애통하는 자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마태복음 5:4)
μακάριοι οἱ πενθοῦντες, ὅτι αὐτοὶ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1. 들어가며 – 참된 애통과 복의 길
마태복음 5장 4절의 말씀은 팔복 중 두 번째 복에 해당합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하는 자"는 단순히 슬픔을 느끼는 사람이 아니라, 영적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에 맞는 슬픔을 경험하는 자들입니다. 이 구절은 우리가 고통과 상실을 겪을 때 어떻게 하나님께 나아가 위로를 받을 수 있는지를 가르치며, 하나님의 위로가 단순한 감정의 회복을 넘어 영적인 평강을 가져다 준다는 깊은 영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또한 이 말씀은 죄와 세상의 불의에 대해 슬퍼하며, 하나님의 회복을 소망하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위로의 약속이기도 합니다.
2. ‘애통하다’의 원어적 분석과 의미
헬라어: πενθέω (pentheō)
여기서 사용된 “애통하다”라는 단어는 헬라어 “πενθέω” (pentheō)로, 깊은 슬픔과 비탄의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단순한 일시적 슬픔이 아니라, 상실로 인한 절망적인 애통을 가리킵니다. 이는 누군가의 죽음처럼 깊은 상실감과 비통한 마음에서 비롯된 애통을 묘사합니다.
애통이 갖는 핵심은 자신의 처지에 대한 애통이며, 자신이 죄로 인해 망가진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슬픔을 말합니다. 애통은 그동안 하나님을 떠나 살아갔던 악한 자신의 과거에 대한 슬픔과 애통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구절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애통은 단순한 감정적인 슬픔을 넘어 영적인 의미를 내포합니다. 죄에 대한 회개와 통회의 애통뿐만 아니라, 세상의 고통과 불의에 대해 하나님의 정의를 갈망하며 슬퍼하는 자들의 마음을 가리킵니다. 이런 애통은 단순히 아픔 속에 머물지 않고, 하나님의 회복과 위로를 기대하며 나아가는 믿음의 표현입니다.
(1) ‘마카리오이’ (Μακάριοι) – ‘복 있는, 행복한’
“마카리오이”는 복되다, 행복하다는 의미를 지닌 형용사입니다. 이는 단순한 감정적인 기쁨이나 만족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오는 참된 복과 영적인 행복을 의미합니다. 이 단어는 현재형으로 쓰여 있습니다. 이는 애통하는 자들이 이미 지금 이 순간부터 하나님께 속한 자로서 복된 상태에 있음을 의미합니다. 복은 미래에 받을 보상이 아니라, 지금 현재부터 누릴 수 있는 영적 실재입니다.
(2) ‘호이 펜소운테스’ (οἱ πενθοῦντες) – ‘애통하는 자들’
‘펜소운τες’ (πενθοῦντες)는 “슬퍼하다, 깊이 애통하다”는 의미를 가지는 동사 πενθέω (pentheō)의 현재 능동분사형입니다. 이 동사는 깊은 상실과 고통에서 오는 애통을 의미하며, 단순한 슬픔을 넘어 영혼의 깊은 통증을 묘사합니다. 특히, 이는 죄로 인한 회개나 세상의 불의에 대한 슬픔을 포함합니다.
‘호이 펜소운테스’ (οἱ πενθοῦντες)는 관사(οἱ)와 함께 사용되어 “애통하는 자들”이라는 명사적 표현으로 쓰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일회성 슬픔을 가진 사람들을 의미하지 않고, 지속적으로 애통하는 자들, 즉 삶 속에서 깊은 고통과 회개를 경험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갈망하는 자들을 가리킵니다.
시제는 현재분사이며, 현재 분사는 지속적인 상태를 나타냅니다. 즉, 애통하는 자들은 현재진행형으로 계속해서 슬퍼하고 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죄에 대해 회개하는 지속적인 마음의 태도나, 세상의 고통에 대한 감수성을 유지하는 자들을 의미합니다. 계속하여 애통하는 상태로 머물러야 함을 말합니다. 이것은 단지 애통의 문제가 아니라 죄에 대한 깊은 저항과 부정을 의미합니다.
