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 16:1-14 해설과 묵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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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그늘과 공의로운 보좌
이사야 16:1-14 해설과 묵상
이사야 16장은 모압을 향한 예언의 두 번째 장입니다. 15장에서 우리는 무너진 성읍과 마른 물과 피난민의 울음을 보았습니다. 16장은 그 통곡 한가운데서 뜻밖의 요청을 들려줍니다. 모압의 피난민을 숨겨 주고, 한낮의 그늘처럼 보호해 달라는 요청입니다. 하나님은 심판을 말씀하시면서도, 고통받는 이들을 위한 피난처와 공의로운 통치를 함께 보여 주십니다.
모압은 요단 동편 고원에 자리한 나라였으며, 목축과 포도 재배로 알려진 땅이었습니다. 유다와는 오랜 갈등을 겪었지만, 위기의 때에는 유다와 시온을 향해 도움을 구할 수밖에 없는 이웃이기도 했습니다. 이사야 16장은 정치적 예언이면서 동시에 난민과 피난처, 교만과 회개, 통치와 정의에 관한 깊은 말씀입니다.
광야를 지나 시온으로 보내는 어린 양 (사 16:1)
본문은 “너희는 어린 양들을 셀라에서부터 광야를 지나 딸 시온 산으로 보내라”는 말씀으로 시작합니다. 어린 양은 모압이 유다 왕에게 바치던 조공과 연결될 수 있습니다. 열왕기하에도 모압 왕이 많은 어린 양과 양털을 이스라엘 왕에게 바쳤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여기서 어린 양을 보낸다는 것은 단순한 경제 거래가 아니라, 시온의 통치 아래 보호를 구하는 간절한 표현으로 읽을 수 있습니다.
모압은 자기 힘과 높은 산당과 풍요로운 포도원으로 자신을 지킬 수 없게 되자, 광야 길을 지나 시온을 바라봅니다. 사람은 모든 것이 무너진 뒤에야 자신이 진정 의지할 곳이 어디인지 깨닫기도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피난처를 찾는 자가 찾아오는 길을 가볍게 여기지 않으십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어린 양의 이미지를 더 깊이 바라보게 됩니다. 이 구절이 예수 그리스도를 직접 예언하는 본문은 아니지만, 성경 전체에서 어린 양은 하나님께 나아가는 속죄와 화해의 길을 떠올리게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공로나 대가로 하나님의 보호를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어린 양이신 그리스도의 은혜를 의지하여 하나님께 나아갑니다.
둥지를 잃은 새 같은 모압의 딸들 (사 16:2)
모압의 딸들은 아르논 나루에서 떠도는 새, 둥지에서 쫓겨난 새처럼 묘사됩니다. 둥지는 새가 알을 낳고 새끼를 기르며 쉬는 곳입니다. 둥지를 잃는다는 것은 단지 집 한 채를 잃는 일이 아니라, 삶의 안전과 다음 세대를 위한 자리를 함께 잃는 일입니다.
이사야는 난민을 숫자로 말하지 않습니다. 그는 그들을 둥지에서 쫓겨난 새로 봅니다. 이 이미지는 전쟁과 재난이 사람에게서 무엇을 빼앗는지를 조용히 드러냅니다. 사람은 살던 집과 밭과 언어와 이웃을 잃고, 어디에도 온전히 속하지 못하는 존재가 됩니다.
오늘 교회가 이 말씀을 읽을 때, 피난민과 이주민과 삶의 터전을 잃은 사람들을 추상적인 사회 문제로만 볼 수 없습니다. 물론 모든 현실적 문제에는 신중한 판단과 책임 있는 제도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를 따르는 공동체는 먼저 둥지를 잃은 사람의 두려움과 상실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타인의 피난이 되어 줄 수 있는 마음을 주십니다.
