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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누가복음 24:1-12 묵상, 돌문이 열리고, 기억이 살아나다

by 파피루스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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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을 깨운 새벽, 생명이 다시 말하다

누가복음 24:1-12은 복음서의 절정이자, 신앙의 본질이 되는 부활 사건의 첫 순간을 묘사합니다. 무덤이라는 절망의 자리에서 시작된 이 말씀은, 믿음 없는 마음을 흔들어 생명의 소망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어두움을 걷고 새벽을 맞은 여인들의 발걸음, 무덤 앞에서 전해진 천사의 메시지, 그리고 놀라움을 안고 달려간 제자의 모습은 우리에게 부활이 단지 과거의 사건이 아니라 오늘 살아 움직이는 복음임을 깨닫게 합니다.

돌문이 열리고, 기억이 살아나다

“안식 후 첫날 새벽에 이 여자들이 그 준비한 향품을 가지고 무덤에 가서”(1절). 예수님의 장례를 지켜보았던 여인들이 향품을 들고 무덤을 찾습니다. 이는 예수님에 대한 사랑과 존경의 표현이며, 그들의 신앙은 아직 예수님의 부활을 기대하지 못한 상태입니다. 이들은 죽은 주님의 몸에 향품을 바르기 위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곧 전혀 다른 차원의 현실, 곧 살아 계신 주님의 현현 앞에 멈추게 됩니다.

그들은 "무덤을 막았던 돌이 굴려진 것"(2절)을 보고 놀라며, 들어가 보았을 때 예수님의 시신이 없음을 발견합니다(3절). 당시 무덤 입구의 돌은 무거운 원형 구조로, 혼자서는 옮기기 어려운 구조였습니다. 마가복음은 여인들이 가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라며 걱정했던 사실을 전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미 그들의 염려보다 앞서 일하셨습니다.

바로 그때 두 천사가 나타나 찬란한 옷을 입고 여인들에게 나타납니다(4절). 두 천사는 상징적으로 하나님의 확실한 증거를 나타냅니다. 율법의 두 증인을 연상시키듯, 하나님은 구속사의 결정적인 순간에 결코 혼자 말하지 않으시고, 성경에 일관되게 두 명의 증인을 통해 확증하게 하십니다. 여인들은 두려워 얼굴을 땅에 대며 엎드리고, 천사는 말합니다. “어찌하여 살아 있는 자를 죽은 자 가운데서 찾느냐?”(5절).

이 질문은 단순한 의문이 아니라, 부활의 본질을 꿰뚫는 하나님의 책망이며 동시에 일깨움입니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 계실 분이 아닙니다. 그분은 생명의 주이시며, 사망을 이기신 부활의 주이십니다. 불링거는 이 질문을 가리켜, “신앙 없는 자들의 헛된 종교적 행위를 깨우는 경고”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도 종종 살아 계신 주님을 전혀 엉뚱한 곳에서, 죽은 습관 속에서 찾고 있는 것은 아닌지 돌아보게 됩니다.

이어 천사는 말씀합니다.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6절). 신앙은 새로움보다 기억에서 출발합니다. 예수님은 이미 부활을 세 번이나 예고하셨고(눅 9:22, 18:33 등), 여인들은 그 말씀을 들었지만 마음에 간직하지 못했습니다. 하지만 이 말씀을 들은 여인들은 곧 그 말씀을 “기억하고”(8절) 행동으로 옮깁니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헬라어 'μνημονεύω(므네모네우오)'는 단순한 회상이 아니라 마음에 되살려내는 능동적 행위를 뜻합니다. 부활의 시작은 말씀의 기억에서부터 시작됩니다.

부활의 증언자들, 무명의 여인들

기억은 곧 증언으로 이어집니다. 여인들은 그 소식을 사도들에게 알리기 위해 달려갑니다(9절). 예수님의 장례를 목격한 이들이 이제는 부활의 첫 증인이 된 것입니다. 놀라운 사실은, 하나님께서 이 엄청난 소식을 사도들이 아닌 여인들에게 먼저 맡기셨다는 점입니다. 당시 사회에서 여인의 증언은 법적 효력이 없을 만큼 무시당하던 시대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통념을 뒤엎으시고, 연약한 자들을 통해 강력한 복음을 전하게 하십니다.

