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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성경

에스라 4:1 - 4:10 묵상 및 강해

by 파피루스 2025. 1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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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적이 일어날 때 믿음은 더욱 세워집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에스라 4장을 통해 하나님의 백성이 성전을 다시 세우는 중에 맞닥뜨린 ‘대적의 방해’를 함께 묵상하려고 합니다. 이 본문은 하나님의 일을 시작할 때 반드시 일어나는 영적 저항의 현실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동시에, 그 저항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증언합니다. 오늘 이 말씀을 통해 우리도 신앙의 여정을 이어가는 가운데 흔들리지 않고 하나님의 구속사적 계획에 동참하는 자로 서길 소망합니다.

거짓된 동참의 제안(에스라 4:1-3)

“유다와 베냐민의 대적이 사로잡혔다가 돌아온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이 여호와의 성전을 건축한다 함을 듣고 스룹바벨과 족장들에게 나아와 이르되 우리가 너희와 함께 건축하게 하라…” (4:1-2).
여기서 “대적”으로 번역된 히브리어 צָרֵי (tsarei)는 ‘적대자들’이라는 뜻입니다. 흥미로운 점은, 이들이 처음부터 적대적으로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함께 건축하자”고 제안합니다. 그들은 자신들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말하며, 신앙적 연합을 가장합니다. 그러나 이들의 의도는 신앙의 연합이 아니라 ‘혼합’이었습니다.

이들은 사마리아 사람들, 즉 앗수르 왕 에살핫돈(4:2)에 의해 이주해 온 이방인들로, 그 땅에서 ‘여호와도 섬기고 자기 신들도 섬겼던 자들’(열왕기하 17:33)이었습니다. 그들의 제안은 표면적으로는 협력처럼 보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신앙의 순수성을 훼손하려는 것이었습니다.
스룹바벨은 단호하게 말합니다. “우리 하나님의 성전을 너희와 함께 건축할 수 없나니…” (4:3). 이 말은 히브리적 관용구로 강한 단절의 선언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순종에는 타협이 없습니다. 성전은 하나님의 거룩한 임재의 상징이기에, 그분의 백성만이 세울 수 있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우리에게도 ‘함께하자’는 달콤한 제안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제안이 하나님의 뜻을 가리거나 세속의 가치와 타협을 요구한다면, 그것은 분명한 ‘영적 유혹’입니다. 스룹바벨의 결단은 신앙의 경계선을 지키는 용기였습니다. 교회가 세상과 손잡을 때는 사랑으로, 그러나 신앙의 본질을 잃는 타협은 언제나 거부해야 합니다.

방해와 모함의 시작(에스라 4:4-5)

“이로부터 백성이 유다 백성의 손을 약하게 하여 그들을 괴롭히며 방해하고…” (4:4).
여기서 ‘약하게 하다’는 히브리어 רָפָה (raphah)로, ‘늘어지게 하다, 의지를 꺾다’는 의미를 갖습니다. 이 대적들은 단순한 폭력보다 더 교묘하게 하나님의 백성의 ‘의지’를 꺾으려 했습니다. 사람의 마음이 낙심되면, 그 어떤 신앙의 일도 지속될 수 없습니다.

그들은 또 ‘방해하였다’고 기록됩니다. 이때 사용된 단어는 בָּלָה (balah)로, ‘혼란케 하다, 헝클다’는 뜻입니다. 그들의 전략은 명확했습니다. 직접적인 공격보다, 내부의 동요를 일으켜 공동체의 집중력을 깨뜨리는 것이었습니다.
“바사 왕 고레스 시대부터 다리오 왕이 즉위할 때까지” (4:5) 그들은 끊임없이 고발하며 방해했습니다. 무려 15년 동안 성전 재건이 중단되었죠. 그러나 성경은 ‘방해의 지속’보다 ‘하나님의 인내’를 더 강조합니다. 하나님은 그 모든 역사 속에서도 당신의 뜻을 이루셨습니다.

성도 여러분, 신앙의 길에서 어려움이 지속될 때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우리가 겪는 지연 속에서도 역사를 준비하고 계십니다. 사람은 방해할 수 있지만, 하나님의 계획은 멈추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시간은 결코 인간의 방해로 지연되지 않습니다.