(3) ‘호티’ (ὅτι) – ‘~이기 때문에’
단어 의미: **‘호티’ (ὅτι)**는 **“왜냐하면, ~이기 때문에”**라는 의미를 가지는 접속사입니다.
구문상 역할: 이 단어는 앞에 나온 애통하는 자들의 복된 상태에 대해 이유를 제시하는 역할을 합니다. 즉, 애통하는 자들이 복된 이유는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애통과 위로는 하나님의 구원 계획 안에서 연결된 진리입니다.
(4) ‘아우토이’ (αὐτοὶ) – ‘그들 자신이’
단어 의미: **‘아우토이’ (αὐτοὶ)**는 인칭 대명사 **“그들 자신이”**를 의미합니다. 이는 문장 안에서 강조의 의미를 가집니다. 즉, 하나님께서 위로해 주시는 자들이 바로 애통하는 자들 자신임을 강조합니다.
(5) ‘파라클레쎄손타이’ (παρακληθήσονται) –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동사는 “위로하다, 격려하다, 도와주다”를 의미하는 헬라어 ‘파라칼레오’ (παρακαλέω)의 미래 수동태입니다. ‘파라카레오’는 단순한 위로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셔서 주시는 깊은 평안과 회복을 포함한 위로를 의미합니다.
신학적 의미에서는 “성령의 위로와 격려”를 내포합니다. 신약에서 성령(Παράκλητος, 파라클레토스)은 “위로자” 혹은 “돕는 자”로 묘사됩니다(요한복음 14:16). 그러므로 애통하는 자들이 받을 위로는 성령을 통해 임하는 하나님의 위로와 회복입니다.
시제는 미래 수동태로 위로가 미래에 하나님에 의해 주어질 것임을 나타냅니다. 그러나 이는 단순히 먼 미래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주실 위로에 대한 소망을 의미합니다. 애통하는 자들이 결국 하나님의 약속 안에서 확실한 위로를 경험하게 될 것임을 나타냅니다. 이 위로는 궁극적으로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영원한 위로를 포함합니다(요한계시록 21:4). 이러한 미래수동태 형태는 종말론적 관점에서 역사와 개인의 종말 시에 하나님의 위로가 온전히 일어날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시제와 문장의 구조가 전달하는 신학적 의미
현재의 애통과 미래의 위로
이 구절의 핵심은 지금 현재 고통받고 애통하는 자들에게, 하나님께서 미래에 반드시 위로를 주실 것이라는 약속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지금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과 소망을 붙들고 살아갈 수 있습니다. 미래 수동태로 표현된 위로는 하나님께서 반드시 이루실 구원의 완성과 연결됩니다. 이 위로는 지금 부분적으로 경험될 수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완전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애통의 지속성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된 **‘펜소운테스(애통하는 자들)’**는 애통이 단순히 순간적인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인 태도와 영적 자세임을 강조합니다. 이는 죄와 고통에 대해 지속적으로 슬퍼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간구하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성령의 위로와 하나님의 임재
‘파라클레쎄손타이(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는 단순한 감정적 위로를 넘어, 성령의 위로와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의미합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도우심을 통해 위로를 받게 됩니다.
결론 – 애통과 위로의 완성
마태복음 5장 4절의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말씀은 죄와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은혜와 위로를 갈망하는 자들에게 주어진 축복의 약속입니다. 이 구절에서 사용된 현재 분사와 미래 수동태는 지금의 고통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붙들고 살아가는 신앙의 자세를 강조합니다. 또한, 위로는 성령의 임재를 통해 현재 부분적으로 경험되며, 최종적으로는 하나님 나라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애통하는 자들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경험하며, 세상의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의 위로와 평강을 소망하는 복된 자들입니다.