한낮의 그늘이 되어 달라는 요청 (사 16:3-4상)
본문은 시온을 향해 “너는 모략을 베풀며 공의로 판결하며 낮에 밤같이 네 그늘을 만들어 쫓겨난 자들을 숨기며 유리하는 자를 발각하지 말라”고 요청합니다. 모략 또는 지혜로운 판단(עֵצָה)은 단순히 좋은 생각을 내는 일이 아닙니다. 위기 가운데 있는 사람을 어떻게 보호하고, 무엇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지를 분별하는 지혜입니다.
공의(מִשְׁפָּט)는 법을 엄격하게 집행하는 차가운 태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힘없는 이가 억울하게 내몰리지 않도록 바로 판단하고, 약한 이의 생명과 권리를 지키는 하나님의 질서입니다. 이사야는 시온이 단지 강한 성벽을 가진 도시가 아니라, 피난민을 숨겨 주고 유리하는 자를 내어주지 않는 공동체가 되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한낮에 밤같이 네 그늘을 만들라”는 표현은 매우 아름답습니다. 뜨거운 광야의 한낮에 그늘은 생명을 지키는 자리입니다. 그늘(צֵל)은 잠시의 편안함을 넘어, 견딜 수 없는 열기에서 사람을 보호하는 은혜를 뜻합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이 세상에서 그러한 그늘이 되기를 바라십니다. 우리의 말과 공간과 관계가 상한 사람에게 더 뜨거운 햇볕이 아니라, 잠시 숨을 고를 그늘이 될 수 있기를 묻게 됩니다.
인애와 공의 위에 세워질 다윗의 보좌 (사 16:4하-5)
압제자가 사라지고 파괴하는 자가 그칠 때, 보좌가 인애 가운데 굳게 설 것이며 다윗의 장막에 한 왕이 진실함으로 앉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인애(חֶסֶד)는 감정적인 친절을 넘어,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신실한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힘과 공포로 유지되는 보좌가 아니라, 인애와 진실함 위에 세워지는 보좌를 약속하십니다.
그 왕은 공의를 구하며 정의를 신속히 행하는 자입니다. 그는 약한 이들의 피난처를 위해 판단하고, 공동체를 위해 의로운 결정을 내립니다. 이사야 9장과 11장에서 보았던 다윗의 메시아 왕에 대한 약속이 여기에서도 다시 울려 퍼집니다. 모압의 난민 문제와 다윗의 보좌가 함께 언급되는 것은 참된 왕권이 약한 이를 돌보는 공의와 분리될 수 없음을 보여 줍니다.
본문은 먼저 다윗 왕조를 향한 이상적 통치의 약속으로 읽어야 합니다. 그러나 어떤 유다 왕도 이 약속을 완전하게 이루지 못했습니다.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 보좌의 충만한 성취를 봅니다. 그리스도는 인애와 진실로 다스리시는 왕이시며, 죄인과 이방인과 상한 자를 품으시는 참된 피난처이십니다.
피난을 구하면서도 버리지 못한 교만 (사 16:6)
그러나 모압의 이야기에는 슬픈 전환이 있습니다. 이사야는 “우리가 모압의 교만을 들었나니 심히 교만하도다”라고 선언합니다. 교만(גַּאֲוָה)은 모압의 가장 깊은 죄로 드러납니다. 그들은 환난을 만나 피난을 구하지만, 마음 깊은 곳에서는 자기 높음과 분노와 허황된 자랑을 버리지 못합니다.
사람은 고난을 만나면 하나님께 도움을 구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도움을 구하는 것과 하나님 앞에서 마음을 낮추는 일은 같지 않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위기에서 하나님께 해결을 구하면서도, 내 뜻과 자존심과 오래된 원망은 끝까지 붙들고 싶어 할 수 있습니다. 모압의 문제는 단지 외적 침략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낮아지지 못하는 마음이었습니다.
회개는 자신을 비참하게 만드는 일이 아닙니다. 거짓된 높음에서 내려와 하나님께서 주시는 참된 생명으로 돌아오는 일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상처를 아시며 피난처를 열어 주시지만, 그 피난처 안에서 우리 안의 교만까지 치유하시기를 원하십니다.
