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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누가복음 24:13-35 묵상,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예수님

by 파피루스 2025. 4.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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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오로 향한 길, 깨달음으로 되돌아온 걸음

누가복음 24:13-35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엠마오로 가는 두 제자와 동행하시는 장면을 통해, 낙심한 이들을 찾아오시는 주님의 은혜와 말씀을 통해 마음이 열리고 눈이 밝아지는 구원의 여정을 보여줍니다. 절망의 걸음이 어떻게 소망의 증언으로 바뀌는지를 담은 이 본문은, 지금도 우리의 신앙 여정에 실제로 임하시는 부활의 주님을 만나게 합니다.

낙심의 걸음에 다가오신 주님

“그 날에 그들 중 둘이 예루살렘에서 이십 오리 되는 엠마오라 하는 마을로 가면서”(13절). 여기서 '그 날'은 곧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날입니다. 그러나 이 두 제자는 그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낙심한 채 예루살렘을 떠나고 있었습니다. '엠마오'는 정확한 위치가 불분명하지만, 그 이름 자체가 '온천' 혹은 '따뜻한 물'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어, 지친 자가 잠시 안식을 찾는 곳처럼 느껴집니다. 그러나 그들이 찾는 안식은 일시적인 위로일 뿐, 참된 평안은 아직 그들 안에 도달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이 모든 된 일을 서로 이야기하더라”(14절). '된 일'이란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빈 무덤의 소식을 의미합니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일들을 ‘복음’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 해석 없는 슬픔 속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예수님께서 가까이 이르러 그들과 함께 길을 걸으십니다(15절). 부활하신 주님은 여전히 제자들의 일상 속으로 찾아오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하늘의 영광에만 머무시지 않고, 의심과 슬픔 속을 걷는 자들과 동행하십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그들의 눈이 가리워져서 그인 줄 알아보지 못하거늘”(16절). 헬라어로 '가리워지다'는 'κρατέω(크라테오)'는 무언가에 붙들려 제 기능을 하지 못하는 상태를 의미합니다. 이는 단지 물리적 시력의 문제가 아니라, 믿음의 눈이 닫혀 있었음을 상징합니다. 칼뱅은 이 장면을 해석하며, "믿음은 인간의 능력이 아니라 성령에 의해 열리는 것이며, 주님께서 자신을 드러내지 않으시면 그 누구도 그분을 인식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과 대화를 시작하십니다. “너희가 길 가면서 서로 주고받는 이야기가 무엇이냐”(17절). 이는 정보 수집이 아닌, 그들의 마음을 열기 위한 질문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내면을 들여다보시기 위해 때로 이렇게 묻기도 하십니다. 이 질문에 대해 그들은 ‘슬픈 빛을 띠며’ 멈추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부활의 날임에도 그들은 여전히 무덤 앞에 서 있는 자들처럼 어두움에 머물고 있었습니다.

희망의 기억을 붙잡지 못한 자들의 대화

그들 중 한 사람인 글로바가 답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이름을 입에 담으며, 그분을 “하나님과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하신 선지자”(19절)라 고백합니다. 그러나 이 고백은 여전히 예수님을 '선지자'로만 인식하고 있는 수준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의 고난과 죽음을 두고 “우리는 이 사람이 이스라엘을 속량할 자라고 바랐노라”(21절)고 말하며, 그 기대가 무너졌음을 토로합니다. 여기에서 '바라다'는 헬라어 'ἠλπίζομεν(엘피조멘)'은 과거 완료형으로, 이미 끝나버린 기대를 의미합니다. 이들의 믿음은 십자가 앞에서 멈추었고, 부활의 의미는 아직 그들의 마음에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또한 그들은 몇몇 여인들이 예수님의 무덤이 비었다는 이야기를 했다고 전하지만, 그 말을 그대로 믿지 못합니다(22-24절). 이는 단지 정보의 부재가 아니라, 마음의 닫힘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매튜 헨리는 이 구절을 두고, “신앙은 종종 자기 기대가 무너질 때 드러나며, 사람은 자신이 보고 싶은 방식으로만 진리를 받아들이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이에 대해 예수님은 그들을 책망하십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25절). 여기서 '미련하다'는 헬라어로 'ἀνόητοι(아노에토이)'이며, 단순히 머리가 나쁘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적 분별이 둔하고 무지한 상태를 의미합니다. ‘더디 믿는다’는 것은 즉각적인 반응이 없는 완고함을 의미합니다. 주님은 단호하지만 동시에 인자하게 그들을 말씀으로 이끌어 가십니다.

