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3월 다섯째 주일 (종려주일) 대표기도문

2026년 3월 다섯째 주일 (종려주일) 대표기도문 거룩하시고 전능하시며 영원토록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신 하나님 아버지, 천지를 창조하시고 만물을 주의 뜻대로 다스리시는 주님을 찬양합니다. 오늘도 저희를 거룩한 주일, 특별히 종려주일 예배의 자리로 불러 주셔서 하나님께 예배하게 하시니 감사와 영광을 올려드립니다. 하나님 아버지, 오늘 저희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 무리들이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라고 외쳤던 그 장면을 기억합니다. 그러나 그들이 외쳤던 찬양이 얼마 지나지 않아 “십자가에 못 박으라”는 외침으로 바뀌었음을 또한 기억합니다. 주님, 이 모습이 곧 저희의 모습임을 고백합니다. 저희도 입술로는 주님을 찬양하지만, 삶에서는 여전히 자기중심적으로 살아가며 주님의 뜻을 거스르는 죄인들입니다. 주님의 왕 되심을 고백하면서도 실제 삶에서는 여전히 내가 주인 되어 살아가고, 주님의 다스림보다 나의 판단과 욕망을 따랐던 죄를 용서하여 주옵소서. 거룩하신 하나님, 저희는 본질상 진노의 자녀였고, 스스로는 결코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는 죄인이었음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서 속죄의 제물이 되게 하시고, 그의 죽으심과 부활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의와 생명을 허락하신 은혜를 찬양합니다. 종려주일에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세상의 기대처럼 정치적 왕으로 오신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해 고난 받는 종으로 오셨음을 믿습니다. 나귀를 타고 겸손히 들어오신 주님은 스스로 낮아지셔서 십자가에 죽기까지 순종하셨고, 그 순종으로 우리를 구원하셨음을 고백합니다. 주님, 저희로 하여금 이 복음을 단순한 지식이 아니라 삶의 중심으로 붙들게 하옵소서. 우리의 구원이 우리의 행위나 공로가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그리스도의 의에 근거함을 분명히 알게 하시고, 날마다 십자가 앞에서 자신을 부인하며 살아가게 하옵소서. 성령 하나님, 우리의 굳은 ...

창세기 11장 묵상

 창세기 11장 개요

 창세기 11장은 노아의 홍수 이후 노아의 후손들이 번성하여 세계각처로 흩어져 가는 가운데 시날 평지에서 서로 의논하며 바벨탑을 쌓는 이야기입니다. 하나님께서 강림하셔서 그들의 바벨탑 건설을 막으시고 다시 세상에 흩으십니다. 이후 아브람이 소개 됩니다.


창세기 11장의 영적 의미

창세기 11장은 홍수 이후 인류가 어떻게 번성했으며, 어떻게 살아갔는가를 보여주는 샘플과 같습니다. 저는 창세기 11장에 등장하는 바벨탑 사건을 타락하는 인류와 거룩으로 나아가도록 이끄시는 하나님과의 줄다리기라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은 물로 세상을 심판하지 않으시고, 인류로 하여금 끊임없이 타락의 길을 걷지 않도록 막으시려 하십니다. 


우리는 창세기 11장을 해석하면서 두 가지 주제에 집중하려는 오류를 범합니다. 하나는 11:1의 ‘온 땅의 언어가 하나요 말이 하나였더라’는 곧장 신약의 오순절 사건으로 끌고가 성령 안에서 한 언어를 구사하게 되었다고 말하는데 성경을 해석함에 큰 오류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사도행전 2:6에서 ‘큰 무리가 모여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을 듣고’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제자들이 한 언어로 말한 것이 아니라 다양한 언어로 복음을 전했다는 것입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때문에 넘어가겠습니다. 


또 하나의 문제는 바벨탑이 바벨탑에 아니라 성읍과 탑, 즉 성을 쌓은 것입니다. 성을 쌓고 성벽 주위로 탑을 쌓아 감시하는 역할을 했습니다. 여기어 성읍이란 단어가 히브리어 ‘이르’인데 가인이 하나님의 낯을 떠나 놋 땅에 자신의 아들인 에녹의 이름을 붙인 바로 그 성입니다. 10:12에서도 함의 손자 니므롯이 쌓은 ‘성읍’도 동일한 단어입니다. 그러니 이 성은 탑처럼 놓이 쌓아 하늘 끝까지 올라가는 그런 의미가 아니라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1-11절 바벨탑을 쌓다.

먼저 이들은 동쪽으로 이동했습니다. 제가 빈번하게 언급하고 강조했듯 성경에서 ‘동쪽’은 이방의 세계, 하나님을 떠남, 타락과 저주의 장소입니다.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쪽으로 쫓겨났고, 가인도 에덴의 동쪽에 거하다 더 동쪽으로 옮겨 갑니다. 아브라함의 조카 롯도 아브라함을 떠나 동쪽으로 떠납니다. 이제 노아의 후손들도 동쪽으로 가는 것에 동조합니다. 이것은 정확하게 하나님의 임재와 통제를 떠나 자신들만의 타락한 세상을 만들겠다는 상징적 의미입니다.