들판과 포도원이 함께 우는 날 (사 16:7-10)
모압 사람들은 길하레셋을 위하여 통곡하고, 헤스본과 십마의 밭과 포도나무는 시들어 갑니다. 모압의 포도원은 한때 야셀과 광야와 바다 너머까지 뻗어 갈 만큼 풍성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열방의 주인들이 좋은 가지를 짓밟고, 여름 과실과 추수의 기쁨은 사라집니다.
이사야는 모압의 경제적 상실을 세밀하게 묘사합니다. 밭이 황폐해지고 포도나무가 시들며, 포도주 틀에서 노래와 기쁨이 끊어집니다. 이는 단지 수입이 줄어드는 문제가 아닙니다. 농부의 노동, 가족의 생계, 절기와 잔치의 기쁨, 공동체의 노래가 함께 사라지는 일입니다.
놀라운 것은 선지자의 태도입니다. 그는 “그러므로 내가 야셀의 애곡처럼 십마의 포도나무를 위하여 울리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심판을 선포하는 이사야가 모압의 포도나무를 위해 울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눈물이 없는 차가운 정의가 아닙니다. 하나님을 아는 사람은 죄를 분별하면서도, 황폐해진 들판과 상실한 사람들을 향해 함께 울 줄 압니다.
선지자의 속에서 울리는 하프 소리 (사 16:11-12)
이사야는 “이러므로 나의 마음이 모압을 위하여 수금 같이 소리를 발하며 나의 속이 길하레셋을 위하여 그러하도다”라고 고백합니다. 수금의 울림은 슬픔을 말로 다 담지 못할 때 영혼 깊은 곳에서 나는 떨림과 같습니다. 선지자의 애통은 감상적인 슬픔이 아니라, 하나님이 보시는 고통을 함께 바라본 사람의 마음입니다.
모압은 산당에 올라가 자기 신전에서 기도하려 하지만, 아무 효력이 없습니다. 위기의 때에 자신이 의지하던 신은 구원하지 못합니다. 사람은 평안할 때 자신이 무엇을 믿는지 잘 모르다가, 무너지는 날에야 진짜 의지처가 무엇이었는지를 알게 됩니다.
그러나 기도가 응답되지 않는 순간이 언제나 하나님께 버림받았다는 뜻은 아닙니다. 모압의 문제는 단지 기도의 형식이 부족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우상과 교만의 길 안에 머물러 있었기 때문입니다. 참된 기도는 하나님을 내 뜻을 이루는 수단으로 삼는 일이 아니라, 내 마음과 길을 하나님 앞에에 돌이키는 일입니다.
품꾼의 햇수처럼 정해진 세 해 (사 16:13-14)
마지막으로 하나님은 모압의 영광이 삼 년 안에 멸시를 당할 것이며, 그 남은 무리가 심히 적고 약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품꾼의 햇수처럼”이라는 표현은 품꾼이 자기 계약 기간을 정확히 세는 모습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심판의 때는 막연하거나 끝없이 늘어나는 시간이 아닙니다. 그분은 시작과 끝을 아십니다.
이 예언은 당시의 구체적인 역사적 위기 속에서 주어진 말씀입니다. 어느 침략과 사건을 정확히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해석이 나뉘지만, 이사야의 강조점은 분명합니다. 모압의 화려함과 많은 무리는 오래 지속되지 않으며, 하나님께서 정하신 때에 그 자랑은 낮아질 것입니다.
이사야 16장은 피난을 구하는 난민과 교만한 나라, 울어 주는 선지자와 공의로운 왕을 함께 보여 줍니다. 하나님은 가난한 이의 피난처가 되기를 원하시고, 자기 백성도 한낮의 그늘이 되게 하십니다. 동시에 하나님은 교만을 심판하시며, 인애와 공의 위에만 참된 보좌가 설 수 있음을 가르치십니다.