그 여인들의 이름은 마리아 막달라, 요안나, 야고보의 모친 마리아 등이며, “그들과 함께 한 다른 여자들도 이것을 사도들에게 알리니라”(10절)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도들은 이 말을 듣고도 믿지 않았습니다. 누가는 그들의 반응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이 말이 그들에게는 허탄한 듯이 들려 믿지 아니하나”(11절). 여기서 '허탄하다'는 표현은 헬라어 'λῆρος(레로스)'로, 의학용어에서 환자의 망상처럼 비이성적인 이야기로 취급되는 의미입니다. 즉, 사도들은 이 위대한 소식을 부정확하고 비현실적인 헛소리로 여겼던 것입니다.

이 장면은 인간의 불신과 이성 중심적 판단이 얼마나 쉽게 복음의 능력을 가로막는지를 보여줍니다. 칼뱅은 이 구절을 해석하며 “사람의 이성은 부활이라는 신비 앞에서 언제나 주저하며, 성령의 조명 없이는 진리를 수용할 수 없다”고 강조합니다. 그러나 동시에 하나님은 그 연약함까지도 감싸 안으시며, 시간이 지나며 그들에게 부활의 실체를 체험케 하십니다.

무덤을 향해 달려간 베드로의 마음

그러나 이 이야기는 한 사람의 행동으로 전환점을 맞습니다.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에 달려가서 구푸려 들여다보니”(12절). 베드로는 여인들의 말을 믿을 수는 없었지만, 무시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갑니다. 여기서 '달려가다'는 헬라어 'τρέχω(트레코)'는 단순한 걷기가 아니라 급하게 뛰어가는 행동입니다. 베드로의 마음속에는 의심과 기대, 절망과 소망이 뒤섞여 있었을 것입니다. 그는 무덤을 들여다보며, 그 안에 놓인 세마포만을 봅니다. 주님의 시신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그는 “그 된 일을 놀랍게 여기며 집으로 돌아가니라.” 놀라움은 믿음의 전조입니다. 비록 아직 확신에 이르지 못했지만, 그는 이제 부활을 향한 여정 속에 들어선 것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에 대해 “믿음은 명확한 증거 이전에 먼저 놀라움으로 반응하고, 그 놀라움은 말씀을 통해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고 설명합니다.

이 베드로의 반응은 우리에게도 중요합니다. 부활을 완전히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없을지라도, 그 놀라움을 품고 무덤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는 자만이 빈 무덤의 은혜를 경험할 수 있습니다. 신앙은 완벽한 이해에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하셨던 말씀을 기억하고 그것을 따라 움직이는 것에서 시작됩니다.

전체 마무리

누가복음 24:1-12은 죽음을 전제로 찾아간 여인들이 생명의 소식을 들으며, 무덤에서 다시 살아난 소망을 붙잡게 되는 장면입니다. 부활은 단지 예수님께서 살아나셨다는 사건 이상의 의미입니다. 그것은 절망한 인간의 시간 안으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새 창조의 시작이며, 죄와 사망의 결박을 끊고 참 생명으로 이끄는 영광의 문이 열린 사건입니다.

여인들은 사랑으로 무덤을 찾았고, 하나님은 그 사랑에 생명의 약속으로 응답하셨습니다. 천사는 말씀을 상기시켰고, 여인들은 그 말씀을 기억하고 증언했습니다. 사도들은 처음엔 믿지 않았지만, 놀라움과 동요 속에 점차 부활의 진실에 이르게 됩니다. 결국 이 놀라운 아침은, 인간의 연약함 속에서 하나님의 능력이 어떻게 자리를 펴시는지를 증언하는 장면입니다.

부활은 매번 새로운 새벽으로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무덤에서 살아 계신 주님을 다시 발견하는 이 은혜는, 오늘도 우리의 믿음 없는 마음에 다시 말씀을 기억하게 하며, 무겁게 닫힌 현실 속에서 하나님의 돌을 굴려내는 능력으로 역사합니다. 부활하신 주님을 향한 믿음의 걸음은, 어쩌면 두려움과 놀라움 사이에서 시작되지만, 반드시 생명과 확신으로 이어집니다. 오늘도 그 무덤은 비어 있으며, 생명은 다시 살아 말씀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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