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절당한 진리, 택함받은 죄인
누가복음 23:1-25은 인류의 죄악이 집약된 현장이며, 동시에 구속의 은혜가 선명히 드러나는 자리입니다. 진리이신 예수께서 거짓 고발 앞에 서시고, 무죄하신 분이 정죄받으며, 죄인은 풀려나는 이 장면은 복음의 역설을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이 본문을 통해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부패, 그리고 은혜의 능동적 성취를 함께 읽어내며, 신자의 심령을 각성케 합니다. 이제 본문 안으로 들어가 다시 한 번 주님의 놀라운 사랑을 깨닫는 시간 되시길ㄹ 원합니다.
조작된 고소, 침묵하시는 무죄의 주님
예수님께서 빌라도 앞에 서셨을 때,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그분을 로마법에 저촉되는 정치범으로 몰아가고자 세 가지 고소를 내세웁니다. 첫째, 백성을 미혹함, 둘째, 가이사에게 세금 바치는 것을 금함, 셋째, 자칭 왕이라 주장함(눅 23:2). 이는 철저히 왜곡된 고소였습니다. 예수님은 백성을 진리로 인도하셨고(요 14:6), 세금 문제에 대해 가이사의 것은 가이사에게 바치라 하셨으며(눅 20:25), 스스로 왕이라 하신 것도 하나님의 나라 안에서의 영적 통치를 말씀하신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정치적 프레임을 씌워 예수를 죽이고자 한 것입니다.
빌라도는 예수님을 신문하고는 "이 사람에게 죄를 찾지 못하였노라"고 선언합니다(눅 23:4). 원문에서 '죄'로 번역된 헬라어 'αἴτιον(아이티온)'은 기소할만한 이유나 책임을 뜻합니다. 즉, 그는 로마법상 예수를 정죄할 근거가 없음을 명확히 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유대 지도자들과 무리는 더욱 강하게 몰아붙이며 소란을 일으킵니다. 이에 빌라도는 예수가 갈릴리 사람이라는 말을 듣고, 그 관할자인 헤롯에게 책임을 떠넘기려 합니다(6-7절).
헤롯은 예수를 보고 기뻐했지만, 이는 경건한 기쁨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오랫동안 예수님이 기적을 베푸는 것을 보고 싶어 했고(8절), 주님을 신비한 흥밋거리로 여겼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무 말씀도 하지 않으셨고(9절), 그 침묵은 말보다 더 깊은 선포였습니다. 츠빙글리는 예수님의 침묵이 하나님께 대한 완전한 복종의 표현이며, 진리가 조롱당하는 자리에서 말이 아닌 존재 자체로 증언되었음을 강조합니다. 헤롯과 그의 군인들은 예수를 조롱하고 희롱하며, 화려한 옷을 입혀 다시 빌라도에게 보냅니다(11절). 이 장면은 왕이신 예수를 우스갯거리로 만든 세상의 패역함을 보여줍니다.
군중의 선택, 거꾸로 된 정의
빌라도는 다시 예수를 신문하고, 헤롯도 죄를 찾지 못했다는 점을 확인하며, 예수를 놓아주려 합니다(14-16절). 그러나 무리는 외칩니다. "이 사람을 없이하고 바라바를 놓아주소서"(18절). 바라바는 반란과 살인으로 감옥에 갇힌 자였고(19절), 그의 이름은 '바라바', 곧 '아버지의 아들'이라는 뜻입니다. 참된 아버지의 아들 예수는 죽음을 선고받고, 가짜 아들의 이름을 가진 죄인은 자유를 얻습니다. 이것은 단순한 역사적 해프닝이 아니라, 구속의 본질을 보여주는 상징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으로 죄인이 자유를 얻는 대속의 실체가 드러납니다.
빌라도는 세 번이나 예수님의 무죄를 말합니다(22절). 그러나 군중의 외침은 점점 더 격렬해집니다. 헬라어 원문에서 '큰 소리로' 외쳤다는 표현은 'ἀναφωνέω(아나포네오)'로, 분노와 선동의 분위기를 나타냅니다. 결국 빌라도는 그들의 소리를 이기지 못하고(23절), 바라바를 놓아주고 예수를 십자가에 넘깁니다(25절). 이는 불의한 재판의 절정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섭리의 성취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장면을 두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죄인들과 바뀌어 형벌을 받음으로, 우리 모두의 대속이 완성되었다"고 주석합니다.
개혁주의 신학은 이 장면에서 예수님의 대속적 순종을 강조합니다. 칼뱅은 인간이 가장 불의한 선택을 한 그 순간, 하나님은 가장 의로운 구원의 길을 여셨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악을 통해도 선을 이루시는 주권자이십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실패나 실수가 아니라, 예정된 구속의 길이었습니다. 바라바는 실존 인물이면서도, 동시에 우리 모두의 영적 자화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살아난 자이며, 그분의 희생으로 죄에서 풀려난 자들입니다.
진리 앞에서의 침묵, 그리고 은혜의 외침
누가복음 23장의 이 장면은 진리가 짓밟히고, 정의가 왜곡되며, 죄인이 영웅시되는 뒤바뀐 세상의 초상입니다. 그러나 그 안에서 주님은 침묵하시며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셨고, 무죄한 분이 죄인의 자리를 대신하심으로써, 영원한 복음의 문을 여셨습니다. 빌라도는 죄 없음을 알고도 민중의 소리에 굴복했습니다. 이는 인간의 양심이 정치와 체면, 이익 앞에 얼마나 쉽게 타협하는지를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우리 역시 빌라도처럼 진리를 알면서도 외면하거나, 군중처럼 은혜보다 분노를 택하며, 헤롯처럼 예수를 구경거리로 여길 위험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 가운데에서도 하나님은 구원을 이루십니다. 진리는 거절당했지만, 그 거절을 통해 우리를 받아들이시는 은혜가 선포됩니다. 바라바는 예수님의 죽음으로 인해 자유를 얻었고, 우리는 그 바라바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그리스도의 고난 위에 세워졌고, 그 고난은 인간의 부패함을 넘어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은혜의 결정체입니다.
이 말씀 앞에서 우리는 자신이 누구인지를 정직하게 바라보게 됩니다. 우리는 의인이 아니라 바라바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그런 우리를 위해 정죄받으셨고, 침묵하셨으며, 끝내 십자가로 나아가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은혜 앞에 무릎 꿇어야 하며, 더 이상 진리를 외면하지 말고, 그 진리 안에서 담대히 살아가야 합니다. 진리는 짓밟히는 것 같아도, 결국에는 우리를 자유케 하며, 하나님의 뜻은 사람의 소리에 휘둘리지 않고 완성됩니다. 주님의 침묵과 순종이 있었기에, 오늘 우리가 참된 자유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매일성경' 카테고리의 다른 글
누가복음 23:44-56 묵상, 예수님이 운명하시다 (0) | 2025.04.16 |
---|---|
누가복음 23:26-43 묵상, 구레네 시몬이 십자가를 대신 지다 (0) | 2025.04.16 |
누가복음 22:54-71 묵상, 베드로의 부인 (0) | 2025.04.16 |
누가복음 22:39-53 묵상, 감람산의 기도 (0) | 2025.04.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