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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세계/성경인물

[인물설교] 사라, 믿음으로 잉태한 여인

by 파피루스 2025.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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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으로 잉태한 여인, 사라

히브리서 11장 11절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알았음이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은혜 가운데 함께 예배드릴 수 있음에 감사드립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는 확실함을 추구하는 시대입니다. 수치와 결과, 계산과 가능성 위에 인생을 세우려는 이 세상 가운데, 하나님은 전혀 다른 방식으로 우리를 부르십니다. 그분은 확률이 아니라 '약속'으로 말씀하시고, 가능성이 아니라 '믿음'으로 일하십니다. 오늘 우리는 믿음의 여인, 사라를 통해 그것을 확인하게 됩니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서 11장 11절입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가 많아 단산하였으나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로 앎이라”(히 11:11)

 

이 구절은 단지 한 여인의 생물학적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인간의 무너진 가능성을 딛고 성취되는지를 보여주는 장엄한 선언입니다. 믿음이란 단지 마음의 상태가 아니라, 현실의 불모지에서 생명이 움트는 능력이며, 사라의 이야기는 믿음이 잉태의 자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증언하는 고백입니다.

 

불가능을 마주한 여인 (히 11:11)

사라를 생각할 때 우리는 그녀가 한때 웃었던 여인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무슨 즐거움이 있으리요”(창 18:12). 이것은 단순한 조롱의 웃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인생의 깊은 절망에서 흘러나온 ‘불신의 비웃음’이자, 상처 입은 기대의 무덤에서 피어난 냉소입니다.

 

사라는 현실을 냉정히 알고 있었습니다. ‘단산’(히 11:11), 즉 자궁이 문을 닫았다는 사실. 그 문은 생명의 문이 아니라, 종결의 문이었지요. 생물학적 시계는 멈췄고, 시간은 그녀의 몸을 고요한 광야로 만들었습니다. 이 절망의 무게 속에서 믿음은 미풍처럼 작고 보잘것없어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곳에서 하나님은 일하셨습니다. 그분은 황폐함을 기경하시는 분이시며, 생명의 기적은 늘 ‘불모지’에서 시작됩니다. 하나님은 ‘생명의 전문가’이시고, 그분의 약속은 시간의 구속을 받지 않습니다. 사라는 처음에는 웃었지만, 결국 그 웃음을 ‘이삭’이라는 이름으로 낳게 됩니다. 불가능은 하나님의 무대였고, 사라는 그 무대 위에 선 연약한 도구였으나, 믿음을 통해 하나님은 그 연약함을 역전시키셨습니다.

 

믿음은 시간의 절벽 위에서 춤춘다 (히 11:11)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라는 표현은 의외입니다.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 사라의 불신앙이나 조롱이 먼저 부각되곤 하지만, 히브리서는 그녀를 '믿음의 사람'으로 선언합니다. 이것은 단지 긍정의 해석이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기억하시는 방식입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과거의 흔적들이 부끄럽게 남아있을지라도, 믿음으로 돌아선 한 걸음은 하나님 앞에서는 영원한 기념비가 됩니다.

 

사라가 믿음으로 ‘잉태할 수 있는 힘’을 얻었다고 합니다. 여기서 ‘힘’은 헬라어 ‘δύναμις(두나미스)’로, 하나님의 능력, 폭발적인 힘, 창조의 힘을 말합니다. 그녀 안에는 없던 힘이, 하나님의 약속을 붙드는 그 순간에 내면으로 스며들었던 것입니다. 마치 마른 땅이 단비를 머금듯, 마르고 닫힌 그녀의 몸과 영혼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인해 힘을 얻었습니다.

 

믿음은 마치 시계의 바늘이 멈춘 그 자리에서 다시 흐르기 시작하는 듯한 신비입니다. 시간의 절벽에서 낙망을 말하던 인생이, 갑자기 춤을 추기 시작합니다. 이것은 감정의 환기가 아니라, 영적 구조의 전복입니다. 믿음은 현실을 거부하지 않지만, 그것에 눌리지도 않습니다. 사라는 무너진 시간 위에 새로운 시간, 하나님의 시간을 잉태했습니다.

 

약속을 붙든 여인, 약속을 낳다 (히 11:11)

사라가 믿음을 가질 수 있었던 이유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로 앎이라’는 데 있습니다. 믿음의 본질은 대상에 있습니다. 그녀는 자기 자신을 믿은 것이 아닙니다. 몸의 변화도 보지 못했습니다. 단지 그 말씀하신 이가 ‘미쁘시다’는 것, 다시 말해 ‘진실되고 신뢰할 만하다’는 그 한 가지 사실을 믿은 것입니다.

 

믿음은 ‘약속’을 붙드는 손이며, 믿음은 약속하신 분의 성품을 신뢰하는 관계의 고백입니다. 사라는 하나님의 약속을 아이처럼 껴안았습니다. 그 약속은 처음엔 무거웠고, 어색했고, 아팠지만, 결국 그 안에서 생명이 태어났습니다. 믿음으로 잉태한다는 것은 단지 육체의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말씀을 잉태하는 삶, 하나님의 계획을 품는 존재로 변화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 시대에 하나님은 여전히 약속을 주십니다. 그 약속은 언약의 씨앗처럼 우리 안에 심기고, 믿음이라는 따스한 품 안에서 자라납니다. 누군가는 자신의 인생이 이미 단산되었다고 생각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는 단산된 자궁도, 닫힌 문도, 끝난 시간도 없습니다. 사라를 보십시오. 그녀는 약속을 잉태했고, 그 약속은 민족의 모태가 되었으며, 믿음의 길을 열었습니다.

 

잉태된 믿음, 웃음이 되다 (창 21:6)

사라는 나중에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이 나를 웃게 하시니 듣는 자가 다 나와 함께 웃으리로다”(창 21:6). 그녀의 웃음은 이제 냉소의 웃음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의 잉태가 가져다준 감사와 기쁨의 웃음입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우리의 웃음을 바꾸시는 능력이 있습니다.

 

믿음이 잉태되면, 우리 안에서 변화가 시작됩니다. 사라는 단지 자녀를 낳은 것이 아닙니다. 그녀는 ‘하나님의 계획’을 낳았습니다. 그 웃음은 이삭이라는 이름으로, 한 민족을 이끄는 미래로,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 자리 잡았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오늘 여러분의 삶 가운데 ‘단산된 자궁’과도 같은 영역은 없습니까? 희망이 끊긴 기도 제목, 응답이 멈춘 것처럼 보이는 기도의 현장, 시간의 벽에 갇힌 꿈들이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사라의 하나님,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로 아는 그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하십니다. 그분은 여전히 불가능을 뚫고 생명을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우리의 인생이 믿음으로 말씀을 잉태할 때, 우리는 곧 이삭의 웃음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마무리

오늘 이 시간, 우리 각자의 마음 안에 있는 불모지 위에 하나님의 말씀이 씨앗처럼 떨어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씨앗을 믿음으로 붙들기를 바랍니다. 믿음은 기다림의 품을 만들어내고, 기다림은 생명을 잉태하며, 잉태된 믿음은 결국 웃음으로 결실을 맺게 될 것입니다. 사라처럼 우리도 믿음으로 잉태합시다. 그리하여 하나님이 주시는 기쁨의 웃음, 생명의 웃음, 구속의 웃음을 함께 나누는 성도들이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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