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편 7:1-17 묵상
- 공유 링크 만들기
- X
- 이메일
- 기타 앱
억울함을 하나님의 법정에 맡기는 사람
시편 7:1-17 묵상
시편 6편에서 다윗은 밤마다 눈물로 침상을 적시며 몸과 영혼의 구원을 구했습니다. 그 고통은 주로 자신의 내면과 육체를 무너뜨리는 아픔으로 묘사되었습니다. 시편 7편에 이르면 고난의 성격이 조금 달라집니다. 다윗은 자신을 추격하는 사람들과 거짓된 고발 앞에서 하나님의 공정한 판단을 요청합니다. 시편 6편이 눈물 속에서 드리는 병자의 탄식이라면, 시편 7편은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이 하나님의 법정에 올리는 호소에 가깝습니다.
표제는 이 시를 “다윗이 베냐민인 구시의 말에 따라 여호와께 드린 식가욘”이라고 소개합니다. 식가욘(שִׁגָּיוֹן)의 정확한 의미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격정적인 감정을 담아 부르는 노래나 불규칙한 운율의 탄식시를 가리키는 음악적 용어로 추정됩니다. 이 시편의 격렬한 감정과 급격한 흐름은 그 명칭과 잘 어울립니다.
베냐민 사람 구시가 누구인지도 정확히 알 수 없습니다. 사울 왕이 베냐민 지파 출신이었기 때문에 사울과 관련된 인물이거나 그를 지지하던 사람일 가능성이 있습니다. 다윗을 저주했던 시므이와 연결하기도 하지만, 이를 뒷받침할 확실한 증거는 없습니다. 다만 구시의 어떤 말이 다윗을 심각한 위험에 빠뜨렸다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는 다윗을 배신과 폭력, 부당한 행동을 저지른 사람으로 고발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시편 7편은 억울한 일을 당했을 때 어떻게 기도해야 하는지를 보여 줍니다. 사람은 거짓된 비난을 받으면 먼저 자신을 변호하고 상대를 공격하고 싶어집니다. 자신의 결백을 증명하기 위해 더 큰 목소리를 내거나, 상대가 받은 것보다 더 큰 수치를 당하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기 손으로 복수하기 전에 하나님의 법정으로 나아갑니다. 자신의 진실과 원수의 악을 완전하게 아시는 재판장에게 판단을 맡깁니다.
이 시편은 동시에 우리의 자기 확신을 경계하게 합니다. 다윗은 특정한 고발에 대해서는 결백을 주장하지만, 자신이 모든 면에서 죄가 없는 완전한 사람이라고 선언하지 않습니다. 억울한 일을 당했다고 해서 삶 전체가 의로워지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관계에서는 피해자이지만 다른 관계에서는 누군가에게 상처를 준 사람일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정의를 구하는 기도는 언제나 자신의 마음도 함께 살피는 기도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피하는 것이 믿음의 시작입니다
다윗은 “여호와 내 하나님이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를 쫓아오는 모든 자들에게서 나를 구원하여 내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는 먼저 자신의 위험을 설명하기보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고백합니다. “여호와 내 하나님”이라는 부름에는 언약적 신뢰가 담겨 있습니다. 온 세상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이 자신을 알고 돌보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고백입니다.
‘피하다’에 해당하는 하사(חָסָה)는 위험을 피해 안전한 곳에 몸을 맡긴다는 뜻입니다. 이것은 현실에서 무조건 도망치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닙니다. 자신의 힘으로 모든 위험을 막을 수 없음을 인정하고 하나님의 보호와 판단에 자신을 맡기는 적극적인 신뢰입니다.
우리는 위기를 만나면 여러 피난처를 찾습니다. 돈과 지위, 인간관계와 여론이 자신을 보호해 주기를 기대합니다. 때로는 끊임없이 해명함으로 평판을 지키려 하고, 상대보다 더 많은 사람을 내 편으로 만들어 안전해지려 합니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피난처는 언제든 흔들릴 수 있습니다. 오늘 나를 지지했던 사람이 내일은 돌아설 수 있고, 사실보다 소문이 더 빠르게 퍼질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을 추격하는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가장 먼저 하나님께 피합니다. 이것은 다른 모든 정당한 대응을 포기한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도 사울에게 쫓길 때 몸을 숨겼고, 압살롬의 반역을 피할 때 전략적으로 움직였습니다. 믿음은 현실적인 행동을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그 행동의 최종적인 의존 대상을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다윗은 원수가 사자처럼 자신의 영혼을 찢을까 두려워합니다. 사자는 먹이를 붙잡으면 도움을 요청할 틈도 주지 않고 갈기갈기 찢습니다. 거짓된 비난도 이와 비슷한 힘을 가질 수 있습니다. 한 사람의 평판과 관계, 직업과 공동체적 자리를 순식간에 파괴할 수 있습니다. 특히 자신을 변호해 줄 사람이 없을 때 억울함은 더욱 두렵습니다.
