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을 사랑하는 영혼의 마지막 고백
시편 119편은 말씀 사랑에 대한 깊은 고백이 담겨 있습니다. 그 중에서도 마지막 부분인 161-176절은,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사랑하고 신뢰하는 시인의 간절한 고백으로 가득합니다. 이 본문은 말씀을 향한 사모와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말씀을 붙들겠다는 결연한 신앙 고백입니다. 우리 또한 시편 119편 전체를 묵상하듯, 오늘 이 마지막 시구를 따라 우리의 신앙을 새롭게 하고, 말씀 안에서 다시 한 번 영혼을 일으키기를 소망합니다.
핍박 가운데서도 말씀을 기뻐하다 (161-168절)
시인은 "고관들이 까닭 없이 나를 핍박하였으나 내 마음은 주의 말씀만 경외하나이다"(161절)라고 고백합니다. '고관'(히브리어 שָׂרִים, 사림)은 권세 있는 자, 통치자들을 의미합니다. 권력을 가진 자들로부터 부당한 박해를 받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시인은 두려워하거나 분노하기보다 하나님의 말씀을 더욱 깊이 경외합니다. 여기서 '경외하다'(히브리어 יָרֵא, 야레)는 단순한 두려움이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거룩한 경외, 사랑에 기초한 복종을 뜻합니다. 세상의 권세가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하는 자만이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습니다.
"사람이 많은 탈취물을 얻은 것처럼 나는 주의 말씀을 즐거워하나이다"(162절)라고 노래합니다. 여기서 '탈취물'(히브리어 שָׁלָל, 샬랄)은 전쟁터에서 얻은 전리품을 뜻합니다. 즉, 시인은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의 모든 승리와 영광보다 더 귀한 것으로 여깁니다. 구속사적 관점에서 보면, 말씀이 곧 그리스도이시고(요한복음 1:14), 그분 안에서 얻는 승리가 세상의 어떤 승리보다 귀함을 시인은 예표하고 있습니다.
"나는 거짓을 미워하고 싫어하며 주의 율법을 사랑하나이다"(163절)라는 고백은 말씀에 대한 그의 절대적 충성을 보여줍니다. '거짓'(히브리어 שָׁקֶר, 샤케르)은 단순한 불의가 아니라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거짓 사상을 가리킵니다. 시인은 세상의 거짓을 멀리하고, 오직 하나님의 율법(תּוֹרָה, 토라)을 사랑합니다.
"나는 하루 일곱 번씩 주를 찬양하나이다"(164절)라는 고백은 단순한 숫자의 의미를 넘어, 하루 전체를 찬양으로 채운다는 것을 뜻합니다. '일곱 번'은 히브리적 사고에서 완전수를 의미합니다. 즉, 시인은 그의 삶 전부를 하나님의 의로운 규례를 찬양하는 일에 드립니다. 이것은 종말론적 예배를 상징합니다. 어린 양의 보좌 앞에서 끊임없이 찬양하는 천상의 예배(요한계시록 5:9-14)를 미리 보여주는 것입니다.
"주의 율법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큰 평안이 있으니"(165절)라는 고백은 참된 평안의 비밀을 드러냅니다. '평안'(히브리어 שָׁלוֹם, 샬롬)은 단순한 심리적 안정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 속에서 누리는 온전한 복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이 평안이 완전히 성취됩니다(요한복음 14:27).
시인은 "내가 주의 증거들을 지키고 크게 사랑하였나이다"(167절)라고 다시 고백합니다. 그는 단순히 규례를 따르는 외적 행위에 그치지 않고, 마음으로 사랑하고 헌신합니다. 사랑 없는 순종은 율법주의로 흐르기 쉽지만, 사랑으로 순종하는 삶은 참된 경건을 이룹니다. 구속사 안에서 이것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새 언약의 삶을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구원을 기다리며 부르짖는 영혼 (169-172절)
"여호와여 나의 부르짖음이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169절)라고 시인은 간구합니다. '부르짖음'(히브리어 רִנָּה, 린나)은 깊은 고통 속에서도 소망을 품은 외침입니다. 그는 단순히 고난을 해결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깨달아 순종하기를 구합니다. '깨달음'(히브리어 בִּינָה, 비나)은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영적 통찰과 이해를 의미합니다. 이는 성령께서 주시는 조명(illumination)을 통한 깊은 말씀의 이해를 가리킵니다.
