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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세계/성경인물

[인물 설교] 나실인 삼손의 삶을 통한 하나님의 은혜

by 파피루스 2025. 5.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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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 제목: “다시 하나님께 드려진 삶 – 나실인 삼손의 이야기”

  • 본문: 사사기 13장 1절 – 16장 31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한 인물의 삶을 통해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또 하나님께 드려진 자가 실패했을 때 어떻게 회복되는지를 함께 깊이 있게 묵상해 보고자 합니다. 그 인물은 바로 삼손입니다. 삼손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힘센 사사’이기도 하지만, 성경은 그를 단순한 영웅으로 묘사하지 않습니다. 그는 하나님께 거룩히 구별된 나실인이었고, 동시에 그 부르심을 잃어버렸다가 회개를 통해 회복된 자이기도 합니다. 이 설교를 통해 우리는 나실인의 영적 의미를 되새기며, 삼손의 삶 속에서 우리 자신의 영적 거울을 발견하게 되기를 소망합니다.

 

 

1.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 – 나실인의 시작

삼손의 이야기는 사사기 13장에서부터 시작되며, 이스라엘 백성의 고통스러운 현실 가운데 하나님께서 직접 개입하시는 은혜의 이야기로 열립니다. 이스라엘은 또다시 하나님을 버리고 죄 가운데 빠졌고, 그 결과로 블레셋 사람들의 압제 아래에 있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께서는 기적적인 방식으로 구원자를 준비하십니다.

“이스라엘 자손이 다시 여호와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으므로 여호와께서 그들을 사십 년 동안 블레셋 사람의 손에 넘겨주시니라.” (삿 13:1)

 

그러나 주목할 것은, 하나님의 구원은 단순한 인간 지도자를 세우는 방식이 아니라, 태어나기도 전에 한 사람을 하나님께 온전히 드리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는 점입니다. 마노아의 아내는 아이가 없었고 임신할 수 없는 여인이었습니다. 바로 그 여인에게 하나님의 사자가 찾아와 말씀하십니다.

“보라 네가 임신하지 못하므로 출산하지 못하였으나, 이제 임신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아이는 태에서 나옴으로부터 하나님께 바쳐진 나실인이 됨이라.” (삿 13:3~5)

 

이 대목은 성경 전체를 관통하는 중요한 메시지를 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불가능 속에서 시작되고, 그분의 주권 아래에서 준비됩니다. 불임의 여인을 통해 생명을 잉태케 하신 하나님은, 그 생명을 단순한 ‘자녀’로가 아니라 ‘구별된 자’, 곧 나실인(נָזִיר, 나지르)으로 부르십니다.

 

히브리어로 나실인 ‘나지르’는 ‘떼어 놓다, 구별하다’라는 뜻입니다. 이 단어는 성별된 제사장, 거룩한 기물, 또는 하나님께 드려진 존재를 가리킬 때 사용되는 용어입니다. 삼손은 그 이름이 불리기도 전에, 심지어 잉태되기도 전에, 하나님께 드려질 존재로 정해졌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 성도들에게도 놀라운 영적 병행점을 제공합니다. 에베소서 1장 4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삼손의 나실인 부르심은 모든 신자가 창세 전부터 하나님께 선택되었고, 구별된 존재로 살아가야 한다는 진리를 그림처럼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우리는 어느 날 갑자기 신자가 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시간 속에서, 하나님의 계획 가운데 이미 선택된 자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입니다.

 

또한, 삼손의 어머니는 단지 아들을 낳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임신 기간조차도 나실인의 규례에 따라 구별되기를 요구받습니다.

“이제 삼가서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며, 어떤 부정한 것도 먹지 말라.” (삿 13:4)

 