“건져낼 자가 없으면”이라는 말에는 다윗의 외로움이 담겨 있습니다. 그러나 그가 하나님을 부르는 순간 완전히 도움 없는 사람은 아닙니다. 인간의 변호자가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진실을 아십니다. 아무도 내 편에 서지 않는 것처럼 느껴질 때도 하나님은 사실을 왜곡하지 않으시며, 사람들의 수에 따라 판결을 바꾸지 않으십니다.
나에게 이런 죄가 있다면 심판받겠습니다
3절부터 다윗은 자신의 결백을 엄숙하게 주장합니다. 만일 자신이 고발받은 일을 행했고, 손에 죄악이 있으며, 화친한 사람에게 악으로 갚았거나 까닭 없이 대적의 것을 빼앗았다면 원수가 자신을 따라잡아 짓밟게 해 달라고 말합니다.
이것은 자신의 무죄를 가볍게 주장하는 말이 아닙니다. 자신이 거짓말하고 있다면 원수에게 패배하여 생명을 잃고 영광이 땅에 떨어지는 결과까지 감수하겠다는 맹세입니다. 고대의 법정적 언어로 말하면, 다윗은 하나님 앞에서 자신에게 저주의 판결을 걸고 진실을 호소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다윗의 결백 주장을 신중하게 이해해야 합니다. 그는 자신이 평생 아무 죄도 짓지 않은 완전한 사람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시편 6편에서는 하나님의 진노와 징계를 두려워했고, 다른 시편에서는 자신의 죄를 깊이 고백합니다. 지금 그가 주장하는 것은 구시가 제기한 특정한 고발에 대한 결백입니다.
신앙인은 겸손해야 하지만, 겸손이 거짓된 비난까지 사실로 인정하는 태도는 아닙니다. 잘못한 일이 있다면 회개해야 하지만, 하지 않은 일에 대해서까지 죄인처럼 행동할 필요는 없습니다. 자신을 낮춘다는 이유로 타인의 왜곡과 폭력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은 참된 겸손이 아닙니다. 진실은 사랑과 마찬가지로 하나님께 속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자신의 행위를 하나님 앞에 열어 놓습니다. “내 손에 죄악이 있거든”이라고 말하며 자신도 하나님의 판단을 받겠다고 합니다. 그는 원수만 심판대에 세우고 자신은 재판관의 자리에 앉지 않습니다. 정의를 구하는 사람은 먼저 자신의 손과 마음을 하나님의 빛에 비추어야 합니다.
우리는 억울한 일을 당하면 상대의 잘못만 크게 보게 됩니다. 자신의 말과 행동이 갈등을 키운 부분은 없었는지 살피기 어렵습니다. 물론 피해자에게 사건의 책임을 돌려서는 안 됩니다. 분명한 폭력과 악은 가해자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법정 앞에 선다는 것은 상대의 악뿐 아니라 자신의 모든 동기와 행동도 진실하게 내어 놓는다는 뜻입니다.
4절은 번역과 해석이 다소 어려운 구절입니다. 개역개정은 “화친한 자를 악으로 갚았거나 내 대적에게서 까닭 없이 빼앗았거든”이라고 번역합니다. 일부 번역은 후반부를 오히려 “까닭 없이 나의 원수를 구해 주었다”는 의미로 이해하기도 합니다. 어느 해석을 따르든 다윗이 배신과 부당한 폭력을 행사하지 않았다는 결백을 주장한다는 핵심은 분명합니다.
일어나소서, 정의로운 재판장이여
6절에서 기도의 어조가 더욱 강해집니다. 다윗은 “여호와여 진노로 일어나사 내 대적들의 노를 막으시며 나를 위하여 깨소서”라고 부르짖습니다. 하나님께서 실제로 잠들어 계신다는 뜻이 아닙니다. 침묵하시는 것처럼 보이는 하나님께서 적극적으로 개입하여 정의를 세워 달라는 시적인 요청입니다.