예수님은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26절)고 하시며, 그들에게 구속사의 필연성을 말씀하십니다. 이는 이사야 53장과 같은 고난받는 종의 예언을 떠올리게 하며, 고난이 곧 실패가 아닌 영광의 관문임을 밝히십니다. 불링거는 이 장면에서 “하나님은 언제나 십자가를 통해 왕국을 세우신다”고 설명합니다.

떡을 떼실 때 열리는 눈

그리고 예수님은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자신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십니다(27절). 이것은 예수님이 직접 해석하신 성경공부이며, 부활의 주님께서 어떻게 구약 전체를 자신을 향한 복음의 증거로 이해하셨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대목입니다. 개혁주의 전통은 언제나 성경의 중심을 그리스도로 보아야 함을 강조하며, 모든 본문이 그리스도를 향해 흐른다는 이 원리를 본문의 핵심으로 받아들입니다.

이제 해가 저물어갈 무렵, 제자들은 예수님께 “우리와 함께 유하시나이다”(29절)라며 강권합니다. 이는 동행자가 아닌 집 안의 손님으로 모시는 순간이며, 이 요청은 결국 주님을 향한 마음의 열림을 상징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과 함께 식사하시며 떡을 떼십니다(30절). 그리고 “그들의 눈이 밝아져 그인 줄 알아보더니”(31절), 그 순간 예수님은 그들에게서 사라지십니다.

‘눈이 밝아지다’는 표현은 창세기 3장에서 선악과를 먹은 후 아담과 하와의 눈이 열린 장면을 떠올리게 합니다. 그러나 그때는 죄로 인해 열린 눈이었고, 지금은 은혜로 열린 눈입니다. 떡을 떼는 행위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라,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는 예식입니다. 이는 성찬의 그림자이며, 예수님을 진정으로 알아보는 자리는 말씀과 떡을 나눌 때에 이루어진다는 중요한 영적 진리를 담고 있습니다. 칼뱅은 이 장면을 가리켜 “하나님은 말씀과 성례를 통해 자신을 나타내신다”고 해석했습니다.

그들이 서로 말하되, “길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여기서 ‘마음이 뜨겁다’는 표현은 헬라어로 ‘καῖετο(카이토)’로, 불이 붙은 듯 활활 타오르는 상태를 말합니다. 말씀은 단지 지식을 주는 것이 아니라, 마음을 살리고 감정을 움직이며 삶의 방향을 바꾸는 능력이 있습니다.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굳어진 마음을 녹이고, 다시금 믿음으로 뛰게 합니다.

두 제자는 즉시 일어나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갑니다. 그들은 이제 더 이상 엠마오에 머물 이유가 없습니다. 그들이 만난 주님을 전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제자들에게 돌아가 “주께서 과연 살아나셨고 시몬에게 보이셨다”(34절)고 증언하며, 자신들의 경험을 나누고 떡을 떼시던 때에 예수를 알아본 일을 설명합니다(35절).

전체 마무리

누가복음 24:13-35은 단지 두 제자의 부활 체험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떻게 낙심한 자들의 걸음을 돌이키시는지를 보여주는 복음의 여정입니다. 주님은 절망 속을 걷는 자들의 곁에 조용히 오셔서, 말씀으로 마음을 열게 하시고, 떡을 떼며 눈을 뜨게 하시며, 다시금 복음의 공동체로 돌아가게 하십니다.

우리는 이 엠마오의 길 위에 서 있는 사람들입니다. 고난과 현실 앞에서 때로 주님의 부활을 잊고 낙심한 걸음을 걸을 때, 주님은 우리 곁으로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말씀을 열어주시고, 함께 떡을 떼며, 우리 마음에 다시금 불을 지피십니다. 이 복음의 불이 다시 붙을 때, 우리는 예루살렘으로 되돌아가는 순례자가 됩니다.

주님은 오늘도 우리와 동행하십니다. 그분은 말씀 가운데, 성찬 가운데 살아 역사하시며, 낙심한 자의 이름을 부르시고, 닫힌 눈을 여시며, 뜨거운 마음으로 다시 세상의 길로 나아가게 하십니다. 우리의 눈이 밝아져 그분을 알아보는 그 순간, 모든 절망은 소망으로, 모든 두려움은 기쁨으로 변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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