이 말씀은 자녀의 거룩한 부르심이 부모의 삶과도 깊이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신앙은 유전이 아니라 전수이며, 하나님께 드려진 자녀를 기르기 위해 부모도 함께 거룩해야 한다는 교훈입니다. 이는 우리에게 가정의 신앙 교육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일깨워 줍니다. 자녀를 위한 가장 중요한 준비는 부모의 신앙이 구별되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삼손에게 요구된 나실인의 세 가지 규례—포도주 금지, 머리털 자르지 않기, 시체 접촉 금지—는 단지 형식적인 것이 아닙니다. 이 모든 규례는 삼손이 삶 전체로 하나님께 바쳐졌다는 것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 삼손은 자신의 말과 행동, 머리카락, 식사, 관계 모든 면에서 하나님께 속한 사람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드러내며 살아야 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우리의 영적 삶에 큰 도전을 줍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구별된 삶, 곧 ‘영적 나실인’의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우리를 이렇게 묘사합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이 말씀처럼 우리는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 나실인의 정신을 품고 살아가야 하는 존재입니다. 단순히 교회를 다니는 수준이 아니라, 삶 전체가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며, 우리의 말, 행동, 생각 하나하나가 구별된 존재로서의 정체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삼손의 부르심은 단지 한 개인의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이 역사 속에 어떻게 구현되는지를 보여주는 거룩한 장면입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죄 많은 세상 속에서, 연약한 자를 택하시고, 그를 훈련시키며, 하나님의 도구로 사용하시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삼손은 그 시작점에서 하나님의 손에 들린 구별된 그릇이었고, 그 거룩한 시작은 우리도 그렇게 살아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하고 있습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특별한 부르심을 받은 나실인처럼 거룩하게 구별된 존재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 정체성을 붙들고 살아가는 삶은 외롭고 좁은 길 같아도, 하나님께서 친히 동행하시고, 기쁨과 보람으로 채워주시는 은혜의 길입니다.

 


2. 부르심의 망각 – 은혜의 타협

삼손의 삶은 하나님의 부르심으로 시작된 거룩한 인생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은혜의 부르심은 곧 삶의 현장에서 망각되고, 세상의 유혹 앞에 타협되는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이것은 단지 삼손 개인의 도덕적 실패가 아니라, 하나님께 드려진 자가 자신의 정체성을 잃어버릴 때 어떤 결과가 오는지를 보여주는 영적 비극입니다.

 

삼손은 외적으로는 나실인의 표징인 머리털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서의 삶의 긴장과 경건을 놓쳐버린 상태였습니다. 부르심은 지속적 순종을 통해 완성되어야 하지만, 삼손은 그 부르심을 한순간의 은혜로만 여긴 채, 지속적인 헌신을 잃어버린 채 살아갔습니다.

 

(1) 정욕과 자기의 뜻을 따르는 삶

삼손의 타락은 극적인 전환이 아니라, 작은 타협의 반복에서 비롯됩니다. 사사기 14장에서 그는 딤나의 블레셋 여인을 보고 마음이 끌립니다.

“내가 딤나에서 블레셋 사람의 딸들 중에서 한 여자를 보았사오니, 이제 그를 내게 아내로 맞이하게 하소서.” (삿 14:2)

이때 그의 부모는 “그가 할례받지 않은 이방 여인임을 지적”하지만, 삼손은 듣지 않습니다. 그는 보는 대로, 느끼는 대로 반응합니다.

“내 눈에 좋으니 그 여자를 취하게 하소서.” (삿 14:3)

 

여기에서 우리는 삼손의 심령이 더 이상 하나님을 바라보는 나실인의 시선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에 반응하는 세속적인 시선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부르심을 잊은 자의 첫 번째 특징은 “하나님보다 자신의 감정과 판단을 우선시하는 것”입니다. 삼손은 구별된 자로서 살아야 했지만, 정욕을 합리화하고, 욕망을 거룩한 소명보다 앞세웠습니다.

 

(2) 죽은 자를 만지는 자 – 거룩함에 대한 무감각

사사기 14장 8~9절에서는 삼손이 죽은 사자의 몸에서 꿀을 떠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 장면은 잠깐 지나가는 듯 보이지만, 나실인의 정결 규례를 정면으로 어기는 행동입니다.

“사자의 몸을 본즉, 사자의 몸에 벌떼와 꿀이 있는지라. 그것을 떠서 길 가며 먹고…” (삿 14:8–9)

 

나실인은 죽은 시체와 접촉해서는 안 되는 규례(민수기 6:6–7)를 지켜야 했습니다. 하지만 삼손은 그 거룩한 금령을 무시한 채, 단지 자신의 기호와 만족을 위해 행동합니다. 더욱이 그는 부모에게도 꿀을 주었으나, 그것이 어디서 난 것인지 말하지 않았습니다.

이 장면은 삼손의 내면에 있는 거룩함에 대한 무감각함, 그리고 하나님의 기준을 자기 편의에 따라 조정하려는 교만한 태도를 보여줍니다.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거룩에 민감해야 합니다. 그러나 은혜를 당연히 여기고, 하나님의 명령을 ‘선택 사항’처럼 여길 때, 우리는 쉽게 나실인의 정체성을 버리게 됩니다. 삼손은 더 이상 하나님과 구별된 경계를 지키는 삶을 살지 않았고, 자기 뜻을 하나님의 뜻처럼 포장하며 살아가는 위험한 신앙의 모습을 드러냅니다.