성경의 기도자는 하나님께 수동적인 체념만을 드리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뜻이겠지”라고 말하며 불의를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악이 멈추고 진실이 드러나도록 하나님께 강하게 부르짖습니다. 하나님의 주권을 믿는다는 것은 현실의 불의에 무관심해지는 것이 아니라, 정의를 위해 더 간절히 기도하게 되는 이유입니다.
다윗은 하나님께서 “명령하신 정의”를 자신을 위해 세워 달라고 요청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는 인간의 감정이나 시대의 여론에 따라 변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에게 유리한 것을 정의라고 부르기 쉽지만, 하나님은 자신의 거룩한 성품에 따라 판단하십니다.
‘재판하다’에 해당하는 샤파트(שָׁפַט)는 단순히 잘잘못을 가리는 행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무너진 질서를 바로 세우고 억압받는 사람의 권리를 회복하는 통치적 행동을 포함합니다. 성경에서 하나님의 심판은 악인을 벌하는 부정적인 행위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억울한 사람을 구하고 창조의 질서를 회복하는 구원의 행동이기도 합니다.
다윗은 민족들의 모임이 하나님을 둘러싸고, 그 위 높은 자리에 돌아오시기를 구합니다. 이것은 개인적인 분쟁을 넘어 온 세상을 판단하시는 하나님의 왕권을 바라보는 장면입니다. 다윗의 사건은 작은 개인사처럼 보이지만, 그가 호소하는 하나님은 모든 민족의 재판장이십니다.
우리의 억울함도 하나님께 사소하지 않습니다. 세상에는 수많은 사건이 있고 더 큰 고통을 겪는 사람도 있지만, 그렇다고 나의 눈물과 상처가 무의미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은 온 세계를 다스리시면서도 한 사람의 신음과 왜곡된 진실을 세밀하게 살피실 수 있는 분입니다.
내 의와 성실함을 따라 판단하소서
다윗은 “여호와께서 만민에게 심판을 행하시오니 여호와여 나의 의와 나의 성실함을 따라 나를 심판하소서”라고 기도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두려워하기보다 오히려 요청하는 이 표현은 매우 담대하게 들립니다.
‘성실함’으로 번역된 톰(תֹּם)은 온전함과 진실함, 분열되지 않은 마음을 뜻합니다. 다윗은 자신의 삶 전체가 도덕적으로 완전하다고 주장하지 않습니다. 현재의 고발과 관련하여 자신이 정직하게 행동했으며 배신과 폭력을 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하나님께서 인정해 달라고 구합니다.
이 기도는 진실하게 살았음에도 오해받은 사람에게 위로가 됩니다. 사람들의 평가는 언제나 정확하지 않습니다. 성실하게 일해도 동기를 의심받고, 누군가를 돕고도 다른 목적이 있었다는 말을 들을 수 있습니다. 최선을 다한 관계가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혼자 뒤집어쓸 때도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는 모든 사람을 설득해야만 평안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모든 오해를 풀 수는 없습니다. 설명해도 듣지 않으려는 사람이 있고, 진실을 알아도 자신의 입장을 바꾸지 않는 사람도 있습니다. 다윗은 인간의 여론을 최종 법정으로 삼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의 성실함을 아신다는 사실에 자신을 맡깁니다.
그러면서 그는 “악인의 악을 끊고 의인을 세우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의 관심은 개인적인 명예 회복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악의 구조가 끝나고 의로운 질서가 세워지기를 바랍니다. 악은 한 사람을 넘어 공동체 전체를 무너뜨리기 때문입니다.
악을 끊는 것과 의인을 세우는 것은 하나님의 심판이 지닌 두 측면입니다. 하나님은 파괴하는 악을 제한하시며, 동시에 선하고 진실한 사람이 설 수 있는 자리를 마련하십니다. 정의는 가해자를 처벌하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피해자의 존엄을 회복하고 공동체가 다시 진실 위에 서도록 만드는 일까지 포함합니다.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
9절 후반부에서 다윗은 하나님을 “사람의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이”라고 부릅니다. 개역개정이 ‘마음과 양심’으로 번역한 표현은 문자적으로 ‘심장과 콩팥’을 뜻합니다. 고대 히브리인들에게 심장과 콩팥은 생각과 감정, 의지와 동기가 자리하는 인간 내면의 중심을 상징했습니다.