정치적 압박과 왜곡된 기록(에스라 4:6-9)

“아하수에로 때에 그들이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을 고발하였으며, 아닥사스다 때에 비스람과 미드르닷과 다브엘과…” (4:6-7).
여기서 우리는 대적들의 전략이 ‘영적 공격’에서 ‘정치적 음모’로 확장되는 것을 봅니다. 그들은 조서를 꾸며서 바사 왕에게 보냅니다. 역사를 왜곡하고, 예루살렘 백성을 ‘반역자’로 몰아갑니다.

이들의 편지는 치밀합니다. 그들은 “이 성은 예로부터 반역하던 성이라…” (4:15)고 주장하며, 예루살렘의 과거를 악의적으로 이용합니다. 하나님께서 택하신 도시는 그들의 입에서 ‘불순종의 도시’로 왜곡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기록은 사실이 아닙니다. 예루살렘은 반역의 도시가 아니라, 하나님의 구속사가 펼쳐진 도성이었습니다.

히브리어로 ‘고발하다’는 קָטַר (qatar)는 ‘연기를 피우다, 향을 태우다’에서 유래했습니다. 흥미롭게도 원래는 제사에서 쓰이던 단어가 ‘비방하다’는 의미로 확장되었습니다. 즉, 대적들은 거짓 향을 피워 하나님께 드리는 참된 예배를 모방하며 사람을 속였던 것입니다. 악은 언제나 진리의 형식을 빌려 들어옵니다.

이 장면은 우리에게 깊은 영적 교훈을 줍니다. 하나님의 일이 세상 속에서 드러날 때, 반드시 왜곡된 언어와 오해가 따릅니다. 그러나 진리는 결국 드러납니다. 거짓된 기록은 일시적으로 힘을 얻을 수 있지만, 영원히 지속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은 역사의 재판장이십니다.

하나님의 백성은 방해 속에서도 멈추지 않습니다 (에스라 4:10)

본문은 “또한 왕의 귀한 자와 함께 사마리아 성과 강 서편에 사는 다른 자들…” (4:10)이라 기록하며, 바사 제국의 여러 지역이 예루살렘 재건을 방해하는 연합세력을 형성했음을 보여줍니다. 하나님 백성의 일을 막는 세력은 단일하지 않습니다. 항상 복합적이고, 조직적이며, 끈질깁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은 더 거대하고 견고합니다.

그들이 아무리 권력과 권세를 모아도, 결국 에스라 6장에 가면 다리오 왕이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성전 재건을 명령하게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섭리입니다. 사람의 음모와 제국의 권세도 하나님의 구속사를 막을 수 없습니다.
히브리어로 ‘멈추다’는 שָׁבַת (shavath)인데, 이 단어는 ‘안식하다’라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인간은 하나님의 일을 막는다고 하지만, 하나님께는 그것조차 ‘안식의 과정’으로 바뀝니다. 하나님은 방해조차 구속의 도구로 사용하십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할 때 방해를 받을 수 있습니다. 때로는 가족으로부터, 때로는 세상으로부터, 때로는 교회 내부의 오해로부터 공격을 받습니다. 그러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그때마다 하나님의 구속사는 더 깊어지고, 우리의 믿음은 더 단단해집니다. 하나님은 절대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마무리

에스라 4장은 성전 건축의 중단을 기록하지만, 영적으로는 하나님의 구속사가 멈추지 않음을 선언합니다. 대적의 방해 속에서도 하나님의 백성은 신앙의 순수성을 지켰고, 결국 하나님은 다시 성전 재건을 이루셨습니다. 오늘 우리도 신앙의 현장에서 스룹바벨처럼 단호하게 서야 합니다.
하나님은 타협하지 않는 순종을 통해 당신의 역사를 이루십니다. 방해는 하나님의 일을 멈추게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 방해 속에서 하나님의 뜻은 더욱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오늘도 우리의 마음에 세워진 ‘신앙의 성전’을 굳건히 지키며, 어떤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사람으로 살아가길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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