"나의 간구가 주의 앞에 이르게 하시고 주의 말씀대로 나를 건지소서"(170절)라고 이어지는 고백은, 시인이 자신의 구원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 곧 하나님의 언약적 약속에 근거함을 믿고 있음을 보여줍니다. 신약적 관점에서는 이 간구가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통한 완전한 구속의 성취를 바라보는 신앙 고백과도 같습니다.
시인은 "내 입술이 주의 말씀을 찬양하리니"(171절)라고 고백합니다. 그의 입술은 더 이상 세상의 말을 따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찬양하는 도구가 됩니다. 찬양은 단순한 노래가 아니라, 존재 전체를 드리는 신령한 제사입니다(히브리서 13:15). 이처럼 말씀을 통한 깨달음은 찬양으로 열매 맺습니다.
"주의 모든 계명이 의로움이라"(172절)는 선언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의 속성이 '의'(히브리어 צֶדֶק, 체덱)에 있음을 드러냅니다. 하나님의 계명은 그 자체로 의롭고 선하며, 인간을 생명의 길로 인도합니다. 구속사의 완성은 바로 이 의를 통해 이루어집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의를 온전히 이루셨고(로마서 3:21-26), 그 안에서 믿는 자들은 의롭다 하심을 얻습니다.
방황하는 영혼을 찾으시는 하나님 (173-176절)
"주의 손이 나를 돕게 하소서"(173절)라고 시인은 구합니다. '손'(히브리어 יָד, 야드)은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하심을 상징합니다. 인간은 스스로 구원에 이를 수 없기에, 하나님의 손이 필요한 존재입니다. 십자가의 손길이야말로 이 기도의 최종적 성취입니다.
"내가 주의 구원을 사모하였나이다"(174절)는 고백은 신앙의 본질을 드러냅니다. '사모하다'(히브리어 תָּאָב, 타아브)는 깊은 갈망을 나타냅니다. 세상의 구원, 인간적 구원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을 절박하게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 구원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성됩니다.
"내 영혼이 살아서 주를 찬송하게 하소서"(175절)라는 기도는 단순한 생존이 아니라, 하나님을 예배하는 삶을 위한 간구입니다. 생명의 목적은 곧 하나님을 찬양하는 데 있습니다. 우리가 사는 이유, 숨 쉬는 이유는 그분의 영광을 위함입니다.
시편 119편의 마지막 절인 "내가 방황하는 양 같이 되었사오니 주의 종을 찾으소서"(176절)는 깊은 자기 인식의 고백입니다. '방황하다'(히브리어 תָּעָה, 타아)는 길을 잃은 상태를 뜻합니다. 시인은 자신이 연약하고 쉽게 길을 잃는 존재임을 인정하며,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간구합니다. 신약에서는 이 장면이 더욱 선명해집니다. 예수님께서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신 선한 목자이시기 때문입니다(요한복음 10:11; 누가복음 15:4-7). 결국 시편 기자의 마지막 고백은 하나님의 은혜에 전적으로 의지하는 신앙의 절정입니다.
마무리
시편 119:161-176은 고난과 핍박, 유혹과 방황 속에서도 하나님의 말씀을 끝까지 사랑하고 의지하는 신앙인의 고백을 보여줍니다. 구속사의 흐름 안에서 이 본문은 그리스도께서 이루실 구원의 성취를 미리 보여주는 그림자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어둠과 방황이 찾아올 때, 시편 기자처럼 하나님의 말씀만을 경외하고, 구원을 갈망하며, 목자의 손길을 기다리는 신앙을 품어야 합니다. 결국 말씀은 우리를 살리고, 찬양하게 하며, 영원한 생명으로 이끄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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