀하십니다.

"어떤 귀인이 왕위를 받아 가지고 오려고 먼 나라로 갈 때에 그 종 열을 불러 은화 열 므나를 주며 이르되 내가 돌아올 때까지 장사하라 하였더니" (19:12–13). 이 귀인은 예수님 자신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곧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세상을 떠나시고, 다시 왕으로 돌아오실 것입니다. 그 사이의 기간은 제자들에게 맡긴 사명의 시간입니다. 각 종에게 같은 금액, 곧 한 므나씩을 나누어 준 것은, 그들이 동일한 사명과 기회를 받았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시민들은 그를 미워하여 대표단을 보내 "이 사람이 우리의 왕이 되기를 원하지 아니하나이다"라고 전합니다 (19:14). 이는 유대 민족의 예수님에 대한 거부를 상징합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동안 수많은 이적과 말씀을 전하셨지만, 많은 이들은 그를 정치적 기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배척했습니다. 구속사의 흐름 속에서, 예수님은 거절당한 메시아로서 하나님의 계획을 이루어 가십니다.

돌아와 결산하심 (19:15–26)

귀인이 왕위를 받고 돌아온 후, 맡겼던 종들과 결산합니다. 첫 번째 종은 한 므나로 열 므나를 남겼고, 주인은 그에게 열 고을 권세를 맡깁니다 (19:16–17). 두 번째 종은 다섯 므나를 남겼고, 다섯 고을을 다스릴 권세를 받습니다 (19:18–19). 주인은 그들의 성실함과 충성을 칭찬하며, 사소한 일에 충성된 자가 더 큰 책임을 맡게 된다는 원리를 말씀하십니다. 이 장면은 예수님의 재림과 심판, 그리고 구속사적 보상 원리를 잘 보여줍니다.

그러나 한 종은 므나를 수건에 싸 두었다가 그대로 가져옵니다. 그는 말합니다. "주인은 엄한 사람이라 뿌리지 않은 데서 거두고 심지 않은 데서 취하는 줄을 내가 무서워하였나이다" (19:20–21). 이는 주인을 오해한 결과이며, 책임을 회피하려는 자기방어입니다. 주인은 그의 말대로 판단하며, 그 므나를 열 므나 가진 자에게 주라 명합니다 (19:22–24).

구속사적으로 볼 때, 하나님은 우리 각자에게 사명의 시간과 자원을 맡기십니다. 믿음의 사람은 그 자원을 단순히 보존하는 데 그치지 않고, 하나님 나라를 위해 사용하고 열매 맺는 자입니다. 주인의 성품을 오해한 종은 하나님을 무서운 분으로만 여겼고, 그 두려움이 순종을 막았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경외는 행동으로 드러나는 믿음이며, 구속사에 참여하는 삶의 열매로 증명되어야 합니다.

그를 미워한 자에 대한 심판 (19:27)

비유의 마지막은 매우 엄중한 선언으로 마무리됩니다. "그리고 내가 왕 됨을 원하지 아니하던 저 원수들을 이리로 끌어다가 내 앞에서 죽이라 하였느니라" (19:27). 예수님은 단지 무기력한 종들만 책망하시는 것이 아니라, 의도적으로 그분의 통치를 거부한 자들에게는 심판이 따른다는 사실을 분명히 하십니다.

이 말씀은 종말의 심판을 가리킵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은혜로 초청되지만, 그 통치를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의로운 심판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온유한 구주이시면서 동시에 공의의 왕이십니다. 이중적인 메시지를 통해 구속사는 은혜와 심판의 균형 위에 서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비유 속 세 종과 같은 부름을 받은 자들입니다. 동일한 복음, 동일한 기회를 받았지만, 그 열매는 각자 다르게 나타납니다. 하나님은 얼마나 많은 것을 맡았느냐보다, 얼마나 충성되게 사용했느냐를 보십니다. 구속사의 완성을 향해 가는 이 시대, 우리는 주인이 다시 오실 날을 기억하며, 그분께 드릴 열매를 준비하는 청지기로 살아가야 합니다.

3. 예루살렘으로 입성하심 (19:28–40)

예비된 어린 나귀와 주님의 통치 (19:28–35)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을 향한 여정을 마무리하시며, 감람산에 가까운 벳바게와 베다니 근처에서 제자 둘을 보내십니다. "너희는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하면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19:30). 예수님은 이미 모든 상황을 알고 계시며, 필요에 따라 사람의 마음까지 움직이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말씀은, 창조주 하나님의 통치를 선언하는 말씀이며, 구속사의 중심에 서 있는 분의 위엄을 드러냅니다 (19:31).