 

(3) 은혜를 능력으로 착각한 교만

삼손은 하나님의 은혜로 힘을 얻었습니다. 그 힘은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이스라엘을 구원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삼손은 점차 그 힘을 자신의 능력으로 착각하고, 사명보다는 자랑과 보복의 수단으로 사용하기 시작합니다.

사사기 15장에서 삼손은 자신의 아내를 다른 사람에게 준 것에 분노하여 여우 300마리를 불붙인 횃불로 블레셋의 곡식을 태웁니다(삿 15:4–5). 이후 블레셋 사람들을 살육하고, 턱뼈 하나로 천명을 죽이기도 합니다.

“나귀의 턱뼈로 내가 한 더미, 두 더미를 쌓았으며, 나귀의 턱뼈로 내가 천명을 죽였도다.” (삿 15:16)

 

삼손의 이 고백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기도라기보다는, 자기 과시적 선언에 가깝습니다. 그는 힘의 근원을 점차 잊어버리고, 하나님께 속한 능력을 자기 영광의 도구로 사용하게 됩니다.

 

성도 여러분, 이것은 매우 중요한 교훈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주어진 능력과 은사는 하나님께 돌려야 할 영광의 도구이지, 자기 영광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삼손은 나실인의 힘이 헌신의 표징이라는 사실을 잊고, 그 힘을 자기 목적에 사용하다가 결국 하나님께 버림받는 결과를 초래합니다.

 

(4) 드릴라 – 은혜를 팔아버린 타협의 절정

사사기 16장은 삼손의 타락이 절정에 이르는 장면입니다. 그는 가사에 있는 기생을 찾고, 결국에는 드릴라라는 여인에게 빠집니다. 드릴라는 반복해서 삼손에게 힘의 비밀을 묻고, 삼손은 거짓말로 피하다가 결국 마음을 빼앗겨 자신의 머리카락, 곧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의 마지막 상징을 내어줍니다.

“내 머리 위에 삭도를 대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내 머리를 밀면 내 힘이 내게서 떠나고 나는 약하여져서 다른 사람과 같으리이다.” (삿 16:17)

삼손은 머리카락이 잘리자 힘을 잃었고, 더 충격적인 말씀이 이어집니다.

“여호와께서 이미 자기를 떠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더라.” (삿 16:20)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것은 나실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린 자의 비극적인 결말입니다. 거룩한 부르심의 상징이 사라지면, 그와 함께 하나님의 임재와 능력도 사라진다는 사실을 이 말씀은 분명히 보여줍니다.

 

삼손은 마지막까지 하나님의 은혜가 자신과 함께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남용하고 타협할 때, 하나님의 임재는 우리 곁을 떠나실 수 있습니다. 문제는 떠나신 줄도 모른다는 데 있습니다.

 

부르심의 망각은 오늘 우리에게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삼손의 이야기 속에 나오는 모든 타협—정욕, 무감각, 교만, 자기중심성—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다가오고 있습니다. 은혜의 부르심을 받았으면서도, 세상의 유혹 앞에서 거룩을 포기하고, 하나님보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을 따라 살아가게 된다면, 우리도 삼손처럼 “여호와께서 이미 떠나셨음을 알지 못하는 인생”이 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깨어 있어야 합니다. 거룩함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매일의 삶에서 실천되어야 할 지속적인 헌신의 길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 살아가는 일은 결코 자동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며, 순간순간의 선택과 결단, 기도의 무릎에서 유지되는 삶입니다.

 

삼손의 실패는 우리에게 경고이지만, 동시에 소망의 여지를 남깁니다. 왜냐하면 그가 회개하며 돌아올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 장에서 다루겠지만, 오늘 우리는 먼저 하나님의 부르심을 망각하지 않도록 스스로를 살피는 은혜의 자리에 서야 할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지금 여러분은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기억하고 계십니까? 혹시 나의 삶에도 작은 타협들이 반복되고 있지는 않습니까? 우리의 눈과 귀, 마음이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깨어 있다면, 우리는 다시금 거룩의 길로 돌아설 수 있습니다.