우리도 하나님의 그늘 아래 피난한 사람들임을 기억하게 하소서. 우리의 교회와 가정이 지친 이들에게 숨을 곳이 되게 하시고, 도움을 구하면서도 붙들고 있는 교만을 내려놓게 하소서. 인애와 진실로 다스리시는 그리스도의 보좌를 바라보며, 공의와 긍휼을 함께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수확 뒤에 남은 이삭과 아침의 평안
이사야 17:1-14 해설과 묵상
이사야 17장은 다메섹, 곧 아람의 수도를 향한 심판의 말씀으로 시작하지만, 곧 에브라임과 야곱의 운명을 함께 바라봅니다. 이사야 시대에 아람의 르신 왕과 북이스라엘의 베가 왕은 유다를 압박하며 앗수르에 맞설 동맹을 이루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의지한 정치적 연합은 오래가지 못했습니다. 다메섹과 에브라임은 앗수르의 거대한 힘 앞에서 무너져 갔습니다.
그렇다고 이사야가 단지 국제 정세를 예측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는 수확과 남은 이삭, 올리브나무의 열매, 잊힌 반석, 외래 식물과 마른 밭, 바다처럼 밀려오는 열방의 소리를 통해 인간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잊었는지를 묻습니다. 이 본문은 심판 가운데에도 남겨 두시는 은혜와, 모든 소란을 한마디로 흩으실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함께 보여 줍니다.
무너지는 다메섹과 사라지는 요새 (사 17:1-3)
“다메섹에 관한 경고라. 보라 다메섹이 장차 성읍 모양을 이루지 못하고 무너진 무더기가 될 것이라.” 다메섹은 오랜 역사와 군사적 힘을 지닌 아람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서 그 영광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성읍들이 버려지고,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양 떼가 누워도 두려워할 자가 없게 됩니다.
에브라임의 요새도 사라지고, 다메섹의 나라와 아람의 남은 자도 이스라엘의 영광이 쇠하는 것처럼 될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정치적으로 서로 손을 잡았지만, 하나님을 떠난 연합은 안전을 보장하지 못했습니다. 서로의 힘을 더해도 하나님의 판단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위기 속에서 더 강한 사람, 더 큰 조직, 더 많은 정보와 연대를 의지하고 싶어 합니다. 물론 책임 있는 준비와 협력은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최종 피난처가 될 때, 우리의 요새는 결국 무너질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성벽보다 하나님을, 동맹보다 언약의 주님을 먼저 바라보라고 가르칩니다.
수확 뒤에 남은 이삭처럼 (사 17:4-6)
이사야는 야곱의 영광이 쇠하고 그의 살진 몸이 파리해질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어서 수확하는 사람이 곡식을 거두고, 르바임 골짜기에서 이삭을 줍는 장면을 그립니다. 한때 풍성하던 들판이 베어지고, 곡식은 대부분 거두어집니다. 북이스라엘의 힘과 인구와 영광이 크게 줄어들 것을 보여 주는 이미지입니다.
그러나 완전히 아무것도 남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올리브나무를 흔든 뒤에도 꼭대기 가지에 두세 개의 열매가 남고, 무성한 가지에 네댓 개가 남는 것처럼, 하나님은 남은 자를 남기십니다. 남은 이삭 또는 남겨진 열매(עֹלֵלוֹת)는 인간의 힘으로 보존된 성공의 일부가 아닙니다. 심판 가운데도 끊어지지 않는 하나님의 긍휼의 표지입니다.
남은 자의 약속은 자신이 더 나은 사람이라는 자랑이 될 수 없습니다. 남은 자는 스스로 살아남았다고 말할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남겨 두셨기에 살았다고 고백할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에도 수확 후 들판처럼 많은 것이 비어 보이는 시간이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빈 들판에도 남은 이삭을 두시며, 끝처럼 보이는 자리에서 다시 은혜를 시작하십니다.
