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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에스라 3:1 - 3:13 묵상 및 강해

by 파피루스 2025.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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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너진 제단 위에 세워진 예배의 불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함께 묵상할 말씀은 에스라서 3장입니다. 이 본문은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백성들이 처음으로 드린 예배의 기록입니다. 아직 성전은 세워지지 않았지만, 그들은 먼저 제단을 쌓았습니다. 이는 예배가 건물보다, 형식보다,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일임을 보여줍니다. 오늘 말씀은 회복의 시작이 예배임을 선포합니다. 잃어버린 성전보다, 먼저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세워질 때 진정한 부흥이 시작됩니다. 오늘 우리도 무너진 제단을 다시 세우며, 예배의 불을 되살리는 은혜가 있기를 바랍니다.

회복의 첫걸음은 예배입니다 (에스라 3:1-3)

“일곱째 달이 일어남에 이스라엘 자손이 각자의 성읍에 거하였더니, 그 때에 백성이 일제히 예루살렘에 모이니라”(3:1). 여기서 ‘일곱째 달’은 히브리 달력으로 티슈리(Tishri)이며, 유대 절기 가운데 가장 거룩한 달입니다. 나팔절(레위기 23:24), 속죄일(레위기 23:27), 초막절(레위기 23:34)이 모두 포함된 시기입니다. 그들은 귀환의 첫해에 이 절기를 지키며 하나님 앞에 모였습니다. 이는 단순한 회집이 아니라 ‘거룩한 모임’(קָהָל, qahal)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흩어졌던 백성을 다시 모으셨습니다.

스룹바벨과 예수아는 제단을 먼저 세웁니다 (3:2). 여기서 ‘세우다’는 히브리어 בָּנָה (banah)로, 물리적인 건축뿐 아니라 ‘다시 세우다, 회복하다’의 의미를 지닙니다. 즉, 이 제단은 돌로 만든 구조물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의 상징이었습니다. 그들은 ‘두려움이 그들 위에 있었으므로’(3:3) 제단을 세웠다고 기록됩니다. ‘두려움’은 히브리어 פַּחַד (pachad)로, 단순한 공포가 아니라 경외감과 의식적인 긴장을 함께 내포한 단어입니다. 그들은 주변 이방 민족의 위협 가운데서도 하나님을 경외하며 예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두려움이 몰려올 때,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제단을 세우는 것입니다. 불안 속에서 도망하지 않고, 그 자리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 그것이 회복의 시작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평안할 때보다 위기 속에서 더욱 견고히 세워집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드리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에스라 3:4-6)

그들은 초막절을 지키며 매일 정한 수대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율법에 기록된 대로”라는 구절(3:4)은 신앙의 중심이 ‘말씀’임을 보여줍니다. 그들의 예배는 감정이 아니라 계시에 근거했습니다. 하나님이 명하신 방식대로 드리는 예배, 그것이 참된 예배입니다.

“매일 정한 수대로 번제를 드리며 날마다 드렸더라”(3:4). 여기서 ‘드리다’는 히브리어 עָשָׂה (asah)로, ‘행하다, 지속적으로 행하다’는 뜻을 가집니다. 예배는 일시적 감정이 아니라 지속적 순종의 행위입니다. 그들은 성전이 완공되지 않았어도 예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드린 번제(olah)는 ‘온전히 태워 드리는 제사’로, 하나님께 모든 것을 바친다는 헌신의 상징입니다.

그들은 성전의 기초가 놓이기 전부터 아침과 저녁으로 번제를 드렸습니다 (3:6). 이는 ‘하나님의 임재가 성전보다 앞선다’는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성전이라는 구조물 안에 갇히지 않으십니다. 하나님의 임재는 그분을 예배하는 백성 가운데 임하십니다. 오늘 우리 예배당이 완벽하지 않아도, 우리의 마음이 제단이 된다면 하나님은 그곳에 임재하십니다.

예배는 감사의 고백입니다. 초막절은 광야에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보호하신 은혜를 기념하는 절기입니다. 그들이 포로에서 돌아온 후 첫 절기로 초막절을 지켰다는 것은, 자신들의 생존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의 삶이 회복되는 가장 빠른 길은 감사입니다. 감사는 신앙의 첫 반응이며, 예배의 본질입니다.