구약 스가랴서 9장 9절에 예언된 대로, 메시아는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시온에 입성하실 것입니다. 예수님의 나귀 타심은 스스로를 겸손의 왕, 평화의 왕으로 드러내신 행위입니다. 무력과 정치로 왕위를 주장하지 않고,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여 십자가로 나아가는 왕이십니다. 제자들은 그분 위에 자기들의 겉옷을 펴고 나귀 위에 태우며, 왕으로서 예우를 갖춥니다 (19:35). 이는 단순한 동물 타기의 장면이 아니라, 구속사적 통치권의 선언이며, 예루살렘에 들어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실 왕의 입성을 알리는 신호입니다.

오늘날 예수님은 여전히 자기 백성의 삶에 왕으로 입성하시기를 원하십니다. 그분은 무력한 정복자가 아니라, 말씀으로, 십자가의 사랑으로 통치하시는 구속의 왕이십니다. 우리는 그분을 향해 겉옷을 펴듯, 우리의 자아와 삶을 내려놓고 맞이해야 합니다. 나귀는 복음을 실어 나르는 순종의 도구였으며, 우리도 그 도구가 되어야 합니다.

호산나의 찬양과 백성의 반응 (19:36–38)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이동하실 때, 무리들은 자기들의 겉옷을 길에 펴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소리 높여 말합니다. "주께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19:38). 이는 단지 정치적 기대나 단순한 환영이 아니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음을 찬양하는 외침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많은 이적을 목격하였고, 그분이 단순한 선생이나 선지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보내신 메시아이심을 직감적으로 외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은 누가복음 전체에서 절정을 이루는 장면 중 하나로, 예수님의 정체성이 공적으로 드러나는 사건입니다. 예루살렘의 길은 메시아의 길이 되었고, 감람산은 하나님의 구속사적 역사가 선포되는 무대가 되었습니다. 백성들의 찬양은 하늘의 평화와 하나님의 영광을 동시에 선포하며, 그들이 마침내 왕을 맞이하고 있음을 알립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찬양이 며칠 뒤 "그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바뀔 것을 알고 있습니다. 이는 인간의 기대와 감정이 얼마나 쉽게 변하는지를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찬양에도 흔들리지 않고, 곧 다가올 고난을 아시며 침묵 속에 나아가십니다. 진정한 메시아는 대중의 인기보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며 걸어가는 분이십니다. 구속사의 중심에는 언제나 십자가가 있습니다.

바리새인의 항의와 예수님의 응답 (19:39–40)

바리새인 중 몇 사람이 무리의 환호를 문제 삼으며 예수께 요청합니다. "선생님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 (19:39). 그들은 이 환호와 찬양이 지나치며, 신성모독에 가깝다고 여겼습니다. 예수님은 이에 대해 이렇게 답하십니다.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지르리라 하시니라" (19:40).

이는 구속사의 필연성과 절대성을 선포하신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신 그리스도의 영광, 구속의 성취는 어떤 인간도 막을 수 없으며, 그 뜻은 반드시 선포되고 이루어진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도성에 입성하시는 이 순간은, 온 피조세계가 주목할 장면입니다. 사람이 침묵해도 피조물이 찬양할 것이며, 이는 모든 만물과 역사가 그분의 통치를 인정하게 될 것을 예언하시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예루살렘 입성은 인간의 기대와 전혀 다른 방식이지만, 하나님의 완전한 구속계획의 성취였습니다. 그분은 환호 속에서도 고난을 향해 침착하게 걸어가셨고, 왕이지만 십자가를 향해 낮아지셨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가 도래하는 방식이며, 우리는 그 왕을 지금 이 순간도 맞이해야 합니다. 구속사의 길은 그분과 함께 걷는 순종의 길입니다.

4. 예루살렘을 보시고 우시다 (19:41–44)

구속사의 길목에서 흘리신 눈물 (19:41)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 가까이 이르셨을 때 그 성을 보시고 우셨습니다. "가까이 오사 성을 보시고 우시며" (19:41). 이는 사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눈물을 흘리신 장면 중 하나로, 단순한 감정 표현이 아니라 깊은 구속사적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지금, 하나님의 아들이 하나님의 백성을 찾아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분을 알아보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예루살렘은 단순한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을 두신 곳이며, 언약의 백성이 모여 살던 성읍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반복적으로 선지자들을 죽였고, 이제는 하나님의 아들이신 메시아마저 거절하려 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정죄의 눈물이 아니라, 애통의 눈물이요, 구속사의 중심에 있는 하나님의 깊은 슬픔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이뤄지는 현장임에도, 인간의 완고함은 여전히 그 뜻을 거스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도 하나님은 자신의 백성을 향해 동일한 애통함으로 바라보고 계십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회개의 초청이며, 구속사의 경고입니다. 복음은 사랑이지만, 그 사랑이 거절될 때는 더 깊은 슬픔이 됩니다.

