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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세계/성경인물

[인물 설교] 모세: 애굽의 부귀를 거절하고 고난을 택함 (히 11:24-26)

by 파피루스 2025. 5.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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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귀의 문을 등지고 고난의 길을 택한 사람, 모세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히 11:24-26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이 복된 예배의 자리에 함께 모여 앉아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요. 삶의 바쁜 걸음을 멈추고, 세상의 시끄러운 소리를 잠시 내려놓은 채, 하나님의 말씀 앞에 귀 기울이는 이 시간은 우리가 이 땅에서 누릴 수 있는 가장 거룩한 호흡이며, 가장 깊은 쉼입니다. 우리는 이 예배 가운데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그 음성에 우리 삶을 다시 정렬하게 됩니다. 오늘 우리 앞에 펼쳐진 말씀은 히브리서 11장, 믿음의 사람들을 한 명씩 불러 세우며 그들의 삶을 조명하는 위대한 ‘믿음의 초상화’입니다. 그 가운데, 오늘 우리는 모세라는 인물을 통해 ‘믿음으로 인생을 선택한다는 것’의 의미를 함께 살펴보고자 합니다.

 

모세는 애굽의 왕자의 자리를 떠나,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받는 길을 택한 사람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그의 선택이 단순한 민족애나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철저한 믿음의 결단임을 선포합니다. 그 믿음은 부귀의 궁전을 등지고, 고난의 장막을 택하게 했으며, 잠시의 쾌락보다 영원한 상급을 좇는 눈을 열어 주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통해 만나는 모세의 이야기는, 단지 옛날의 전설이 아니라, 오늘 우리 삶의 선택과 가치 앞에 던져지는 영적 도전이 됩니다.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히 11:24)

히브리서 11장 24절은 이렇게 시작됩니다.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히 11:24). 여기서 ‘장성하여’라는 표현은 단지 나이의 성숙만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판단의 능력을 갖춘 자’, ‘결단할 수 있는 자’로 자라났음을 뜻합니다. 다시 말해, 모세는 더 이상 타인의 손에 운명을 맡긴 어린아이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방향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도달한 것이지요. 그러나 이 시점에서 모세가 마주한 현실은 결코 단순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애굽의 궁전에서 자라난 왕자였습니다. 당시 애굽은 세계를 호령하던 제국이었고, 왕궁의 일원이 된다는 것은 세상의 모든 부귀와 권력을 손에 넣을 수 있는 가장 완벽한 위치에 서 있다는 뜻이었습니다.

 

그는 학문, 정치, 문화의 중심에서 모든 혜택을 누리며 자라났습니다. 그의 인생은 이미 보장된 듯 보였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했다’고 성경은 증언합니다. 이 ‘거절’이라는 단어는 헬라어로 ‘아포네오마이’, 적극적으로 부정하고 단절하는 행동입니다. 그는 그 자리를 포기한 것이 아니라, 결별한 것입니다. 더 이상 그 호칭 아래에 숨지 않겠다고 선언한 것이지요. 세상은 그를 ‘왕자’라 불렀지만, 그는 그 이름을 지우고 ‘히브리인’이라는 상처 입은 이름을 다시 꺼내 들었습니다.

 

모세는 이름으로 주어진 특권을 단호히 거절했습니다. 그가 원한 것은 자신이 누구냐에 대한 세상의 해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의 참된 정체성이었습니다. 바로의 공주가 부여한 이름보다 하나님이 주신 백성의 이름이 그에겐 더 진실되고 깊은 의미를 담고 있었던 것입니다.