3. 구약에서의 애통 – 죄와 고통에 대한 슬픔
구약성경에서 애통은 종종 죄에 대한 슬픔과 회개와 관련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자신들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때, 옷을 찢고 재를 뒤집어쓰며 애통하는 행위를 통해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을 간구했습니다.
요엘 2장 12-13절
“여호와의 말씀에 너희는 이제라도 금식하며 울며 애통하고 마음을 다하여 내게로 돌아오라...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요엘서에서의 애통은 죄로 인한 심판 앞에서 회개와 하나님의 긍휼을 구하는 간절한 외침입니다. 이처럼, 성경에서의 애통은 단순한 감정의 표현이 아니라, 죄를 자각하고 하나님께로 돌아가려는 마음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또한, 구약에서 애통은 세상의 불의와 고통에 대한 슬픔과도 연결됩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불의로 가득한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정의와 구원을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애통했습니다.
4.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
예수님께서는 애통하는 자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라고 선언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위로는 단순히 슬픔이 사라지는 감정적 위로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직접 임재하셔서 주시는 참된 평강과 회복의 약속을 뜻합니다.
죄에 대한 회개로 얻는 위로
애통은 자신의 죄를 깨닫고 회개하는 과정에서 비롯됩니다. 죄를 인식하고 진심으로 회개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용서와 회복의 위로가 주어집니다.
시편 51편 17절
“하나님께서 구하시는 제사는 상한 심령이라 하나님이여 상하고 통회하는 마음을 주께서 멸시하지 아니하시리이다.”
상한 마음으로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자는 용서와 새 출발의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고통 속에서의 하나님의 위로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삶 속에서 겪는 고난과 슬픔을 외면하지 않으시며, 직접 위로와 평강을 주십니다.
이사야 61장 3절
“무릇 시온에서 슬퍼하는 자에게 화관을 주어 그 재 대신에 아름다움을, 슬픔 대신에 기쁨의 기름을 주며...”
이사야서의 말씀은 하나님의 위로가 우리의 슬픔을 기쁨으로 변화시킬 것을 약속합니다. 고난 속에서도 하나님께서 함께하심을 믿는 자들은 위로와 소망을 경험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를 소망하는 애통의 위로
이 땅의 불의와 고통에 대해 애통하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완전한 위로가 주어집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가 회복되는 날을 소망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요한계시록 21장 4절: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하나님의 나라가 임할 때, 우리의 모든 슬픔은 끝나고 영원한 위로와 평강이 주어질 것입니다.
5. 애통하는 자의 복된 삶
애통하는 자는 세상의 고통과 자신의 죄를 외면하지 않고, 하나님의 은혜와 정의를 간구하며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슬픔 속에서도 하나님의 약속을 신뢰하며 위로를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
애통하는 마음은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를 가능하게 합니다. 슬픔 가운데 하나님께 의지하는 자는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며 참된 평안을 누립니다.
겸손과 회개의 삶
애통하는 자는 자신의 죄와 연약함을 겸손히 인정하며 회개합니다. 이러한 겸손은 하나님께 가까이 나아가게 하는 길입니다.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
자신의 고통을 경험한 자는 다른 사람의 아픔에도 공감하며, 자비와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애통하는 자는 하나님의 위로를 경험한 자로서, 이웃을 위로하는 삶을 살아갑니다.
6. 결론 – 애통을 통한 영적 성장과 위로의 완성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단순한 슬픔의 위로를 넘어, 영적 성숙과 하나님의 임재 속에서 참된 위로를 경험하는 길을 가르쳐 줍니다. 우리의 삶 속에서 죄와 고통을 애통하며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직접적인 위로와 회복을 약속하십니다.
애통은 고통으로 끝나지 않습니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위로는 하나님의 은혜와 영원한 평강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삶의 고난과 슬픔 속에서 하나님의 위로를 소망하며, 죄와 불의에 대해 애통하는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야 합니다.
“하나님, 우리의 슬픔과 고통을 아시는 주님께 나아가오니, 우리의 애통을 기쁨과 평강으로 변화시켜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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