 

3. 회개의 자리 – 눈먼 사사의 눈물

우리는 앞서 삼손이 어떻게 하나님의 부르심을 잊고, 세상의 유혹에 마음을 빼앗긴 채 나실인의 정체성을 잃어버렸는지를 살펴보았습니다. 그는 정욕에 눈이 멀었고, 거룩에 무감각해졌으며, 은혜를 능력으로 착각한 채 살아갔습니다. 그러나 놀라운 사실은, 그의 실패가 곧 끝이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거룩을 잃은 자를 외면하시기도 하지만, 회개하며 다시 돌아오는 자를 결코 버리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삼손의 마지막 장면은 그가 가장 낮고 초라한 자리에 있을 때, 비로소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무릎을 꿇은 은혜의 순간이었습니다.

 

(1) 눈이 뽑힌 자 – 자기를 보는 눈을 얻게 되다

삼손은 드릴라에게 속아 머리털을 잘리고, 나실인의 상징을 잃었으며, 결국 블레셋 사람들에게 두 눈이 뽑히는 비참한 신세가 됩니다.

“블레셋 사람들이 그를 붙잡아 그의 눈을 빼고 가사로 끌고 내려가 놋줄로 매고 그에게 옥에서 맷돌을 돌리게 하였더라.” (삿 16:21)

 

그토록 힘있던 삼손은 이제 노예가 되어 맷돌을 돌리는 인생이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조롱했고, 그의 생애는 무가치하게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이 자리, 힘도 없고, 눈도 없고, 자유도 없는 그 감옥이, 하나님의 은혜가 다시 시작되는 자리가 됩니다.

눈이 뽑힌 삼손은 비로소 자기의 내면을 보기 시작합니다. 전에는 정욕에 눈이 멀었지만, 이제는 하나님을 바라볼 수 있는 영적 시야가 열리는 순간입니다. 때로 하나님은 우리의 눈에서 세상의 빛을 제거하셔서, 오직 그분만을 보게 하십니다. 육신의 눈은 사라졌지만, 영의 눈이 열리는 회개의 자리가 된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어떤 실패와 상실 속에 있다 해도, 하나님은 그 자리에서 우리의 영혼을 만지시고 새롭게 하십니다. 가장 낮은 곳에서 우리는 오히려 가장 높으신 하나님을 깊이 체험하게 됩니다.

 

(2) 다시 자라난 머리 – 은혜는 다시 시작될 수 있다

삼손의 실패를 묘사한 사사기 16장의 절정에서, 아주 짧고 조용하지만 강력한 말씀이 이어집니다.

“그의 머리털이 밀린 후에 다시 자라기 시작하니라.” (삿 16:22)

이 짧은 구절은 삼손의 회복을 암시하는 하나님의 은혜의 숨결입니다. 머리털은 단지 외형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정체성의 표지였고, 삼손이 다시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다는 회개의 소망을 상징합니다.

 

사람들은 삼손을 조롱했지만, 하나님은 여전히 그를 기억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은혜를 철회하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비록 삼손이 스스로 그 은혜를 놓쳤지만, 하나님은 그를 여전히 붙드셨습니다. 그의 머리털이 자라났다는 것은 단순한 자연 현상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를 다시 회복시키실 계획이 있다는 예고입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의 삶 속에서 은혜가 다시 시작되기를 원하십니까? 비록 나실인의 거룩함을 잃어버리고,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진 것처럼 느껴질지라도, 하나님은 다시 시작할 수 있는 은혜를 준비해두신 분이십니다. 그것이 회개의 자리에서 주어지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3) 눈먼 사사의 기도 – 절망 속 부르짖음의 신앙

이후 삼손은 블레셋 사람들이 축제를 벌이는 신전으로 끌려갑니다. 그는 조롱거리로 끌려 나와, 신전 한복판에 서게 됩니다. 이 순간, 삼손은 자신의 처지를 이용하거나 변명하지 않고, 하나님께 간절히 부르짖는 기도를 드립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이르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기억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삿 16:28)

 

여기서 그는 처음으로, 진심으로 하나님께 의지하는 기도를 드립니다. 이전에는 자만과 보복의 사람이었지만, 이제는 철저히 낮아져 하나님의 긍휼만을 붙드는 회개의 기도를 올립니다. 그리고 이 기도에는 두 가지 놀라운 신앙의 요소가 담겨 있습니다.