죄악의 낙보다 고난의 연대 (히 11:25)

왜 모세는 그토록 화려한 이름을 거절했을까요? 왜 그는 안락한 자리를 떠나, 고난의 길을 택했을까요? 그 대답이 이어지는 25절에 있습니다.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히 11:25). 여기서 우리는 모세의 선택이 단지 감정의 충동이나 순간적인 양심의 외침이 아니었음을 봅니다. 그는 ‘도리어 더 좋아했다’고 했습니다. 이 표현은 감정적 기호가 아니라, 가치 판단의 결과입니다. 그는 두 가지 삶을 저울에 올려놓고, 그 무게를 비교한 사람입니다. 한쪽에는 ‘죄악의 낙’이 있었습니다. 애굽의 부귀, 권력, 쾌락, 편안함, 모든 인간적인 욕망을 충족시킬 수 있는 삶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낙은 ‘잠시’였습니다. 꽃이 피어도 이내 시드는 법이고, 쾌락은 빠를수록 허무를 남깁니다. 반면, 다른 한쪽에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는 삶’이 있었습니다. 그 길은 외로웠고, 어렵고, 때로 비참해 보였지만, 모세는 그것을 ‘더 좋아했다’고 말합니다. 그 고난 안에 담긴 하나님의 목적, 하나님의 동행, 하나님의 영광을 그는 보았던 것입니다.

 

고난을 선택한 그의 용기는 단지 도덕적 결단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믿음이 열어준 미래의 창문을 통해 보인 비전 때문이었습니다. 모세는 순간의 향락보다 공동체의 연대를 택했습니다. 그 공동체는 비록 노예였지만, 하나님의 백성이었고, 약속의 계승자들이었으며, 장차 메시아의 통로가 될 사람들이었습니다. 모세는 외형이 아닌 내면의 영광을 선택했습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 (히 11:26)

히브리서 11장 26절은 더욱 깊은 차원의 해석을 제시합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 11:26). 이 말씀은 모세의 고난을 단지 민족적 희생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라고 해석합니다. 놀라운 선언입니다. 모세는 예수님보다 수천 년 전 인물이지만, 그의 고난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와 연결된 고난이었습니다. 이는 곧, 그의 삶이 하나님의 구속사 속에 놓인 하나의 조각이라는 의미입니다. 하나님은 시대를 뛰어넘어, 구원의 경륜을 완성하시는 분입니다. 모세의 선택은 단순한 동정이나 도덕적 결단이 아니라, 하나님의 큰 그림 안에 있었던 믿음의 응답이었습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모형으로, 메시아의 그림자로 살아간 인물이었습니다. 수모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받으신 고난의 상징입니다. 모세는 바로 그 길에 자신의 발을 올려놓았습니다. 고난은 무가치하지 않았습니다. 모세는 고난과 수치를 ‘더 큰 재물’로 여겼습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의 역설이고, 믿음의 신비입니다.

 

상 주심을 바라보며 살아간 사람 (히 11:26)

그의 모든 선택을 가능케 했던 근본 이유는 바로 이것입니다.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는 미래를 현재처럼 보았습니다. 하늘의 상급, 하나님이 주실 영원한 기업을 마치 손에 쥐고 있는 것처럼 믿었습니다. 그 믿음은 그를 견디게 했고, 포기하게 했고, 걸어가게 했습니다. 그의 시선은 땅의 궁궐이 아니라 하늘의 성소를 바라보았습니다. 그는 세상의 왕관보다 영원한 면류관을 원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앞에도 수많은 선택이 있습니다. 세상의 보화가 우리의 발걸음을 유혹합니다. 이름을 지키기 위해 진실을 감추고, 편안함을 위하여 진리를 타협할 유혹이 끊임없이 다가옵니다. 그러나 오늘 모세의 선택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그 길은 외로워 보일지라도, 하나님이 함께하신다. 그 길은 고단해 보일지라도, 그 끝엔 영광이 있다.”

 

마무리

모세는 믿음으로 부귀를 거절하고, 고난을 택했습니다. 그는 바로의 궁전보다 하나님의 장막을 더 사랑했고, 그는 죄악의 낙보다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하는 고통을 더 귀히 여겼습니다. 그리고 그 모든 삶은 장차 오실 그리스도의 그림자요, 예표가 되었습니다. 오늘 우리가 모세의 선택을 본받는다면, 오늘 우리가 다시 우리의 정체성을 점검하고, 우리의 길을 돌아본다면, 하나님은 우리를 통해 새로운 믿음의 역사를 이어가실 것입니다. 부귀의 문을 등지고 고난의 길을 택한 사람, 모세처럼 우리도 오늘, 그 믿음의 길을 함께 걷게 되기를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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