창조주를 바라보는 날 (사 17:7)
“그 날에 사람이 자기를 지으신 이를 바라보겠으며 그의 눈이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이를 뵈올 것이요.” 지으신 이 또는 창조주(עֹשֶׂה)는 단지 세상을 처음 만드신 분만을 뜻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자기 백성을 지으시고 붙드시며, 그들이 누구인지를 결정하시는 분입니다. 심판이 가져오는 가장 깊은 목적은 인간이 다시 창조주를 바라보게 하는 데 있습니다.
바라본다는 것은 무심히 쳐다보는 일이 아닙니다. 그동안 우상과 군사력과 풍요를 보던 눈이 하나님께로 방향을 돌리는 일입니다. 우리는 삶이 평안할 때 자주 하나님보다 손에 잡히는 것을 더 오래 바라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의 시선을 돌려, 우리가 잊고 있던 참된 주인을 보게 하십니다.
회개는 자기 삶을 망가뜨린 사람의 절망적 고백이 아닙니다. 창조주를 향해 눈을 드는 일입니다. 내가 만든 세계가 아니라 나를 지으신 하나님,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라 나를 붙드시는 거룩하신 이를 바라볼 때 영혼의 방향이 다시 바로잡힙니다.
손으로 만든 제단에서 돌이키는 길 (사 17:8)
이사야는 그 날에 사람이 자기 손으로 만든 제단을 바라보지 않고, 자기 손가락으로 만든 아세라와 태양상을 보지 않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우상은 단지 나무나 돌로 만든 형상만이 아닙니다. 인간이 자기 손으로 만들고, 거기에 안전과 의미와 구원을 기대하는 모든 것이 우상의 자리에 놓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손으로 만든 것을 더 신뢰하기 쉽습니다. 돈은 계산할 수 있고, 사람의 인정은 눈에 보이며, 성공은 숫자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하나님을 대신할 때, 우리는 결국 우리 자신의 손이 만든 것에 무릎을 꿇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손이 만든 것에서 눈을 돌려, 우리를 지으신 분을 바라보게 하십니다.
우상에서 돌이키는 일은 삶의 좋은 것들을 버리는 일이 아닙니다. 재물과 관계와 일과 재능을 하나님보다 더 높이지 않는 일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선물을 감사히 사용하되, 그 선물이 나의 하나님이 되지 않게 하는 것이 믿음의 자유입니다.
아름답게 심었으나 거둘 수 없는 밭 (사 17:9-11)
견고한 성읍들은 옛날 사람들이 버리고 떠난 숲속 처소처럼 황폐해질 것입니다. 그 이유는 백성이 “구원의 하나님을 잊어버리며 네 능력의 반석을 마음에 기억하지 아니하였다”는 데 있습니다. 잊다(שָׁכַח)는 단순히 기억에서 사라졌다는 뜻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를 실제 삶에서 밀어내고, 그분 없이 살아도 된다고 여기는 태도입니다.
하나님은 “네 구원의 하나님”이시며 “네 능력의 반석”이십니다. 반석(צוּר)은 흔들리는 땅 위에서 몸을 기대고 숨을 수 있는 견고한 바위를 뜻합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은 그 반석을 잊고, 아름다운 식물을 심으며 이방의 가지를 심었습니다. 이는 실제 농사의 이미지를 사용하면서도, 하나님 아닌 것에서 번영을 얻으려는 종교적·정치적 의지를 드러냅니다.
사람은 정성껏 심고 물을 주며 빨리 자라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을 잊은 밭은 수확의 날에 근심과 심한 슬픔만 남길 수 있습니다. 모든 열심이 열매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무엇을 심는가만큼, 누구를 의지하며 심는가가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잊은 성공은 잠시 무성해 보여도 영혼을 살리는 열매를 맺지 못합니다.