  1. “나를 기억하옵소서” – 하나님의 시선에 자신을 다시 올려놓는 기도입니다. 철저히 낮아진 자만이 드릴 수 있는 겸손한 고백입니다.
  2. “이번만 나를 강하게 하사” – 하나님의 능력이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 사용되기를 바라는 간청입니다. 삼손은 이제 자기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심판과 구원을 위한 도구로 자신을 드립니다.

이 기도는 회개의 깊이에서 나오는 믿음의 외침이며, 죽음으로 순종한 사사의 최후의 순교적 결단이기도 합니다.

 

(4) 마지막 승리 – 하나님의 은혜는 실패보다 크다

삼손은 신전의 기둥을 붙잡고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가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삿 16:30)

 

그리고 그는 신전의 기둥을 무너뜨려 수많은 블레셋 사람들과 함께 목숨을 잃습니다. 그 순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가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 많았더라.” (삿 16:30)

 

삼손은 죽음을 통해 오히려 생애 전체에서 가장 큰 구원의 일을 이루었습니다. 이는 역설적이지만, 성경 전체를 통해 반복되는 진리이기도 합니다.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는 길, 자기 부인을 통해 하나님의 역사가 드러나는 원리입니다.

 

이 장면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떠올리게 합니다. 예수님도 죽음을 통해 가장 큰 구원을 이루셨고, 삼손 역시 자신을 희생하여 이스라엘을 위해 승리를 이룬 사사로서의 사명을 마지막에 완수합니다.

 

성도 여러분, 이 말씀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분명합니다. 하나님은 실패로 끝나는 인생을 원하지 않으십니다. 회개하는 자, 다시 하나님을 찾는 자, 낮은 자리에서 무릎 꿇는 자에게 하나님은 다시 사용하실 기회를 주십니다. 설령 삶이 무너졌고, 육체는 약해졌을지라도, 하나님은 우리의 마지막을 통해서도 영광을 받으시는 분이십니다.

 

회개의 자리에서 새롭게 되는 삶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우리가 무너진 자리에 있다면, 눈먼 삼손처럼 기도의 무릎으로 돌아가야 할 시간입니다. 하나님의 부르심은 여전히 유효합니다. 그 부르심은 실패로 인해 취소되지 않으며, 회개를 통해 새롭게 열립니다.

 

삼손은 말년의 기도 한 마디로 인생의 결산을 다르게 기록했습니다. 그 역시 과거의 실패를 되돌릴 수는 없었지만, 마지막 남은 시간을 하나님께 드림으로써 거룩한 나실인의 사명을 완수하였습니다.

 

우리도 그럴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지금, 오늘, 바로 이 자리에서 하나님께 돌아오는 회개의 결단입니다.

 

“하나님, 나를 기억하옵소서. 나를 다시 강하게 하소서.”

 

이 기도가 오늘 우리 마음속에서 울려 퍼지길 소망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회개의 심령을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 심령 위에 머리털이 다시 자라나는 은혜, 영적 힘이 다시 회복되는 능력, 하나님께 드려지는 삶의 기쁨을 부어주실 것입니다.

 

4. 다시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 – 오늘을 사는 나실인의 길

삼손의 삶은 실패로 점철된 인생이었지만, 마지막에 하나님께 드려진 인생으로 회복되면서 놀라운 반전을 이루었습니다. 그는 육체적으로는 눈이 멀고 쇠약해졌지만, 영적으로는 다시 하나님을 붙든 사람으로 거듭났습니다. 자기 뜻이 아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통해, 그는 진정한 나실인으로 완성된 삶을 살게 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삼손의 삶을 마무리하면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나실인의 영적 정체성을 회복하고, 하나님께 다시 드려진 자로 살아갈 수 있는지를 함께 묵상해 보려 합니다.

 

(1) 나실인의 길은 과거가 아닌 현재의 헌신입니다

성경 속 나실인의 규례는 구약 시대의 특정한 제도였지만, 그 정신은 지금도 여전히 살아 있습니다. 삼손의 생애가 우리에게 주는 가장 큰 교훈은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 드려진 삶은 한때가 아니라, 지금 여전히 계속되어야 하는 살아있는 삶"이라는 사실입니다.