두 번째, 그들은 스스로 이름을 내고 스스로 흩어짐을 면하자 결의합니다. 마치 시편 2편에 등장하는 열방의 왕들과 관원들이 모습과 다르지 않습니다. 악의 동맹, 불의한 결탁을 통해 자신들의 세력을 형성합니다. 하나님은 이들을 어떻게 하시는가? 흩어지게 하십니다. 자 가만히 보십시오. 타락 이후 인간들은 모이면 모일수록 악해집니다. 하나님은 이때 그들을 흩으십니다.


가인에게 내린 유리하는 저주는 겉으로 보기에 저주였지만 사실은 축복이었습니다. 하나님께서 가인으로 하여금 유리하는 삶을 통해 자신이 지은 죄를 회개하고 하나님만을 의지하는 법을 배우도록 긍휼을 베푸신 것입니다. 그런데 가인은 하나님의 저주를 거부할 뿐 아니라 ‘표’에 대한 약속도 신뢰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보호하심이 아니라 성을 쌓고 자신이 자신을 지키려 했던 것입니다. 바벨탑 공동체도 가인과 전혀 다르지 않았습니다. 다른 것이 있다면 가인처럼 내버려 두지 않고 흩어 버립니다. 이것이 복입니다. 더 큰 심판이 오지 않도록 한 것이죠.


12-26절 셈의 족보

10-26절까지는 셈의 죽보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27절부터는 아브라함의 아버지인 데라 가족이 소개됩니다. 굳이 5장의 족보와 비교해 둔다면 두드러진 변화가 있습니다. 먼저 이 족보는 5장에서 나타난 ‘낳고 ~ 죽었다’는 패턴이 사용되지 않습니다. 그냥 ‘낳았다’는 표현만 계속됩니다.


둘째는 5장의 생몰연대가 현저히 차이가 납니다. 아이를 낳는 연령도 줄었지만 죽는 나이가 급격히 줄어드는 것을 발견합니다. 예를 들어 셈은 아르박삿을 낳고 오백년을 지내지만, 에벨은 사백삼십 년, 스룩은 이백 년, 나홀은 이백 년으로 점점 떨어집니다. 왜 그렇게 되는지 성경을 설명하지 않지만 인간이 오래 살아도 계획하는 것이 악할 뿐이라 생을 단축하는 지도 모릅니다.


이 족보는 바벨탑 사건과 별개의 사건이 아닙니다. 바벨탑 정신이 세상을 지배하고 있을 때, 하나님께서는 시대의 정신을 거스려 새로운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실 계획을 계획하고 계셨습니다. 그가 바로 아브라함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하나님을 거역할 때 오직 아브라함만이 하나님의 말씀을 쫓아갑니다. 단 한 명의 순종자가 모든 인류의 불순종의 힘보다 강합니다. 죽음의 강이 도도하게 흐를 때 한 사람의 순종이 역사에 생명의 강이 흐르게 했습니다.


27-32절 데라의 족보

데라의 족보는 앞으로 전개될 이야기의 전제

셈의 족보 안에 들어가 있는 데라의 족보를 따로 구분하여 설명합니다. 아마도 12장에 등장하는 아브라함을 소개하려는 의도로 보입니다. 데라는 아브람과 나홀과 하란을 낳습니다. 하란은 아버지 데라보다 먼저 고향 갈대아 우르에서 죽습니다.(28절) 이후 아브라함과 나홀의 결혼 소식이 전해집니다. 아브람의 아내는 사래이며, 나홀의 아내 이름은 말기입니다. 나홀의 아내 밀가를 유심히 봅시다.


밀가는 하란의 딸, 즉 또다른 형제의 딸입니다. 즉 나홀은 조카와 결혼한 것입니다. 밀가 외에 또 다른 여성이 등장하는데 이름이 ‘이스가'(29절)입니다. 성경은 정확하게 말하지 않지만 이스가가 사래의 또 다른 이름이 아닌가 학자들은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후에 사래를 아브람의 누이라고 소개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족보상으로 보면 이스가는 아브람의 조카입니다. 구약에서 ‘누이’라는 표현은 현재의 형제사이가 아니라 가족라고 할 수있는 공동체의 여성을 듯하기 때문에 조카나 먼 친척까지도 포함합니다. 이 문제는 넘어갑시다. 그리 중요한 문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중요한 것은 데라의 족보는 앞으로 전개될 모든 이야기의 배경이 됩니다. 아브람과 롯과의 관계, 이삭과 리브가, 야곱과 라반의 딸들은 모든 데라의 족보 안에 들어가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볼 때 성경이 아무렇게 작성된 것이 아니라 치밀하고 세밀하게 하나님의 의도를 드러내기 위해 기록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후사 없는 아브람

30절에서 사래가 임신하지 못했다고 말합니다. 즉 후사가 없습니다. 현재와 비할바는 아니지만 고대세계에서 아이를 낳지 못한다는 것은 더 이상 여자로서의 존재가 상실되는 것을 말합니다. 이후 하갈의 문제가 여기서 부터 만들어집니다. 또한 아브라함의 모든 존재론적인 부름과 사명은 사래의 아이 낳지 못함으로 인해 일어납니다.


아브람은 아무런 미래도 희망도 없는 존재였음을 밝힙니다. 이것이 바벨탑 사건이 주는 의미며, 바발탑 공동체의 본질입니다. 하나님은 바벨탑 공동체 안에서 아브람을 불러 내십니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절망에서 희망으로 불러 내어 새롭게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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