하나님은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보지 않으십니다. 같은 행동도 어떤 동기에서 나왔는지 아십니다. 선한 일을 하면서도 인정받으려는 욕망을 품을 수 있고, 진실을 말하면서도 상대를 상하게 하려는 의도를 가질 수 있습니다. 사람의 눈은 외형에 머물지만 하나님은 마음의 가장 깊은 부분까지 감찰하십니다.
이 사실은 두려움과 위로를 동시에 줍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숨길 수 있는 것이 없으므로 두렵습니다. 종교적 언어와 선한 모습으로 사람을 속일 수 있어도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오해받는 이에게는 큰 위로가 됩니다. 표현이 서툴러 진심을 전달하지 못했어도 하나님은 그 마음을 아십니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순종과 눈물도 잊지 않으십니다.
다윗은 하나님께 자신의 내면을 감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이것은 자신감만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마음을 열어 놓는 용기입니다. 하나님의 공의를 구하는 사람은 “저 사람을 살펴보십시오”라고만 기도하지 않고 “나의 마음도 살펴보십시오”라고 기도해야 합니다.
우리는 자신의 동기를 완전히 알지 못합니다. 스스로 의롭다고 생각하지만 그 안에 자존심과 경쟁심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사랑이라고 믿었던 행동에 소유욕이 숨어 있기도 합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감찰이 필요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숨은 죄를 드러내어 정죄하기 위해서만 살피시는 것이 아니라, 거짓에서 벗어나 온전한 마음으로 살도록 치료하기 위해 살피십니다.
나의 방패는 하나님께 있습니다
10절에서 다윗은 “나의 방패는 마음이 정직한 자를 구원하시는 하나님께 있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처음에는 사자처럼 달려드는 원수를 두려워했지만, 이제 자신을 둘러싼 하나님의 보호를 바라봅니다.
방패는 공격 자체를 없애는 도구가 아니라 공격이 치명적인 상처가 되지 못하도록 막아 주는 도구입니다. 하나님이 방패이시라는 말은 성도에게 비난과 고난이 전혀 없다는 뜻이 아닙니다. 다윗은 하나님의 보호를 믿으면서도 추격과 모욕을 경험했습니다. 그러나 원수의 공격이 그의 영혼과 하나님의 부르심을 최종적으로 파괴하지는 못했습니다.
사람들의 말은 우리의 평판에 상처를 낼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주신 정체성을 빼앗을 수는 없습니다. 세상에서 자리를 잃을 수는 있어도 하나님의 사랑에서 쫓겨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이 방패이시라는 고백은 사람의 공격보다 하나님의 인정이 더 크다는 믿음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의로우신 재판장”이라고 선언합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악에 대하여 매일 분노하십니다. 여기서 하나님의 분노는 감정 조절에 실패한 인간의 폭발과 다릅니다. 악이 생명과 진실을 파괴하는 것을 거부하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이고 거룩한 반응입니다.
우리는 사랑의 하나님과 진노의 하나님을 서로 반대되는 모습으로 생각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선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악에 진노하십니다. 폭력당하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폭력을 무관심하게 바라볼 수는 없습니다. 거짓으로 고통받는 사람을 사랑하면서 거짓을 대수롭지 않게 여길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분의 사랑과 거룩이 악을 향해 나타나는 방식입니다.
돌이키지 않는 악을 향한 경고
12절과 13절은 하나님께서 칼을 가시고 활을 당기며 죽일 도구를 준비하신다고 묘사합니다. 이것은 전쟁터의 강렬한 이미지를 통해 하나님의 심판이 실제적이며 피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십니다.
그러나 이 말씀에는 중요한 조건이 있습니다. “사람이 회개하지 아니하면”이라는 표현입니다. 심판의 경고에는 회개의 초대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이 심판을 미리 알리시는 것은 죄인이 돌이킬 기회를 주시기 위함입니다.
‘돌이키다’는 슈브(שׁוּב)로, 가던 방향을 바꾸어 돌아선다는 뜻입니다. 회개는 죄에 대해 미안한 감정을 느끼는 데서 끝나지 않습니다. 악한 길을 멈추고 하나님께로 방향을 바꾸는 것입니다. 거짓을 말하던 사람이 진실을 말하고, 다른 사람을 해치던 사람이 손해를 회복시키며, 자기 욕망을 따르던 사람이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실제적인 변화입니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을 심판이 없다는 증거로 오해해서는 안 됩니다. 심판이 즉시 오지 않는 것은 하나님이 악을 승인하시기 때문이 아니라 회개할 시간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회개의 기회를 끝없이 악용할 수는 없습니다. 죄를 붙든 채 하나님의 사랑만 주장하는 것은 은혜를 자기기만의 도구로 만드는 일입니다.