바다처럼 몰려오는 열방의 소리 (사 17:12)
본문은 갑자기 많은 민족의 소란을 바다 물결의 소리에 비유합니다. 열방은 큰 물이 몰려오는 것처럼 떠들며, 나라들은 거대한 파도처럼 요동합니다. 이사야 시대의 사람들은 북쪽에서 내려오는 앗수르의 군대와 여러 나라의 움직임을 보며, 자신들이 거대한 물결에 휩쓸릴 것이라 느꼈을 것입니다.
세상의 소란은 바다와 같습니다. 끊임없이 밀려오고, 크고 무섭고, 한 사람의 힘으로는 막을 수 없어 보입니다. 전쟁의 소문, 경제의 불안, 관계의 갈등, 사람들의 수많은 판단이 우리 마음속에서도 바다처럼 출렁일 수 있습니다. 이사야는 그 소란을 작게 보라고 하지 않습니다. 파도는 실제로 높고, 사람은 실제로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바다의 소리가 하나님의 음성보다 크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은 열방의 요동을 들으시며, 그 물결의 끝을 아십니다. 믿음은 파도를 보지 않는 일이 아니라, 파도 너머에 계신 하나님을 잊지 않는 일입니다.
한마디 책망 앞에 흩어지는 물결 (사 17:13)
열방이 많은 물결처럼 몰려오지만, 하나님께서 그들을 꾸짖으시면 멀리 도망하고 바람 앞의 산의 겨처럼, 폭풍 앞의 티끌처럼 흩어질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은 군대를 다시 보내어 더 큰 군대로 맞서시는 분으로 묘사되지 않습니다. 그분의 책망 한마디가 열방의 소란을 흩으십니다.
이 말씀은 하나님의 권세가 얼마나 절대적인지를 보여 줍니다. 인간의 권력은 많은 사람과 무기와 자원으로 자신을 증명하지만,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다스리십니다. 세상이 스스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떠들어도, 하나님의 허락 없이 한 걸음도 영원히 나아갈 수는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 바람과 바다를 꾸짖으셨을 때 바다가 잔잔해진 장면은 이사야의 말씀을 떠올리게 합니다. 이사야 17장이 그 사건을 직접 예언하는 것은 아니지만, 복음서의 예수님은 자연과 열방과 인간의 두려움을 다스리시는 하나님의 권세를 드러내십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세상의 소란보다 크신 주님의 음성을 듣습니다.
저녁의 공포와 아침의 사라짐 (사 17:14)
“보라 저녁에 보니 환난이더니 아침이 되기 전에 그들이 없어졌나니.” 밤은 불안과 공포를 크게 만듭니다. 어둠 속에서는 위협이 더 가까이 다가온 것처럼 느껴지고, 아침이 올 것이라는 사실조차 잊기 쉽습니다. 이사야는 한밤의 공포가 하나님 앞에서 영원하지 않다고 선포합니다.
이 말씀은 모든 문제가 하룻밤 사이에 해결된다는 약속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종종 긴 시간 동안 우리를 기다리게 하시고, 고난의 길을 지나가게 하십니다. 그러나 어떤 위협도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하나님의 마지막 뜻이 될 수는 없습니다. 저녁의 공포는 아침의 하나님을 이기지 못합니다.
이사야 17장은 다메섹과 에브라임의 심판을 통해, 사람이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잊는지를 드러냅니다. 하나님을 잊은 밭은 수확의 날에 근심을 남기지만, 창조주를 바라보는 눈에는 회복의 길이 열립니다. 심판 뒤에 남은 이삭처럼, 하나님은 은혜로 남은 자를 보존하십니다.
우리의 마음이 손으로 만든 우상과 세상의 소란을 더 오래 바라보지 않게 하소서. 구원의 하나님, 능력의 반석이신 주님을 다시 바라보게 하시고, 저녁의 공포 속에서도 아침을 준비하시는 하나님의 신실하심을 믿게 하소서. 그리스도 안에서 주시는 참된 평안으로 오늘을 살아가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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