평화의 길을 몰라보는 어리석음 (19:42–43)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너도 오늘 평화에 관한 일을 알았더라면 좋을 뻔하였거니와 지금 네 눈에는 숨겨졌도다" (19:42). 평화는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가 임하고 하나님의 뜻 안에 거하는 상태입니다. 예수님은 참 평화의 왕으로 오셨지만, 예루살렘은 그 왕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평화의 때를 놓쳤고, 그 결과로 심판이 임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언하십니다. "날이 이르리니 네 원수들이 토둔을 쌓고 너를 둘러 사면에서 가두며 또 너와 및 그 가운데 있는 네 자식들을 땅에 메어치며 돌 하나도 돌 위에 남기지 아니하리니" (19:43–44). 이는 AD 70년 로마에 의해 실제로 이루어질 예루살렘 멸망을 예고하는 말씀입니다.

이 심판은 단순한 정치적 붕괴가 아니라, 구속사적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공의의 결과입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구원의 기회를 거절할 때, 인간은 평화가 아닌 파멸의 길을 걷게 됩니다. 예수님은 사랑으로 오셨지만, 그 사랑은 회개를 요구하며, 응답하지 않는 자에게는 심판으로 나타납니다.

때를 알지 못함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 (19:44)

예수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십니다. "이는 네가 보살핌 받는 날을 알지 못함을 인함이니라" (19:44). 예루살렘의 진짜 문제는 로마가 아니라, 자기 백성의 영적 무지였습니다. 그들은 겉으로는 율법을 따르고, 성전을 중심으로 종교 생활을 하고 있었지만, 진정한 회심과 메시아에 대한 믿음은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때는 구원의 기회입니다. 그러나 그 때를 무시하고 거절할 때, 그것은 도리어 심판의 시점이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이 지식이 아니라, 순종으로 나타나야 할 때, 예루살렘은 종교적 외식에 갇혀 진리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우리 또한 하나님의 부르심에 민감하지 않으면, 같은 실패를 반복하게 됩니다. 구속사는 하나님의 때에 반응하는 자를 통해 완성되며, 그 때를 알아채지 못하는 자는 그 복에서 멀어지게 됩니다. 예수님의 눈물은 오늘도 우리 각자에게 던지는 질문입니다. 너는 지금 그 날을 알고 있는가?

5. 성전을 청결케 하심 (19:45–48)

성전을 향한 분노와 정결의 사역 (19:45–46)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 가장 먼저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매매하는 자들을 내쫓으십니다.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내 집은 기도하는 집이 되리라 하였거늘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 (19:46).

성전은 하나님과 인간이 만나는 거룩한 장소이며, 하나님의 임재와 은혜가 상징되는 곳입니다. 그러나 당대 종교지도자들은 성전을 자기들의 유익을 위한 장소로 바꾸어 놓았고, 거룩은 상업으로 대체되었으며, 회개는 외식으로 변질되었습니다. 예수님의 이 행동은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구속사적 정결의 선언입니다. 참된 예배의 회복을 위한, 하나님의 나라 질서의 회복을 위한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구속사적으로 이 장면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닙니다. 예수님은 단지 외적인 성전 질서를 회복하신 것이 아니라, 이제 그분 자신이 새로운 성전, 참된 예배의 중심이 되심을 선언하신 것입니다. 십자가 이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하나님께 나아가게 되었으며, 교회와 성도는 그분의 몸 된 거룩한 성전으로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백성들의 경청과 지도자들의 위선 (19:47—48)

예수님은 날마다 성전에서 가르치셨습니다. 백성들은 그분의 말씀을 귀 기울여 들었습니다. 그 말씀이 사람들의 영혼을 흔들었고, 권위 있는 진리로 다가왔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 백성의 지도자들은 예수를 죽이려고 꾀하였습니다 (19:47).

이들은 예수님의 말씀 앞에서 회개하지 않았고, 도리어 반감을 가졌습니다. 그들의 문제는 단순한 신학적 의견 차이가 아니라, 자신들의 기득권과 체제를 위협받았다는 인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진리를 거부하고, 생명을 배척했습니다. 하지만 백성들이 예수님께 열심히 귀를 기울였기에 그들은 그를 어떻게 해야 할지 두려워했습니다 (19:48).

하나님의 말씀은 늘 갈림길을 만듭니다. 회개하고 따르든지, 거부하고 저항하든지. 구속사의 핵심은 진리를 만났을 때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입니다. 성전을 깨끗게 하신 예수님의 행위는 우리 안의 성전도 돌아보게 합니다. 우리의 신앙이 단지 종교적 틀에 갇혀 있는지, 아니면 참된 예배로 회복되고 있는지를 날마다 점검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우리 안의 성전을 깨끗게 하시는 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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