이 경고는 다윗의 원수에게만 향하지 않습니다. 본문을 읽는 우리도 하나님 앞에서 돌이켜야 할 부분을 살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악에 분노하면서 자신의 반복되는 죄에는 관대하지 않은지, 상대의 거짓은 비난하면서 자신의 작은 왜곡은 합리화하지 않는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두려운 진리이지만 회개하는 사람에게는 구원의 문이 열려 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이 멸망하는 것을 기뻐하지 않으시며 악한 길에서 돌이켜 살기를 원하십니다. 칼과 활의 경고 앞에서도 우리는 절망만 할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자비를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악은 자신이 판 구덩이에 빠집니다
14절부터 시인은 악이 스스로를 파괴하는 과정을 생생하게 그립니다. 악인은 죄악을 낳기 위해 진통하고 재앙을 배어 거짓을 낳습니다. 죄가 우연한 실수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마음에서 잉태되고 성장하여 열매를 맺는 과정을 묘사합니다.
죄는 갑자기 완성된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습니다. 마음속 욕망을 오래 품고, 왜곡된 생각을 반복하며, 거짓을 정당화할 때 점점 구체적인 행동으로 자랍니다. 작은 미움이 복수의 계획이 되고, 사소한 거짓말이 더 큰 거짓말을 낳습니다. 죄를 마음에 품는 것은 결국 파괴를 잉태하는 일입니다.
악인은 웅덩이를 깊이 파지만 자신이 만든 함정에 빠집니다. 다른 사람을 넘어뜨리기 위해 만든 계략이 자신에게 돌아옵니다. 그의 재앙은 자기 머리로 돌아가고 폭력은 자기 정수리에 내립니다. 이것은 성경에서 반복되는 보응의 원리입니다.
하만은 모르드개를 달기 위해 높은 나무를 준비했지만 자신이 그곳에 달렸고, 다니엘을 고발한 사람들은 자신들이 의도했던 심판을 받았습니다. 악은 잠시 이익을 주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 자기 파괴의 씨앗을 품고 있습니다. 거짓으로 성공한 사람은 계속 거짓을 유지해야 하고, 폭력으로 권력을 얻은 사람은 더 큰 폭력 없이는 그 자리를 지키기 어렵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은 때로 외부에서 갑자기 임하지만, 때로는 죄가 자기 결과를 맺도록 내버려 두시는 방식으로 나타납니다. 욕심은 만족을 주지 못하고 더 큰 결핍을 만들며, 미움은 먼저 미워하는 사람의 영혼을 황폐하게 합니다. 타인을 파괴하기 위해 판 구덩이는 어느새 자신의 삶을 가두는 감옥이 됩니다.
이 사실은 우리가 직접 복수하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보여 줍니다. 악은 결국 하나님의 정의 앞에서 자기 열매를 거두게 됩니다. 우리가 악을 악으로 갚으면 상대가 판 구덩이에 함께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판단을 하나님께 맡길 때 악의 순환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만난 공의와 은혜
시편 7편은 그리스도를 직접 예언하는 대표적인 메시아 시편은 아닙니다. 그러나 억울하게 고발받는 의인과 의로우신 재판장, 죄에 대한 심판과 구원이라는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깊게 드러납니다.