오늘 우리가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 산다는 것은, 과거의 서약이나 교회에서의 직분, 한때의 감동적 체험에 안주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매일의 삶 속에서 다시 자신을 하나님 앞에 올려놓는 지속적인 헌신의 과정입니다. 나실인이 머리털을 자르지 않았던 것은 단지 율법의 규칙 때문이 아니라, 자신이 누구인지를 날마다 기억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사신 존재입니다. 베드로전서 2장 9절은 우리를 이렇게 부릅니다.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 왕 같은 제사장들이요 거룩한 나라요 그의 소유가 된 백성이니…”

성도 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입니다. 이제 우리의 시간과 마음, 물질과 관계, 모든 삶의 영역이 하나님께 드려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오늘을 사는 나실인"은 삶의 모든 순간에서 하나님을 기억하고,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는 사람입니다.

 

(2) 나실인의 삶은 외적인 행위보다 내적인 순종입니다

삼손은 외적으로는 나실인의 표식을 갖고 있었지만, 정작 마음은 점점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갔습니다. 진짜 나실인의 삶은 외적인 구별이 아니라, 내면의 헌신과 순종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3장에서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겉은 깨끗하되 그 속은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도다.” (마 23:25)

우리가 교회에서 드리는 예배, 기도, 찬양이 아무리 화려해도, 하나님께 진심으로 드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껍데기에 불과합니다. 나실인의 삶은 하나님 앞에 드러나지 않는 자리에서도 거룩함을 선택하는 삶입니다.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의 정직, 양심의 순결, 작은 유혹 앞에서의 거절이야말로, 진정한 나실인의 표식입니다.

 

성도 여러분, 나실인의 삶은 비상한 결단이 아니라, 평범한 일상 속에서 하나님을 인정하며 사는 영적 민감성입니다. 우리는 눈에 띄는 행동보다, 하나님과의 은밀한 동행을 더 귀하게 여겨야 할 것입니다.

 

(3) 나실인의 정체성은 실패를 이길 수 있습니다

삼손은 부르심을 받았지만 실패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의 실패보다 더 컸던 것은 회개였고, 다시 하나님께 드린 헌신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마지막 순간은, 그의 생애 중 가장 위대한 일이 이루어진 자리였습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소망을 줍니다. 혹시 우리가 삶 속에서 하나님을 잊고 살았더라도, 거룩함을 잃고 방황했더라도, 지금 이 순간 회개의 자리로 돌아온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다시 사용하실 수 있습니다.

“의인은 일곱 번 넘어질지라도 다시 일어나려니와...” (잠언 24:16)

 

하나님은 넘어졌다고 포기하지 않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넘어진 후에도 하나님께 돌아올 줄 아는 믿음입니다. 삼손처럼 우리의 마지막이 오기 전에, 오늘 이 시간 다시 하나님께 드려진 삶을 시작하십시오.

 

(4) 오늘의 나실인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거룩을 증언하는 자입니다

구약 시대 나실인은 외적으로도 눈에 띄는 존재였습니다. 머리카락, 행실, 말과 행동이 모두 달랐습니다. 오늘의 성도는 세상의 문화 속에서, 더욱 은밀하고 지혜롭게 하나님의 거룩을 드러내야 합니다.

  • 세상은 성공과 경쟁을 추구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겸손과 섬김으로 살아갑니다.
  • 세상은 자기를 위하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타인을 품고 용서하며, 의를 위하여 고난도 기꺼이 감당합니다.
  • 세상은 자기 기준으로 살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과 말씀을 삶의 기준으로 삼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세상 속에서 거룩한 이질감을 드러내야 합니다. 그것은 사람들의 조롱을 받을 수도 있고, 때로는 외로움과 손해를 감수해야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나실인의 길이며, 십자가를 따르는 제자의 길입니다.

 

결론: 성도 여러분, 지금 우리는 어디에 서 있습니까?

나실인의 부르심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성도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초청입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 한복판에서, 우리는 다시 한번 하나님께 드려진 자로 살아가야 할 이유를 기억해야 합니다.

  •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세상과 구별된 삶을 삽니다.
  •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자기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위해 존재합니다.
  • 하나님께 드려진 사람은 실패 가운데서도 회개를 통해 회복됩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삼손처럼 다시 하나님께 우리의 삶을 드릴 수 있습니다. 과거에 머물지 않고, 실패에 주저앉지 않고, 오늘의 결단으로 거룩한 삶을 다시 시작할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연약함 속에서도, 회개의 기도를 들으시고, 다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께 드려진 나실인처럼, 구별된 삶을 결단하고 살아가는 성도가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말씀을 마치며, 함께 고백합시다.

“주님, 나의 삶을 다시 주께 드립니다. 나를 구별하여 주님의 뜻을 이루는 도구로 사용하여 주옵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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