성전의 기초를 다시 놓다 (에스라 3:7-9)

“이에 석수와 목수를 돈으로 주며 시돈 사람과 두로 사람에게 먹을 것과 마실 것과 기름을 주고…” (3:7). 이제 그들은 성전의 기초를 놓기 시작합니다. 그 과정은 출애굽 당시 성막 건축과 매우 흡사합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명령하신 대로 성막을 세우셨듯이, 스룹바벨 세대는 성전을 다시 세우는 사명을 받았습니다. 흥미롭게도, 그들은 이방 도시 두로와 시돈의 기술자들에게 도움을 받습니다. 이는 솔로몬이 성전을 지을 때 두로의 히람 왕에게 도움을 받았던 사건(열왕기상 5:1-12)을 떠올리게 합니다. 하나님은 이방의 자원까지도 당신의 구속사를 위해 사용하십니다.

그들은 예루살렘에 있는 하나님의 성전 기초를 놓기 위해 준비했습니다 (3:8). 히브리어로 ‘기초’는 יָסַד (yasad)이며, ‘세우다, 기반을 놓다’는 뜻입니다. 하나님께서 성전의 ‘기초’를 회복하신다는 것은, 하나님의 임재가 다시 백성 가운데 머무르신다는 구속사적 선언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는 언제나 ‘기초’에서 시작됩니다. 신앙의 기초가 말씀과 예배 위에 세워질 때, 그 위에 하나님의 나라가 세워집니다.

레위 사람들은 20세 이상으로 성전 건축의 감독자가 되었습니다 (3:9). 이는 민수기 8장에 근거한 성전 봉사의 규례를 따르는 것입니다. 그들은 단순한 관리자나 기술자가 아니라, ‘거룩한 봉사자’로서 섬겼습니다. 하나님의 일은 거룩한 헌신 없이는 완성되지 않습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헌신과 순종의 레위인들이 있을 때, 하나님의 성전은 세워집니다.

눈물과 환희가 함께한 예배 (에스라 3:10-13)

“건축자가 여호와의 성전의 기초를 놓을 때에 제사장들은 예복을 입고 나팔을 들고 레위 사람들은 재금으로 찬송하되 다윗의 규례대로 여호와를 찬송하니” (3:10). 이 장면은 놀라운 감동을 줍니다. 성전의 기초가 놓일 때, 제사장과 백성들은 찬양을 드렸습니다. 여기서 ‘찬송하다’는 히브리어 הָלַל (halal)로, ‘하나님의 영광을 찬양하다’는 뜻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할렐루야’가 바로 여기서 나왔습니다.

그들은 “이스라엘 하나님은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하시도다”(3:11)라고 찬양했습니다. 이것은 다윗 시대에 성전 예배 때마다 불렸던 찬양(시편 136편)입니다. 성전이 무너졌어도, 하나님의 인자하심은 여전히 영원했습니다. 그들의 찬양은 과거와 현재를 잇는 믿음의 고백이었습니다.

그러나 그곳에는 두 가지 소리가 있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기쁨으로 큰 소리를 질렀고, 어떤 사람들은 옛 성전을 본 기억으로 인해 크게 울었습니다 (3:12). 히브리어로 ‘울다’는 בָּכָה (bakah)이며, 깊은 슬픔의 통곡을 의미합니다. 그들은 솔로몬 성전의 영광과 비교했을 때, 지금의 초라한 기초를 보고 슬퍼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눈물조차 받아주셨습니다. 하나님은 눈물과 찬양이 함께 흐르는 그 예배를 기쁘게 받으셨습니다.

이 장면은 신앙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회복의 현장은 언제나 눈물과 기쁨이 함께 있습니다. 과거의 상실을 아파하면서도, 현재의 은혜에 감사하는 것, 이것이 바로 성숙한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완전한 결과보다, 그분을 향한 순전한 마음을 기뻐하십니다. 하나님께 드려지는 예배는 완벽함이 아니라 진실함에서 비롯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의 예배에도 이러한 복합적 감정이 존재하지 않습니까? 상처받은 마음, 회한의 눈물, 그러나 여전히 하나님을 찬양하고 싶은 그 마음. 하나님은 그 예배를 받으십니다. 중요한 것은 건물이 아니라, 우리의 마음이 하나님께 향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예배의 기초가 다시 세워질 때, 그곳이 바로 하나님의 성전입니다.

마무리

에스라 3장은 ‘회복의 첫 예배’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제단을 쌓고, 예배를 회복하며, 성전의 기초를 놓은 이 사건은 단순한 건축의 시작이 아니라, 구속사의 새로운 장입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자리를 통해 새로운 영광을 세우십니다. 그분은 눈물과 찬양이 뒤섞인 예배를 받으시며, 그곳에서 당신의 임재를 드러내십니다. 우리의 삶이 무너졌을지라도, 다시 제단을 쌓고 예배를 회복한다면 하나님은 그곳에서 새 일을 시작하실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마음에 예배의 제단이 다시 세워지길 간절히 소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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