다윗은 특정한 고발에 대해 결백했지만 모든 죄에서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죄가 없으신 의인이셨습니다. 그분은 거짓 증인들의 고발을 받았고, 불의한 재판을 거쳐 십자가형을 선고받으셨습니다. 인간의 법정은 무죄한 분을 죄인으로 판결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모욕하는 사람들에게 즉시 심판을 내리지 않으셨습니다. 자기 손으로 복수하지 않고 자신을 의롭게 심판하시는 아버지께 맡기셨습니다. 십자가에서 원수들을 위해 용서를 구하셨지만, 그것은 그들의 악을 선하다고 인정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죄의 심각성을 자신의 몸으로 담당하시며 용서의 길을 여신 것입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자비가 만나는 자리입니다. 하나님은 죄를 아무 일도 아닌 것처럼 넘기지 않으셨습니다. 동시에 죄인이 받아야 할 심판을 그리스도께서 대신 담당하게 하심으로 구원의 길을 여셨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 안에서는 공의가 은혜를 무너뜨리지 않고, 은혜가 공의를 약화하지 않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거짓된 판결을 뒤집으신 하나님의 최종적인 선언입니다. 세상은 예수님을 죄인으로 정죄했지만, 하나님은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심으로 의로우신 아들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억울하게 고난받는 성도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며 인간의 판단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사실을 믿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를 언제나 억울한 의인의 자리만 차지하게 하지 않습니다. 십자가 앞에 서면 우리 역시 그리스도를 못 박은 죄인의 편에 속해 있음을 깨닫습니다. 우리는 거짓된 고발을 당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말로 누군가를 정죄한 사람이고, 상처받은 사람이면서 다른 사람에게 상처를 준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시편 7편을 그리스도 안에서 읽을 때 우리는 정의를 구하는 동시에 자비를 구하게 됩니다.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합니다
시편의 마지막에서 다윗은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라고 고백합니다. 아직 모든 원수가 사라졌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의 의로운 성품을 바라보며 미리 감사합니다.
감사는 상황이 모두 원하는 대로 이루어진 뒤에만 가능한 반응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의로우시며 마침내 올바르게 판단하실 것을 믿기에 현재의 불확실성 속에서도 감사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마음은 원수의 말에서 하나님의 이름으로 이동했습니다. 처음에는 자신을 찢으려는 자들을 바라보았지만, 마지막에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을 바라봅니다.
‘감사하다’는 야다(יָדָה)로, 하나님의 성품과 행하심을 공개적으로 인정하고 찬양한다는 뜻을 지닙니다. 다윗은 자신의 결백만을 선포하며 끝내지 않습니다. 자신의 억울함보다 하나님의 의로우심을 더 크게 노래합니다. 이것이 기도가 이루어 내는 내면의 변화입니다.
억울함에 오래 붙잡히면 나를 해친 사람이 내 마음의 중심을 차지합니다. 아침에도 그를 생각하고 밤에도 그의 말을 되새깁니다. 실제로는 멀리 떨어져 있어도 마음속에서는 계속 그와 함께 살아갑니다. 그러나 기도는 그 중심 자리를 하나님께 돌려드립니다. 원수가 아니라 하나님이 내 생각과 감정의 마지막 주인이 되게 합니다.
시편 7편은 억울함을 무시하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짓을 진실처럼 받아들이거나 불의한 상황을 참고만 있으라고 권하지도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결백과 상처를 정직하게 하나님께 호소하고, 악이 멈추며 정의가 세워지기를 간구하게 합니다. 그러나 최종적인 판결과 보복은 하나님께 맡기게 합니다.
오늘 누군가의 말로 마음이 무너졌다면 먼저 하나님께 피해야 합니다. 해명할 일이 있다면 진실하게 설명하고, 보호받아야 할 상황이라면 적절한 도움을 구해야 합니다. 동시에 모든 사람을 설득해야만 살 수 있다는 부담은 내려놓아야 합니다. 마음과 양심을 감찰하시는 하나님께서 진실을 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정의감도 하나님의 빛 아래 세워야 합니다. 원수의 악을 드러내 달라고 기도하면서 내 안의 거짓과 교만도 살펴 달라고 구해야 합니다. 악이 끊어지기를 바라면서 악인이 회개하여 돌아올 가능성도 하나님의 손에 맡겨야 합니다. 이렇게 할 때 정의를 향한 열망은 복수심으로 변하지 않고, 은혜는 불의를 묵인하는 값싼 용서로 흐르지 않습니다.
인간의 법정은 잘못 판단할 수 있고 여론은 쉽게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마음과 양심을 살피시는 의로운 재판장이십니다. 그분은 악을 영원히 방치하지 않으며, 정직한 자의 눈물을 잊지 않으십니다. 사람이 판 구덩이는 결국 그 사람을 삼키지만, 하나님께 피하는 사람은 은혜의 방패 안에서 보호받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마지막 말은 원수를 향한 저주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를 향한 찬양이어야 합니다. 억울함이 아직 풀리지 않았어도 하나님이 의로우심을 믿을 수 있습니다. 진실이 가려져 있어도 부활의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 모든 것을 밝히실 것을 소망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자신의 손으로 심판자가 되지 않고,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법정에 모든 것을 맡길 수 있습니다. 그리고 다윗과 함께 고백할 수 있습니다. “내가 여호와께 그의 의를 따라 감사하며, 지존하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겠습니다.”
댓글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